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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나쁜 짓 잘하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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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나쁜 짓 잘하는 여자

결혼을 하라니.

[ST는 한주와 바이오 쪽으로 미래를 함께할 거다. 인우가 NFT를 위해 라온 소프트를 잡았듯 너는 ST를 맡도록 해.]

기가 막혀 웃음이 흘렀다.

[지금 이러시는 저의가 뭡니까?]

이쯤 되자 한량으로 찍히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미국에서 조용히 살던 그를 기어코 한주 그룹 안으로 끌어들이는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차 회장의 말대로 인우에게는 갚아야 할 빚이 있는데, 굳이 인우의 대항마로 여겨지는 그를 그룹에 들여야 할까.

[어차피 결혼은 해야 할 것 아니냐.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결혼은 그저 사업이야. 계약 하나 더 따내는 거란 말이다.]

유약한 성격의 인우를 도와 칼질하는 망나니가 되어 줄 마음은 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혼인 계약에 묶여 외롭게 살아가는 어머니를 구할 마음도 있고.

하지만 결혼은 다른 이야기이다.

그것도 ST라니.

[얼굴 예쁜 여자야 길에 널렸으니, 네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품을 수 있지. 하지만 ST는 아니야.]

[그런 말은 범생이인 형에게나 해당하는 거고요. 저는 다르지 않겠어요?]

그래서 한풀 더 삐딱하게 나간 거다.

결혼하지 않겠다는 뜻을 완곡하게 말한 거고.

[자고로 여자는 얼굴이죠.]

[예쁜 아이로 붙여 주마.]

그렇게 해서 나온 조건이었다.

[약혼하게 되면 어차피 드러난 관계는 모두 정리해야 해. 대신 눈이 시릴 정도로 예쁜 아이를 붙여서 네 그 요망한 망나니짓을 은밀히 이어 가게 해 주마.]

[정부를 둬라?]

그렇게 해서라도 결국 결혼을 강행시키겠다는 뜻이다.

기어코 그에게 인우의 대항마 역할을 맡기겠다는 것이고.

도대체 왜?

[하, 그럼 그래 보시든지요.]

차지섭 회장이 왜 갑자기 큰 손자를 견제하려 작은 손자를 장기판에 세우는지,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그래서 아주 어려운 조건을 붙인 건데.

[대신 눈이 뒤집힐 정도로 내 마음에 드는 여자로 구해 오세요. 그전에는 어림도 없으니까.]

그 조건을 이행하기 위해 차 회장 쪽에서 내세운 여자가 조금 세기는 했다.

계속해서 서여은, 그 여자가 눈에 밟히는 걸 보니.

-도하야.

수화기 너머 차 회장이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

그 사고가 있기 전에는 늘 이런 식으로 그를 부른 듯도 하다.

그의 아버지 차강이 오명을 남긴 채 죽기 전까지는.

“네 아비, 이젠 원래 자리로 돌려야지. 제사도 제대로 지내고.”

“갑자기요?”

웃겼다.

차 회장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대통령 되라고 물심양면 밀어줬는데 그 돈으로 첩질하다 죽었다며 호적에서 파 버린다고 하셨지 않나요?”

호적이라는 게 없어진 지 언제인데, 차 회장은 그런 식으로 제 차남을 한주에서 지워 냈다.

그래 놓고선 이제 와서 되돌려?

사고의 경위가 석연치 않다며 조사를 요구하는 그와 그의 엄마를 매정하게 내칠 때는 언제고.

“됐습니다.”

제사는 그의 어머니가 아주 정성껏 모시고 있고, 그의 아버지인 차강이 돌아올 자리는 이미 이곳에 없다.

“그리고 회장님이 붙여 준 여자.”

도하는 다시금 서여은을 떠올렸다.

그의 몇 마디에 하얀 얼굴을 붉게 물들이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귓바퀴까지 빨개지던 모습과 어쩔 줄 몰라 꼼지락거리던 가느다란 손가락도.

잘록한 허리와 펜슬 스커트 아래로 드러난 곧고 긴 다리도.

순간 단전 아래가 뻐근해진다.

여자를 짓이기고 싶다는 가학적 욕구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마음에 안 들어요.”

눈을 꾹 감았다 뜬 도하가 여자를 머릿속에서 지우며 말을 이었다.

“얼굴만 예쁘면 뭐 합니까? 색기 하나 없이 순하기만 하던데.”

-너 이 녀석, 색기라니 할아버지 앞에서…….

“전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예쁘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눈이 뒤집힐 정도로 마음에 들어야 한다고. 그러니 날 만족시키려면 나랑 수준 맞춰서 나쁜 짓 잘하는 여자로 데리고 오세요.”

제 할 말만 죄다 퍼부은 도하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짜증이 명치 끝을 묵직하게 눌렀다.

턱에 단단히 힘을 준 도하가 등받이에 몸을 더 깊게 묻으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웃기게도 유리창에 얌전하게 면발을 빨아들이던 도톰한 입술이 그려졌다.

겁먹은 듯 보였지만 당돌하게 그를 담아내던 밤색 눈동자도.

“하, 젠장.”

차 안에는 정적이 흐를 뿐이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번잡스러웠다.

* * *

“이 녀석이.”

차 회장이 언짢은 듯 미간을 좁히며 손에 들고 있는 휴대전화를 쳐다보았다.

도하가 제멋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건방진 놈.”

불퉁한 목소리를 내뱉으면서도 입꼬리에는 흡족한 미소가 걸린다.

“왜요, 회장님? 도하가 전화를 끊었어요?”

그런 그를 세밀하게 관찰하며 차현이 물었다.

“버릇없게, 끊는다는 말도 없이 끊어 버리는구먼.”

툴툴거리는 말투였지만 목소리는 만족스러움을 숨길 수 없다.

“감히 한주 그룹 안에서…….”

아니 어쩌면 그룹 밖에서도.

“이 차지섭에게 이따위로 행동하는 놈은 이 녀석이 유일할 거야.”

건방지다 못해 불경스럽기까지 한 도하가 못마땅하면서도 꽤 마음에 들었다.

그만큼 자신감이 넘친다는 거니까.

그런 차 회장의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차현이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런 점이 마음에 드시는 거잖아요. 감히 회장님 앞에서 겁을 먹지 않아서.”

“그렇지.”

소파에 앉아 있던 차 회장이 벌떡 일어나 서재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그 뒤를 차현이 따랐다.

“도하 말로는…….”

차현의 도움을 받으며 의자에 앉은 차 회장이 말을 이었다.

“그 아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구나. 색기 하나 없이…… 순하기만 해서 말이다. 저랑 맞춰 나쁜 짓을 해 줄 것 같지 않대.”

그러자 차현이 픽, 웃음을 흘렸다.

“그 말을 믿으세요?”

다소 건방진 미소이기는 했다.

그만큼 제 말에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도하 취향으로 범벅인 아이예요.”

차 회장 앞에서 겁을 먹지 않는 건 차현도 마찬가지였다.

“색기가 없다니. 그거야 도하 하기 나름이죠.”

이런 걸 보면 도하는 제 아버지보다 고모인 차현을 닮았다.

물론 차현이 이무기라면 도하는 용에 해당하겠지만.

“너는 정말.”

가끔은 차현이 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때도 있다.

“내 딸이지만 어쩜 그렇게…….”

“왜 이러세요. 아버지 자식 중에 아버지 제일 많이 닮은 게 저인데.”

그러니 하는 말이다.

차현이 맏이로,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한주 그룹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차 회장의 잿빛 눈동자가 차현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차 회장을 마주 보며 차현이 날카롭게 웃었다.

“그리고 마음에 안 드는 아이를 도하가 굳이…….”

차현이 차 회장 앞에 제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밥을 먹였겠어요?”

손가락으로 화면을 건드린 차현이 사진 한 장을 차 회장에게 보였다.

사진 속에는 한 여자를 데리고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도하의 옆모습이 찍혀 있었다.

무심한 듯 보이지만 도하의 시선은 분명 여자를 향하고 있었다.

“두고 보세요. 도하는 이 아이를 가지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아버지 손에 들어올 테니까.”

차현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 * *

페르소나의 루프탑 휴게실에 시끄러운 클럽 음악이 쩌렁쩌렁 울렸다.

페르소나의 대표 윤지수는 기분이 우울할 때면 루프탑 휴게실에 이웃들을 초대해 춤과 술을 즐기곤 하는데,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우울감이 치고 올라와 영혼까지 삼키려 드는 날.

물론 오늘의 주인공은 지수가 아니었다.

여은이었지.

오늘 낮, 을지로 우동 집을 나선 여은은 페르소나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포털 사이트에 ‘김해리 스캔들’을 검색하고는 망연자실했다.

아이돌 가수 출신으로 국민 첫사랑, 또는 국민 여신으로 불리는 김해리.

그녀는 현존하는 대한민국 태생의 여자 중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꼽히는 이다.

그런 그녀가 5개월 전 스캔들을 터트렸다.

재벌 3세와 비밀리에 밀월여행을 떠난 것이 파파라치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한 고급 호텔의 프라이빗 풀빌라에서 상대 남자와 진한 애정행각을 벌이는 사진 역시 고스란히 유출되었다.

물론 당시에는 사진으로 상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얼마 뒤 그 상대가 한주 그룹 차도하 본부장인 것으로 밝혀졌고, 양측 모두 입을 닫음으로 암묵적으로 스캔들을 인정했다.

그런 남자에게, 국민 여신을 품은 남자에게 미인계를 쓰려고 했다니.

“미쳤지.”

정말이지 미친 거다.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 낸 여은이 캔맥주를 마저 비웠다.

자괴감에 젖다 못해 이젠 아예 하나가 될 참이다.

“서여은. 괜찮아.”

그런 그녀를 지수가 위로했다.

평소 같았으면 조용히 위로를 받아들였을 텐데, 술이 과했기 때문일까. 여은의 입에서 쓸데없는 소리가 줄줄 흘러나왔다.

“하나도 안 괜찮아요. 영업에 미인계를 쓰려고 한 것도 창피해 죽겠는데, 수준에도 못 미치면서 차도하를…….”

감히 어떻게 해 보려 했다니.

“아침부터 차도하 만날 거라고…… 내가 옷을 열 번도 더 갈아입은 거 알아요?”

지수도 그 점은 좀 놀라웠다.

9년을 알고 지냈지만 여은에게는 좀처럼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대가 차도하이니,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아무리 망나니라도 그 얼굴이면 못 참지.

“야. 지나가는 대한민국 여자들 다 붙들고 물어봐. 차도하 만나러 가면 다 그러지. 나 같으면 옷이 뭐니? 아침부터 목욕 재개하고 속옷도 되게 야한 거 입고, 그렇게 갔을 거야.”

그게 본능인 거다.

그 순간이다.

막 루프탑 휴게실로 들어선 이가 지수에게 한마디 했다.

“윤지수 대표는 좀 참아 줘. 여은 씨면 몰라도.”

차현이었다.

까맣게 반들반들 빛나는 눈동자가 눈에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여은을 조용히 담아냈다.

“우리 여은 씨가 좀 그래야 하는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