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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자기파괴적 VS 자기희생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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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자기파괴적 VS 자기희생적

차현이 손을 들어 보인 이는 조금 전까지 화보 촬영을 하던 바로 그 모델이었다.

막 촬영을 끝낸 남자가 차현의 부름에 응하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자 조금 전 복도에서의 상황이 떠올랐다.

차가운 오만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르는 남자는 미세하게 구겨진 미간조차 범상치 않았다.

그 모습 그대로, 무표정한 얼굴로 걷는 남자의 뒤를 촬영 스태프들이 따라붙었다.

성큼 내딛는 남자의 보폭을 종종걸음으로 뒤쫓는 스태프들의 표정에 긴장이 역력했다.

그런 스태프들에게 마치 자비를 베풀 듯 커프스링크를 건네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꼭 그들 위에 군림하는 절대자 같다고나 할까. 살짝 내리깐 눈과 미소조차 머금지 않은 입술이 오만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그 모습이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워 아직도 촬영장의 조명이 그를 비추고 있나,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래서일까, 또다시 등줄기 쪽이 선득해졌다.

물론 비슷한 느낌을 차인우에게 받기는 했다. 의미 면에서는 완전히 달랐지만.

차인우 쪽은 면접을 코앞에 둔 취준생의 긴장감이었다면 이쪽은 조금 더 짙은 감정의 소용돌이이다.

이를테면 거장의 걸작품을 마주할 때 느껴지는 감동 같은.

아니면 범접할 수 없는 대상을 대면하고 느끼는 본능적인 두려움 같은.

얼핏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범접할 수 없는 대상이 코앞까지 다가서고 나서야 제가 그를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은 씨?”

차현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온 여은은 살짝 숨을 참아야 했다.

차갑게 반들거리는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묘한 느낌으로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잠시 스치며 보던 것보다 훨씬 압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사람 자체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분위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언가.

직업적 특성상, 그것이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기운이라는 것을 알기에 여은은 그저 숨을 죽일 뿐이었다.

이 남자는 타고난 포식자이다.

그것도 먹이사슬 최상층의 포식자.

길들일 수 없는 야생성을 가진 존재.

보드라운 기질의 차인우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란 뜻이었다.

이 남자가 의뢰인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얼핏 했을 때다.

“여은 씨, 인사해요.”

차현이 남자를 소개했다.

“우리 한주 그룹 전략 기획 본부 본부장…….”

본부장?

모델이 아니었어?

“차도하.”

놀란 여은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한주 그룹 전략 기획 본부의 본부장에 차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설마.

조금 전 차현이 차인우에게 흘리듯 던진 말이 떠올랐다.

[네가 마음에 들면 뭐 하니? 도하가 마음에 들어야지.]

발바닥부터 스멀거리며 불길한 생각이 타고 올랐다.

“내 또 다른 조카.”

차현이 차도하를 바라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한주의 자랑스러운 얼굴이지. 내가 페르소나에 의뢰한 인물이기도 하고.”

묵직한 체증이 가슴을 짓누르는 듯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의뢰인이 차인우가 아니라 차도하라고?

상냥하고 말랑한 솜사탕 같은 남자가 아니라 언제라도 목덜미를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는 야생 표범 같은 남자를 잇남으로 만들어 달라는 거고?

막막했다.

이미지 트레이너가 된 지 벌써 3년 차다.

스타일 매니저 경력까지 더해서 제법 긴 시간 다른 사람들의 이미지를 관리해 왔는데, 이런 고난도의 프로젝트는 처음이었다.

이번 일의 난이도가 ‘아주 쉬운’에서 ‘미치게 어려운’으로 치솟는 순간이었다.

차도하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기어코…….”

그녀를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에 설핏 경멸이 어렸다.

안 그래도 차가운 이미지인데, 그저 눈썹 하나 까딱하는 것으로 순식간에 얼음꽃을 피우며 주위의 공기마저 서늘하게 식힌다.

“이미지 트레이너를 데리고 왔다는 거네? 내 의견은 무시하고?”

삐딱하게 기우는 눈썹과 뒤틀리는 입꼬리가 오만한 얼굴에 불량스러움을 슬쩍 덧입혔다.

웃기는 건 이런 순간조차 차도하에게는 도도한 우아함이 흐른다는 거다.

과연 이런 남자에게 이미지 트레이닝이 필요할까.

왜? 뭘 위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여은에게 차현이 말을 붙였다.

“미안, 여은 씨. 보시다시피 우리 차도하 본부장이 좀 거칠어요. 그래도 예쁘게 봐줄 거죠?”

차현의 말에 다시 현실로 돌아온 여은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눈앞의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제 명함을 내밀었다.

이 남자의 말 한마디에 자신과 페르소나의 미래가 달려 있으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차도하 본부장님. 저는 이미지 트레이닝 센터 페르소나의 서여…….”

하지만 애쓴 보람도 없이 차도하는 최악의 발언을 내뱉었다.

“이미지 트레이닝 따위, 필요 없습니다.”

그녀가 내민 명함을 오만한 시선으로 훑은 그가 차갑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돌아가요. 서……여은 씨.”

돌아가라니,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디 이런 상황마저 테스트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차도하는 그런 그녀의 바람이 아주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걸 보여 주기라도 하려는 듯 무심히 돌아섰다.

돌아서는 차도하가 서늘한 목소리로 한마디 툭 내뱉는다.

“차현 관장님은 참…… 효율적인 것 같으면서도 비효율적이야?”

그의 목소리에 비아냥이 어려 있자 차현의 미간이 구겨졌다.

“차도하 본부장!”

차현의 목소리가 짐짓 엄하게 스튜디오를 울렸다.

하지만 재킷을 집어 든 차도하는 그런 차현의 부름에는 아랑곳없이 스튜디오 문을 향해 걸었다.

“차 본부장. 야! 차도하.”

그런 그의 뒤를 따르는 차현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회장님 명령이야. 이게 기본 조건이라고.”

스튜디오 B의 하얀색 나무 문.

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춰 세운 차도하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의 시선이 여은에게 머문 듯도 했다.

그러더니 아주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명령을 따라야 해요? 원해서 하는 것도 아닌데?”

“도하야.”

“그렇게 다급하시면 회장님더러 직접 하시라고 해요. 한주의 얼굴.”

이미지는 개뿔.

여은에게 시선을 던지며 기어코 한마디를 더 얹은 차도하가 스튜디오를 벗어났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스튜디오의 공기가 흐물거리며 녹아내렸다.

한껏 힘이 들어가 있던 여은의 발끝도 간신히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 * *

“망했어.”

신사동 세로수길에 위치한 이미지 트레이닝 센터 ‘페르소나’.

페르소나의 루프탑 휴게실에 앉은 지수가 두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이번 일 성사 못 시키면 차현 관장님이 투자금 전액 회수하시겠대.”

조금 전, 차현과 통화한 지수는 계속 이 상태이다.

차현이 페르소나의 가장 큰 자금줄이긴 하지만 지수의 능력이라면 다른 투자자를 찾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다.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으로 그친다면야 이럴 것까지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차현은 투자금 회수에 버금가는 것으로 지수를 협박하고 있었다.

[-내가 투자금 회수로 그칠 것 같아? 업계에서 못 버티게 맥을 다 끊어 놓을 거야. 알잖아. 지금 페르소나가 협업하고 있는 메모리즈 엔터테인먼트도 내 쪽에서 움직일 수 있다는 거. 라 메를랑 호텔도 마찬가지고.]

업계에서의 매장.

차현에게는 그럴 힘이 있었다. 그것도 차고도 넘치게.

문화, 예술 분야에서 차현의 힘이 닿지 않는 곳이 적어도 이 대한민국 땅에서는 없으니까.

“아니, 그쪽 조카가 죽어도 안 한다는 걸 우리가 어떻게…… 하냐고.”

머리를 쥐어뜯은 지수가 울상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말이 한주 그룹 핏줄이지, 그 유명한 망나니 차도하 아니냐고.”

“망나니 차도하요?”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는데, 소문이 흉흉하더라고. 술, 여자에 온갖 사건, 사고는 다 몰고 다닌다고.”

지수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 보수적인 한주가에서 어떻게 저런 자식이 나왔냐고 하더라. 차지섭 회장님도 두 손 두 발 다 들어서 여태 미국에 처박아 둔 거라고.”

차도하가 그런 사람이라고?

여은의 눈매가 살며시 가늘어졌다.

“암튼. 차지섭 회장님도 어떻게 못 한 사람을 우리가 뭘 어떻게…… 하냐는 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얼핏 들어도 말이 안 되는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차현은 이런 정당한 푸념조차 통하지 않을 사람이다.

지수를 바라보며 여은의 한숨도 짙어졌다.

세 시간 전. HJ 갤러리를 나서는 여은에게 차현이 한마디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여은 씨가 도하의 이미지 트레이너가 되어야 해요.]

그런 차현에게 여은은 제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미학과 졸업 후 심리학으로 박사 학위 받았습니다.]

[나도 알아. 서여은 씨 학부는 물론이고 석박사 모두 한국 대학교라는 거.]

[실무로도 이쪽으로는 잔뼈가 굵습니다.]

[알아요. 그러니 서여은 씨에게 도하를 부탁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차도하는 길들이지 못한다.

[차도하 본부장님은 이미지 트레이닝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이미 자신만의 색이 있고, 확고한 정체성이 성립된…….]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완성형의 사람이다. 자신의 표정과 말이 어떤 영향을 불러올지 이미 다 계산하고 행동하는 사람.

그리고 그걸 본인이 제일 잘 안다.

차마 뒷말을 뱉지 못하자 차현이 서늘하게 웃었다.

[지기만의 색이 있지. 확고한 정체성도 있고. 누구보다 강하고, 누구보다 똑똑해. 그리고 무척이나 아름답지. 한마디로 완벽한 아이야.]

[네. 그러니 이미지 트레이닝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차도하 본부장님은 트레이닝될 수 없는 분이세요. 본인의 현재 상태에 완벽하게 만족하는 분이시거든요.]

[하지만 그 만족감을 자기 파괴적으로 사용하는 존재기도 하지.]

첫눈에 도하의 가치를 알아봐 준 것은 고마운데, 차도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그런 그를 자기 파괴적으로 만들기 충분한 곳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완벽한 내 조카가 조금 더 바람직하게 쓰임 받기를 원해요. 그러려면 지금의 거친 모습은 내려놓아야 해.]

[그러면…….]

[맞아요. 포악한 야생 동물을 같이 한번 길들여 보자는 거야.]

[같이…… 말씀이신가요?]

‘같이’라는 말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만큼 차현이 이 일에 적극적이라는 뜻이니까.

하지만 그래서 더 큰일이었다.

큰 기대와 뜻을 품은 만큼 일이 틀어졌을 때의 반대급부도 클 것이 분명했다.

[내 성격 알지? 난 차도하 본부장의 이미지 트레이너로 이미 서여은 씨를 정했고, 그게 관철되지 않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거야. 그러니 하겠다고 해. 아니, 반드시 해내.]

다른 방법은 없다.

차도하를 설득할 수밖에.

“선배, 아니 대표님.”

머리를 쥐어뜯다 못해 이제는 이마를 테이블에 찧고 있는 지수를 여은이 불렀다.

“내가 어떡하든 해 볼게요.”

여은의 말에 지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뭘 하려고. 됐어.”

대학 학부 시절, 동아리에서 선후배로 만나 지금까지 9년을 이어 오는 인연이다.

지수는 그녀의 표정만 봐도 뭘 하려는지 알겠다는 듯 여은을 나무랐다.

“너 그거 병이야.”

연속적으로 찧던 이마가 아픈지 손으로 이마를 살살 매만지며 지수가 말을 이었다.

“자기희생적인 거? 그거 병이라고. 결국에는 아무도 안 알아줘.”

아주 단호한 표정이었다.

“가족도, 회사도. 너 자신보다 소중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야. 알아?”

대표인 나도 가만히 있는데 네가 왜 나서니? 아서라.

이게 다 할머니가 어려서부터 널 가스라이팅해서 그렇다.

뭐든 네 탓이고, 뭐든 네가 해결해야 하지.

그거 좋은 거 아니다.

결국 혼자만 독박 쓰고 희생당하는 거지.

길게 이어지는 지수의 잔소리를 들으며 여은은 차현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나는, 아니 우리 한주 그룹은 전화 한 통만으로도 페르소나를 망하게 할 수 있어.]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한주 그룹의 정보력은 대한민국 최강이라더니, 차현은 그녀의 가장 아픈 부분마저 건드려 왔다.

[그뿐일까? 여은 씨 가족을 망칠 수도 있어. 당연히 어머니 수술도 뒤로 미뤄지겠지? 아니, 수술 예약조차 할 수 없을 거야.]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차현은 마지막까지 잔인했다.

[그러니 해내. 반드시 해내서 구질구질한 여은 씨 인생, 구원하라고.]

독박 쓰고 혼자만 희생당하는 거라고?

그럼 어떡해.

구질구질한 그녀의 인생을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는데.

“희생하는 거 아니에요. 돈 벌려는 거지. 알잖아요. 나 돈 필요한 거.”

지수에게 방긋 웃어 보인 여은은 좀 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해 볼게요, 차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