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학 첫날
전학 첫날
“에휴.”교실에 나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책상 위로 이마를 처박았다.한숨부터 흘러나왔다.어쩌다 이지경이 된 걸까.전학 온 첫날부터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너무 이른 것 같긴 한데….하나가 꼬이기 시작하니,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 하나하나가 전부 잘못된 선택처럼 느껴졌다.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전근.미리 준비할 틈 하나 없이 결정된 일이라 무슨 도피라도 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짐을 싸서 이곳으로 와야 했다.내가 어렸을 때부터 살던 동네에 제대로 된 인사도 못하고 오게 됐지만…… 이건 그렇다 치고.배정된 학교가 좀 이상했다.어차피 뺑뺑이로 배정되는 학교인데 다를게 뭐냐 싶지만, 정문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느꼈다.뭔가 싸했다.문 앞에서부터 웅장함이 느껴지는 정문.커다란 석재 기둥 사이로 학교 이름이 박힌 현판이 걸려 있었고, 그 너머로는 잘 정돈된 가로수길이 본관까지 길게 이어졌다.건물들도 어디 사립 명문대 건물 같았고, 운동장도 웬만한 체육고 운동장보다 넓어 보였다.……나는 왜 그때서야 이 학교에 대해 알아볼 생각을 떠올린 걸까.뒤늦게 검색해 보니 엄청 유명한 학교였다.지역에서는 명문으로 꼽히고, 매년 진학 실적도 상당히 좋은 편.학교 이름으로 검색하니 교육 관련 기사가 몇 개씩 튀어나왔다.아무리 멀어도 이 정도면 알만 하지 않나 싶은데, 처음 들어본다.이 지역 자체가 부촌이라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우리 처지에 여기를?’진지하게 의심할 정도였다.아버지는 사실 전근이 아니라 로또에 당첨된 게 아닐까…….그리고 또 하나.‘애초에 난 이걸 왜 이제야 찾아본 거지?’마치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물론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과 내가 몇 년 살았던 고향을 떠난다니 거기에 매몰된 건 맞지만.어쨌든, 1학년 1학기가 다 끝나고, 2학기 중간에 뜬금없이 굴러들어 온 전학생.첫날, 담임에게 이끌려 교실 앞으로 나가 어색하게 자기소개를 하고, 호기심 많은 몇몇 친구들이 내 곁으로 다가와 이것저것 묻는 시간도 끝이 났다.점심을 먹은 뒤에는 학교 구경이나 해볼 겸 혼자 교정을 돌아다녀 봤고, 그 결과.익숙해지기는커녕 돌아다니면 돌아다닐수록 오히려 벽만 더 느꼈다.여긴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뭐라고 표현해야 하지.영압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입 밖으로 내뱉으면 경멸을 금치 못하는 시선을 마주하겠으나…… 안타깝게도 내 비루한 어휘력으로는 그렇게밖에 표현을 못 하겠다.진짜 달랐다.‘여긴 무슨 애들 평균 외모가…….’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복도를 걷다 보면 괜히 한 번씩 고개가 돌아갈 정도의 외모.모두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지만, 몇몇 지나가다 보면 흠칫하게 되는 인물들이 꽤 있었다.내가 어디 유명한 예고에 잘못 왔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그래도 뭐 어쩌겠나. 이미 전학을 와버린 것을.잠시 주눅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학교 생활 끝났다고 우울해할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그리고 그때 마침 누군가 교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책상에 엎드려 있던 고개를 들자, 안경을 쓴 마른 체형의 남학생이 놀란 눈을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어? 너 동아리…… 배정 안 됐어?”“동아리?”전학 온 뒤로 동아리라는 단어를 방금 그의 입에서 처음 듣는다.“아. 쌤이 말씀 안 해주셨나 보네.”그는 아까 쉬는 시간에 나한테 이것저것 물어보던 남자애들 중 하나.이름이…… 안정훈이라고 했나.“원래 점심 먹고 바로 동아리 시간이거든. 오늘은 수업 대신 다 동아리 가는 날이라.”“아….”그래서 수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아무도 없던 거구나.근데 나는 따로 동아리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전학생은 서러워서 살겠나…….아니, 애초에 왜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해주셨지.“담임쌤이 까먹으셨나 본데. 일단 교무실 가보는 게 낫겠다.”그렇게 말해주길래 자리에서 일어났다.안정훈은 원래 교실에 뭔가 가지러 온 모양이었다. 자기 자리로 가더니 책상 서랍을 뒤적여 얇은 노트 한 권을 챙기고는 나와 함께 교실에서 나왔다.“나도 가는 길에 교무실 쪽 지나가니까 같이 가자.”“어. 고맙다.”전학 첫날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있던 입장에서는 반가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안정훈과 나란히 복도를 걸어 모퉁이를 하나 돌았을 때였다.반대편 복도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는데, 본능적으로 눈길이 빼앗겼다.어깨 아래까지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짙은 갈색 머리카락.반듯하게 펴진 허리와 길게 뻗은 다리.그냥…… 정말 잘 나가는 모델이 교복을 입은 것 같은 여자.
……내가 괜히 영압이니 뭐니 한 게 아니라니까 진짜.그녀는 우리 쪽에는 별 관심도 없는 듯 그대로 스쳐 지나갔고,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너무 대놓고 봤나.이렇게 본능에 사로잡힌 것처럼 자연스럽게 눈길이 뺏기고 난 뒤에는 현타가 올 수밖에 없다.심지어 옆에 다른 애도 있는데.괜히 민망해져서 아무 말이나 꺼냈다.“난 진짜 처음에 내가 예고에 잘못 전학 온 줄 알았어.”“응?”안정훈이 잠깐 나를 보다가, 곧 뒤쪽을 힐끗 돌아봤다.“아. 방금 지나간 한세희 선배 때문에?”한세희?명찰을 정확히는 못 봐서 이름까진 모르겠지만, 지금 지목해서 말할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었다.“저 선배는 애초에 여기서 엄청 유명한데 뭘.”“아… 그런 거야?”“학생회장이니까.”안정훈이 피식 웃으며 자기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그리고 예고 같다는 생각이 들면 날 봐봐. 이 얼굴 보고도 그런 생각 들어?”정훈이는 전형적인 모범생 상이긴 했지만, 그걸 맞다고 맞장구치기에는 우리가 아직 그 정도 사이는 아니었다.어색하게 웃을 수밖에.“어, 어… 설득력은 있네.”“쓰읍… 왠지 그게 더 기분 나쁜데.”“아, 미안하다…….”“장난이야.”술술 말하는 걸 보니 생각보다 성격이 편한 녀석이었다.그렇게 복도를 걷다 보니 금세 교무실 앞에 도착했다.안정훈과 헤어지고, 안으로 들어가서 담임 선생님한테 사정을 설명하니 미처 생각 못했다고 미안하다고 하셨다.지금 당장은 동아리 배정을 바로 할 수 없어서 오늘은 그냥 쉬라고 했다.그래서 나는 남은 시간 동안 지루하게 교무실 옆에 있는 휴게실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학교는 끝이 났다.3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서 책만 읽는 것도 고역이었기에 종이 치자 진이 다 빠졌다.진짜 첫날부터 무슨 이런 억까가 다 있나….*길고도 이상했던 전학 첫날은 그렇게 싱겁게 끝나버렸다.학교를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로또에 당첨된 게 아닐까, 라는 의심이 절로 쏙 들어갈 정도로 작은 집.방이라고 해봐야 내 방과 아버지 방이 전부인 오래된 빌라.나는 힘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그래도 푹신한 매트리스가 날 받아줬다.나름 심신이 안정되는 기분에 오늘 있었던 일이 하나둘 머리를 스쳤다.……아무리 첫날이라지만 친구를 만들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그나마 정훈이와 몇 번 대화를 나눠본 게 끝.내일부터는 나도 노력해야지 뭐….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한동안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그러다 슬슬 배가 고파질 무렵에야 몸을 일으켰다.아버지는 원래 퇴근이 늦었다.그래서 내가 먼저 밥을 먹거나,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에 대충 차려놓는 것도 이제는 익숙한 일.오늘은 아예 저녁까지 먹고 들어온다고 했으니 내 것만 준비하면 됐다.밥을 퍼고, 냉장고에서 반찬 몇 개를 꺼내 깨작깨작 끼니를 해결하고 있을 무렵.시야 한구석에서 이상한 게 깜빡거렸다.눈에 뭔가 잘못 들어간 줄 알고 몇 번 깜빡였지만 그대로.고개까지 세게 흔들어봤지만 소용없었다.작은 빛은 내 시야 한쪽에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똑같은 자리를 고집했다.……오늘 진짜 이상한 일 많이 일어난다.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가락을 들어 그 빛이 보이는 허공을 눌러봤다.화악.“허업.”순간 시야가 번쩍이며 반투명한 무언가가 눈앞을 가득 채웠다.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뭐야?”컴퓨터 모니터에 띄워놓는 인터넷 창처럼 생긴 반투명한 화면이 허공에 떠 있다.…상태창?절로 그 단어가 먼저 떠올랐는데, 막상 내용을 읽어본 순간 그런 생각은 곧장 사라졌다.가장 위에 큼지막하게 적혀 있는 글씨.[해성고등학교 연애 갤러리]해성고등학교.오늘부터 내가 다니게 된 학교 이름이라 반가운…… 게 아니라.‘연애…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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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숟가락까지 내려놓은 채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다.그 아래로 익명 게시판처럼 빼곡하게 나열되어 있는 글들에 시선이 빼앗겼다.[세희는 진짜 연예인 해도 잘할 텐데 ㅜㅜ][세희랑 하준이랑 체육 시간에 눈 마주친 거 본 사람?][22기 졸업생 정현민 조공 현황 정리][오늘 2학년 복도 이벤트 봤냐ㅋㅋ][하준은 오늘도 미쳤네][이번 시리즈는 왜 이렇게 조용함?]……뭘까 이게.학교 커뮤니티?익명으로 학생들이 쓰는 커뮤니티 같은 게 초능력처럼 보이기라도 하는 걸까?하지만 그건 당장 휴대폰으로 어플만 다운 받아도 볼 수 있는 거다.나는 반신반의하며 주르륵 떠올라 있는 글을 몇 개 훑었다.[세희는 진짜 연예인해도 잘할 텐데 ㅜㅜ]라는 제목의 글.‘세희라면…… 한세희?’오늘 복도에서 넋 놓고 바라봤던 그 학생회장이라는 사람.얼마나 인상 깊었으면 한번 들은 이름인데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세희는 진짜 연예인해도 잘할 텐데 ㅜㅜ]: 진짜 찰떡인데 왜 안 하지- 얼굴 저렇게 썩히는 게 아깝긴 하지- 본인이 싫다잖아 ㅋㅋ 꿈이 사업이라던데 ㄴ 그게 매력 포인트인 건데 뭘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안타깝네- 이번 시리즈 비주얼 원탑은 맞지 ㄴ 원탑은 좀 ㄴ 그럼 누가 있음 ㄴ 나현이도 있고, 주예린도 외모로는 안 꿀리지 ㄴ 주예린은 ㅋㅋㅋ 양아치 멘헤라를 어따 비빔 ㄴ 외모는 비빌만 한데 ㄴ ㄹㅇ 주예린 왜 이렇게 내려치지 ㄴ 걍 멘헤라픽은 극성이라 답도 없음 상대하지 마셈[세희랑 하준이랑 체육 시간에 눈 마주친 거 본 사람?]: ㅁㅊ 그냥 둘이 쳐다만 봐도 개설렘- 사실상 이번 시리즈 둘이 주인공인 건 확정이지- 둘 이벤트는 언제 뜰까? ㄴ 사실 이벤트는 많이 있었지 ㄴ 엥? 그랬나? ㄴ 둘이 은근 안 맞는데 저거 미는 애들만 흐린 눈 하는 중 ㄴ 쉿 이 갤에서 절대 그런 말을 해선 안돼마치 연애 프로그램이라도 보면서 실시간으로 떠드는 듯한 글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심지어 몇몇 글들에는 학교 생활을 가까이서 찍은 것처럼 사진이 박힌 것도 있었다.[농구부장 서하준 오늘 동아리 활동]사진 속에는 체육관에서 농구를 하고 있는 잘생긴 남학생이 있었다.……무슨 도촬이라도 당한 것 같다.내가 당한 건 아니지만.나는 찜찜한 기분으로 화면을 조금 더 내려봤다.그러다가 왠지 눈에 밟히는 글 하나를 발견했다.[1학년 메기 이벤트 떴냐?]: 1학년 2학기 전학은 진짜 메기 이벤트 아닌가?- ㄴㄴ 지나가라- 흔남- 몇 반인데? ㄴ 3반인데 기대 ㄴㄴ- 이번엔 메기 이벤트 없는 시리즈인 거 같은데1학년 2학기에 전학 온…… 거기다 3반이면…….‘나잖아.’흔남이라 기대하지 말라는 것까지 빼박 나다.졸지에 정체불명의 타인한테 외모 품평을 당하게 돼서 기분이 묘하긴 한데, 반박할 수 없다.나는 그 글에서 나와 다른 궁금했던 글도 들어가봤다.제목부터 묘했던 글.[22기 졸업생 정현민 조공 현황 정리]: 현민이 졸업한 지도 벌써 3년이라 정리 한번 함누락이나 틀린 거 있으면 댓글 ㄱ수능 컨디션 보정→ 이건 워낙 합격권이라 개입 거의 안 들어감..입학 직후 동아리 홍보 영상 게시물 업계 관계자 피드 노출→ 길거리 캐스팅 개입했는데 이건 거절해서 결과적으로 개입 실패 ㅠㅠ동아리 홍보 영상 외부 커뮤니티 유입고등학교 때 찍었던 오디션 영상 재업로드→ 조회수야 뭐 현민이 얼굴이면 원래 뜰 거였음첫 미팅 취소 방지→ 미리 거절 못하게 일정 꼬아놓은 거→ 인과율은 별로 안 올랐는데 효과 제일 좋았던 거 → 최종 합격은 본인 실력 ㅎㅎ포기한 꿈 다시 붙잡게 만드는 데 3년 걸렸네.진짜 길었다…….다들 고생했엉 ㅠㅠ- 솔직히 더 빨리 끝낼 수 있었는데 중간에 억까 너무 심했음 ㄴ 억까는 아니야 요즘 현민이 너무 잘 풀려서 개입 제한 걸린 거잖아 ㄴ 인과율 너무 높아지긴 했지- 그래도 결국 자기가 선택해서 돌아간 게 제일 좋았음 ㄴ ㄹㅇ 조공은 등 떠미는 정도가 딱 좋아서 ㄴ 떠민 수준이 아닌 게 몇 개 보이는데요- 이제 사실상 끝이지? ㄴ 더 건드리면 인과율 감당 안 되니까 ㄴ 이제 알아서 잘 살겠지“……이게 뭔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