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도끼질
#3화 도끼질
해 보겠다고 호기롭게 선언하기는 했지만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저 가만히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어 여은은 고전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옛 속담에 기대어 나무가 넘어갈 때까지 찍어 보기로 한 것이다.
차현에게 전화를 건 여은은 차도하의 일주일 치 스케줄을 요구했다.
차현은 급한 성미답게 곧바로 그녀가 요구한 것을 메일로 보냈다.
차도하의 일주일 스케줄과 그에 대한 기초 자료였다.
메일을 열어 본 여은의 미간이 불쾌하게 좁혀졌다.
차현의 메모 때문이다.
<웃기는 말이기는 한데, 차도하 본부장은 예쁜 여자를 좋아해. 그러니 여은 씨가 가진 걸 최대한 활용하길 바라. 그럼 건투를 빌게.>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고.”
한숨을 가늘게 내쉰 여은은 안경을 벗어 서랍 안에 넣었다.
“가진 걸 최대한 활용하라니, 필요하다면 미인계라도 쓰라는 말이잖아.”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도 풀어 버렸다.
“분부 받들죠.”
어차피 시작부터 ‘예쁜 얼굴’ 징크스로 일그러진 일이었다.
여기서 더 나빠질 것도 없다는 뜻이다.
한계를 뛰어넘어 성과를 이루어야 할 때라는 거지.
그녀에게는 약점이 아주 많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여은은 포트폴리오를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 * *
화요일 오전.
HJ 백화점 리뉴얼 오픈 행사에 참석한 도하는 테이프 커팅식을 끝내고 백화점을 한 바퀴 돌았다.
뒤따르는 백화점 임원들의 설명을 들으며 직원들을 격려하는 일은 단순해 보여도 제법 중요한 일이었다.
HJ 백화점 측에서는 본사의 관심이 지대하다는 사실을 어필할 수 있어 직원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된다.
그사이 한주 그룹 홍보실에서는 한주의 새 얼굴인 도하의 사진을 알차게 챙겼을 것이고.
차지섭 회장의 표현대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거양득의 예쁜 쇼가 제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왼쪽 손목을 들어 올린 도하가 시간을 확인했다.
아무리 예쁜 쇼라도 길어지면 지겨운 법이다.
적당히 끊어 쓰는 센스도 있어야지.
“저는 그만 가 보겠습니다.”
더 있다가는 HJ 백화점이 속한 한주 물산 임원들과 원치 않는 점심 회동을 하게 생겼다.
아니나 다를까.
HJ 백화점 대표가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 13층 식당가의 오마카세 일식당이 아주…….”
“차인우 대표님도 안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물산 임원분들과 식사를 하겠습니까?”
제법 정중하게 돌려서 말했다.
하지만 살벌한 눈빛만큼은 감추지 않았다.
한주 물산.
이제 곧 물갈이를 시작해야 하는 계열사이다.
그런 곳의 임원들과 식사라니,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여기 계신 분 가운데 대부분이 한 끼에 20만 원씩이나 하는 오마카세 요리를 희희낙락 즐기고 있을 여유, 없을 텐데요?”
가시를 선명히 드러낸 말이었다.
그런데도 눈치 없는 몇은 월급이 얼마인데 겨우 20만 원으로 여유가 없겠냐며 가시를 농담으로 받아치기 바쁘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이어진 말에는 입이 쑥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럴 여유 있으면 가서 책상 정리나 하시는 게 맞죠.”
쇼는 이미 끝났다는 이야기였다.
홍보용으로 쓰일 예쁜 사진 역시 제법 챙겼으니 더는 친절하게 굴 필요가 없다는 뜻이고.
“오마카세 요리는 책상 안 빼도 되는 분들만 드시는 걸로 하죠.”
파랗게 굳어 가는 한주 물산 임원들의 얼굴을 흡족한 눈으로 바라본 도하는 이내 걸음을 돌렸다.
그의 뒤를 수행비서인 김정주 과장이 따른다.
“본부장님.”
다음 스케줄까지는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는 것으로 기억한다.
비는 시간에 김정주 과장과 간단하게 우동이나 먹을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조금 전에 차현 관장님께서 연락하셨는데.”
그런데 의외의 복병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사람을 보냈으니…….”
김정주 과장이 말을 끝내기도 전, 도하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서 있는 곳에서 대각선 방향.
아는 얼굴 하나가 그와 시선을 마주하자 얌전히 고개를 조아린다.
그 여자다. 이미지 트레이너 서여은.
“……포트폴리오를 확인해 주십사 하셨습니다.”
포트폴리오.
도하의 시선이 여자의 품에 안겨 있는 두툼한 책자에 닿았다.
하, 기어이 일을 이런 식으로 진행하겠다는 거지?
시선은 여자에게 둔 채 도하가 차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에 설핏 당혹감이 깃든다.
이어 수화기에서 차현의 밝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도하니?
“뭐 하자는 겁니까? 안 한다고 했잖아요.”
-거부하지 마. 네가 손해 볼 건 없잖아.
차현이 달래듯 말을 이었다.
-그냥 하는 시늉만이라도 해. 그러면 내가 다 알아서…….
“알아서 뭘 하실 건데요? 내가 회장님 인형 놀이에 얌전히 응해 주면 차현 관장님이 나 대신 결혼이라도 하려나? 그 ST그룹 고명딸이랑?”
-결혼이 대수니? 네 아버지 자리를 되찾는 거야. 살아 있었으면 마땅히 누렸어야 하는 그 자리. 넌 비명횡사한 네 아버지가 불쌍하지도 않니?
기어코 차현의 입에서 도하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한주 그룹 차지섭 회장의 차남인 차강.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지 6년이 흘렀건만, 아직도 그 이름은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다.
차지섭 회장의 지엄한 명령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현은 달랐다.
쌍둥이 남매 아니랄까, 오직 차현만이 차강에 대한 끈을 여태 놓지 않고 과거를 들추어내곤 했다.
도하는 그것 역시 달갑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소비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이야기는 하지 말죠? 별로 듣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차현은 멈출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네 할아버지, 이미 결심했어. 너도 알잖아. 결심한 이상 반드시 하게 만든다는 거. 그러니 그냥 져 드려. 그러니까 내 말은…….
잠시 뜸을 들인 차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결혼을 하라는 게 아니라 그냥 얌전히 인형 노릇 좀 해 드리면서 네가 원하는 것을 가지라는 뜻이야.
원하는 것을 가지라니.
“내가 뭘 원할 줄 알고.”
코웃음을 흘린 도하가 입꼬리를 서늘하게 말아 올렸다.
“그러다 한주 그룹을 갖겠다고 하면 어쩌려고”
차현이 듣고 싶은 대답이 이런 종류였던 모양이다.
수화기 너머가 다소 격앙되고 있다는 게 여지없이 느껴진다.
-뭐가 문제니? 가지면 되지? 어차피 능력 있는 놈이 가지는 거야. 힘만 손에 넣으면 결혼도 네 맘대로 해도 돼. ST 따위가 널 탐낼 일이겠니?
권력도, 여자도, 돈도.
능력 있는 사람이 죄다 가지게 되는 게 세상 이치라며 떠들어 댔다.
-한주의 정점에 서야 네가 원하는 걸 가질 수 있다는 뜻이야. 한주에는 분명 피라미드 꼭대기에 오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게 존재하니까.
마치 그가 찾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듯 말한 차현이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트레이닝 받아. 일부러 예쁜 애로 맞춰 줬잖아. 걔가 예쁘기만 한 줄 아니? 똑똑하기도 해. 여러 가지로 쓸모 있을 거란 이야기야.
똑똑한 여자, 여러 가지로 쓸모 있는.
도하의 시선이 바짝 얼은 채 저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를 느릿하게 훑었다.
어느덧 그의 발길은 여자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별다른 말 없이 전화를 끊은 그는 휴대전화를 슈트 안에 밀어 넣으며 여자에게 다가섰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에 여리게 어린 홍조가 꼭 복숭아 속살 같았다.
“서여은 씨.”
기억하는 이름을 내뱉자 밤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네, 본부장님.”
“같이 밥 먹을래요?”
조금은 즉흥적인 초대였다.
* * *
차도하를 따라 밥을 먹으러 들어온 곳은 을지로에 있는 자그마한 우동 가게였다.
세월이 느껴지는 공간에 테이블은 겨우 다섯 개.
재벌가 사람이 드나들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할 곳이다.
그런 곳에 제법 익숙하게 발을 들인 차도하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더니 묻지도 않고서 우동 세 개를 시킨다.
차를 주차하느라 살짝 늦게 들어온 김정주 과장이 먼저 자리에 앉고, 이어 여은이 앉았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포트폴리오를 무릎에 올리고서 조용히 주위를 살폈다.
시선을 둘 곳이 마땅히 없어서였다.
하필 앉아도 차도하의 맞은편에 앉아서는, 어디로 눈을 둬도 그가 시야에 걸렸다.
차도하와의 두 번째 만남.
기분이 묘했다.
어제 HJ 갤러리에서 본 그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하나의 예술 작품 같은 존재였다.
거친 오만함이 넘쳐흘렀지만 타고난 우아함 때문일까, 마치 그는 그런 식으로 행동해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유분방함과 품위 있는 격식을 능수능란하게 넘나들며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차도하.
여은 역시 그런 차도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슈트를 갖춰 입고 있어서일까.
무언가 정형화된 틀에 갇힌 듯 딱딱하고 무겁다.
그래서 어색하냐고?
아니, 이건 이것대로 차도하에게 완벽하게 들어맞는 이미지였다.
특히 차도하 특유의 차가우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이 지금 모습과 잘 맞아떨어져 어제와는 또 다른 긴장감을 유발시켰다.
그렇다고 어제의 그와 완전히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뿜어져 나오는 나른한 색기는 그대로이니까.
질량도, 농도도 그대로.
그래서 이 남자 앞에서는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지 모르겠다.
이런 버거움이 조금은 불편했다.
‘그래, 불편한 거지.’
그에게 들러붙어 있던 시선을 간신히 떼어 낸 여은은 우동 한 가락을 입에 넣고 조용히 빨아들였다.
그때 차도하가 불쑥 말을 건넸다.
“맛없습니까?”
놀란 여은이 고개를 들었다.
밥을 같이 먹겠냐며 먼저 권할 때는 언제고, 차도하는 그 이후로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차를 함께 타고 식당에 도착하기까지.
우동이 식탁 위에 올라오고도 한참을.
그녀가 함께 왔다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그는 여은에게 무신경했다.
시선 한 번을 얽지 않았는데, 갑자기 말을 걸다니.
살짝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너무 당황했던 걸까.
그가 던진 질문이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죠?”
“입에 안 맞냐고요.”
귓바퀴가 홧홧해질 만큼 당혹감이 밀려왔다.
이런 간단한 질문을 놓치다니.
프로답지 못했다.
“아니요. 맛있습니다.”
빠르게 대답한 여은은 다시 우동을 빨아들였다.
사실 우동의 맛을 가늠할 정도의 여유가 여은에게는 없었다.
같이 밥을 먹자는 차도하의 말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고부터는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긴장을 바짝 조인 여은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서 부지런히 우동을 먹었다.
그렇게 그릇의 반이 비었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