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게 만들고 싶다
미치게 만들고 싶다
얼굴이 가깝다.아까 친구들이랑 인사할 때는 세상 그렇게 해맑은 얼굴이 없었는데, 나를 보는 표정은 고양이가 경계하며 쳐다보는 것 같았다.“희망서에 우리 동아리 썼다는데…… 아니야?”담임 선생님께 희망서를 제출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다.벌써 직접 찾아오기까지 하는 걸 보면 동아리에 보통 관심이 많은 게 아닌 것 같다.“이상현상 연구 동아리…… 말하는 거면 맞아.”고양이가 노려보는 듯한 표정은 어디 가고 순식간에 사르르 풀어진 얼굴.“아, 맞구나.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 그냥 신기해서 보려고 온 거니까.”“…신기해서?”“앗… 우리 동아리 사람이 별로 없어서 새로 들어온다니까 신기하다는 뜻이야. 이상한 뜻으로 말한 건 아니고. 아무튼! 부담 가질 필요 없어. 그냥 편하게 들어오면 돼.”얼마나 사람이 없길래 저런 애도 저렇게 적극적으로 구는 걸까.“번호 좀 줄래?”“…응.”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꺼냈다.백나현이 번호를 받아가는 잠깐 사이에 나는 생각에 잠겼다.그러고 보니 그걸 생각해봐야 한다.백나현은 알고 있을까? 이 학교에서 일어나는 비현실적인 일들 말이다.애초에 그것 때문에 동아리를 가려고 했던 거니까.그때, 백나현이 저장을 끝냈는지 고개를 들고 물었다.“근데… 하나만 물어봐도 돼?”“응. 어떤 거?”“어떤 쪽에 관심이 있어서 우리 동아리에 들어오려고 한 거야? 혹시 크립티드 같은 거 좋아해? 아니면 백룸이나 SCP 쪽?”“….”……아닌가?잠깐 기대했던 마음이 다시 가라앉았다.그녀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평범한 오컬트 계열 동아리로 보였다.하긴…….학교에서 운영하는 동아리가 무슨 초자연적 비밀 조직이라도 되겠는가.그랬다면 이미 해연갤에서 관련된 이야기가 한두 번쯤은 나왔겠지.‘뭐,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들어가겠다고 한 건 나니까.’원래라면 점심시간에 갤러리부터 뒤져봤어야 했지만, 하필 그때 USB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무산됐다.근데 크립티드가 뭐지? 백룸이랑 SCP는 들어본 적이 있긴 한데, 둘 다 제대로 아는 건 아니었다.“….”내가 무슨 말을 할지 주시하고 있는 백나현을 보고 있으면 압박이 느껴졌다.반드시 그런 쪽에 관심이 있어야 할 것 같은 압박 말이다.“도… 시괴담…… 그런 쪽 좋아해.”가까스로 대답했다.애초에 내가 겪고 있는 일부터가 도시괴담 그 자체나 다름없으니까 관심 있는 건 사실이었다. “정말?”백나현의 눈이 다시 반짝였다.금방이라도 뭔가를 더 물어볼 기세였지만…….“백나현 또 이상한 소리 한다.”옆에서 웃음 섞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나한텐 어쩌면 구원의 목소리.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백나현과 인사를 주고받던 우리 반 여자애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키득거리고 있었다.아무래도 꽤 친한 사이인 모양이었다.“전학생 당황한 것좀 봐.”“나현이 취향 맞춰주기 힘들긴 하지.”백나현이 발끈해서 곧장 고개를 홱 돌렸다.“뭔 소리야. 좋아하는 게 있다는데. 좀 모르면 말 섞지 마.”“아, 예예. 그러시겠죠. 근데 과연 진짜 좋아하는 걸까?”“헉헉…… 그 얘기를 꺼내버리면….”……친한 친구들한텐 당하는 포지션인가?“나현아 네가 좋다면 다 좋다 하는데 그럼 좀 의심을 해봐야지.”“그게 맞지.”“맞긴 뭐가 맞아.”그녀의 친구들은 내가 일부러 비위를 맞춰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그런 거 아니지? 남규야.”벌써부터 자연스럽게 내 이름을 부르는 친화력에 놀랐지만 그건 둘째 치고.도와달라는 듯한 애절한 눈망울에 차마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진짜 관심 있어. 비현실적인… 평범한 상식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그런 거.”“맞지? 그런 거 좋아하는 거잖아.”내가 동의하자, 꼭 굶주린 고양이가 먹이를 발견하기라도 한 듯 백나현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그리고 곧 기세등등하게 말했다.“알못들 말 무시해. 상대하지 마.”상대는 혼자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아무튼.“와…….”“남규도 독하네.”“저렇게까지 맞춰준다고?”“남자들이란….”아니, 진짜 관심 있다니까.정확히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어쨌든 잘됐다. 우리 동아리 들어오면 재밌을 거야. 아직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백나현은 그런 얘기를 줄줄 내뱉다가 정말 선생님이 오실 시간이 다 되어서야 몸을 돌렸다.……정말 이런 쪽을 좋아하긴 하나 보다.“아 그럼 가봐야겠다. 동아리 톡방! 이따 초대할 테니까 확인해. 그리고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고.”그녀는 마지막까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그리고 친구들의 놀림을 뒤로한 채 종종걸음으로 교실을 빠져나갔다.……말 몇 마디 안 했는데 벌써 친한 친구라도 된 것 같다.그때, 누군가 옆에서 툭 쳤다.고개를 돌리니 내 짝꿍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정신 차려.”“내가 왜?”“지금 네 얼굴을 봐.”“나?”손바닥을 가져다대니 엄청 열이 올라 있다.
d3kza0VLSVdxajZ6L09aWC8xUnR2R1d6dkhOemE5aXZyNDljeFBldHdyZ2lQaXZJeWtrQlRWNXJpd2t2c2hoMg
왜 백나현의 친구들이 그렇게 몰아가는지 이해했다.그래도 변명을 해보자면…… 누구라도 그렇게 되지 않나.솔직히 백나현처럼 예쁜 여자애가 처음 만난 사람한테 그렇게 거리낌 없이 다가와서 웃어주고, 친근하게 대해주는데 아무렇지도 않을 남학생이 얼마나 되겠어.애초에 나는 저런 사람에게 약한 편이었다. 무해하고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사람.저런 식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면 괜히 나까지 마음이 느슨해진단 말이지.이런 성격에는 아버지의 가르침도 한몫했다.친절한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대하고, 악독한 사람에게는 악독하게 대해라.어렸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말이었다.한세희 선배를 딱딱하게 대한 건…… 상황이 어쩔 수 없었지만.*집으로 돌아왔다.그래도 어제에 비하면 꽤 생산적인 하루를 보낸 것 같았다.그래서인가?[남규 얘는 동아리에서 나현이랑도 엮이는데?][진짜 메기면 얘기가 달라지는데요]습관처럼 해연갤을 열어본 나는, 나에 대한 얘기가 개념글에 도배된 걸 보고 흠칫 굳었다.[남규가 메기라는 애들은 진심임?][념글 도배된 것만 봐도 메기 맞는데 억까 뭐지?][여태 전학생이 전부 메기였냐?][메기면 최소 하준이한테는 비벼야지][연애갤에서 드디어 연애 떡밥이 굴러가는데 뭐가 문제임ㅋㅋ][이제 1학년한테 서사 타령은 걍 거르면 됨][외모 억까 다 거르고 순수 서사가 부족하긴 함][알고 동아리 들어간 것도 아니고 순수 우연? 이건 흠..]...보니까 한참 전부터 내 얘기였잖아?점심시간에 그 사건 이후로 줄곧 나에 대한 얘기가 이어져왔던 것 같다.그 뒤로 백나현과 접점이 생기면서 불이 붙은 거고.아예 무시당하고 언급조차 안될 땐 몰랐지만 이렇게 주목받는 것도…….‘마냥 좋은 건 아니구나.’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내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멋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정작 당사자인 나는 별생각 없이 한 행동들도 평가의 대상이 된다는 게 영 찝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남규 얘 그건 좀 좋네]세희가 직접 고맙다고 찾아왔는데도 딱 선 긋고괜히 들러붙거나 친한 척 안 하는 거 좋음낄끼빠빠 잘하네앞으로도 그렇게만 하자 ㅇㅇ- 아 이건 육수 냄새 나서 좀 역하네- 먼 낄끼빠빠? 너나 하셈 ㅋㅋ- 그냥 학생회장 선배니까 어려워하는 거 가지고 망상은 시발 ㅋㅋㅋ ㄴ 근데 나현이가 다가올 때는 세상 스윗하던데 ㄴ 이상형이 나현이 쪽이라 그런 거 아님? ㄴ 뭘 아네 ㅇㅇ ㄴ 세희한테 철벽치고 나현이한테 헤벌레 한다고? 말이 되나 ㄴ 말이 왜 안댐 ㄴ 이 댓글 ㅈㄴ 웃기네 ㅋㅋㅋㅋ 진짜 말이 안 되지? ㄴ 취향 문제가 아닌데 이걸ㅋㅋㅋ ㄴ 취향 ㅇㅈㄹ하네와…… 이거 댓글 뭐야.이 밑으로도 댓글이 쭉 늘어나 있었다. 엄청 싸우고 있다. ㄴ 소문 듣고 왔어요 ㄴ 아… 여태 서로 불붙을까 봐 대놓고 안하던 갈드컵을 남규가 만드나요 ㄴ 그렇게 보니까 갑자기 웃기네ㅋㅋㅋㅋ ㄴ 여태 갤 창 날 거 아니까 그랬는데 갑자기 전학 온 애 때문에 그러면 ㅋㅋㅋ ㄴ 남규 한 거 ㅈ도 없는데 벌써 이 지경이면 메기 맞다 ㅇㅇ……어지럽다, 어지러워.일단 너무 후끈후끈해서 갤러리를 껐다.“……밥이나 먹자.”오늘도 아버지는 야근.저녁은 평소처럼 혼자 차려 먹었다.대충 밥을 데우고 반찬을 꺼내 식탁에 올렸다.그리고 자리에 앉아 한 숟갈 뜨는 순간, 식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웅웅 울렸다.고향 친구들한테 연락이라도 왔나 싶어서 살폈는데, 예상과 달리 새로운 단톡방에 초대되어 있었다.맞다, 백나현이 동아리 단톡방에 초대해 준다고 했지.[이상현상 연구부(9)]나까지 포함해서 9명이면…… 그다지 인기 많은 동아리는 아닌 걸 알겠다.백나현 [오늘 말했던 신입 부원 ㅎㅎ]백나현 [다들 환영해줘!!]남유찬 [와 신입이다]남유찬 [2학기에 신입을 받을 줄이야]문의준 [환영합니다 ㅋㅋ]최서하 [반가워요!]누가 누군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일단 반겨주는 사람들에게 인사부터 건넸다.그 뒤로 평범하게 환영하는 분위기에 적당히 맞장구치는 와중.백나현 [아 맞다] 백나현 [남규 여기 지역도 처음이래] 백나현 [전학 오기 전에는 아예 다른 데 살았대]남유찬 [오 진짜?] 문의준 [그럼 이 동네 하나도 모르겠네ㅋㅋ] 최서하 [학교 주변에도 뭐 많은데]최서하 [나현이가 구경시켜 줘 그럼ㅋㅋㅋ]백나현 [그럴까?]백나현 [나 지금 마침 학교 주변에 있는데]백나현 [남규야 구경시켜 줄까?]백나현 [원하면 말해 ㅎㅎ]문의준 [ㅋㅋㅋㅋㅋㅋㅋ] 남유찬 [야 그렇게 말하면 부담스러워서 어떻게 말하냐]문의준 [안 나올 줄 아니까 하는 말인 거 너무 티 난다]문의준 [영악하다 영악해]백나현 [ㅡㅡ]톡방 분위기를 봐도 알겠지만 그냥 하는 말이겠지.하지만 나는 문득 다른 생각에 닿았다.톡방이 아니라…… 뜬금없지만 해연갤에 관한 거다.분명 그 녀석들은 방과 후에 벌어지는 일은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했다.실제로 그 때문에 불평하는 글도 여러 번 봤다.거기서 서사가 진행되면 그들에겐 그만큼 답답한 것도 없으니까.그리고 지금은 방과 후.심지어 한창 나와 백나현, 한세희를 두고 갤이 뜨거워졌을 때다.이보다 더 좋은 타이밍이 있을까?나는 홀린 것처럼 휴대폰을 두드렸다.김남규 [그럼 지금 볼 수 있어?]그래, 난 그들을 미치게 만들고 싶었다.메기가 맞네 아니네. 외모가 어떻네. 하루 종일 사람을 멋대로 평가해 놓고, 자기들끼리 신나게 싸워대던 녀석들.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냐고?당연하다.내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생판 모르는 녀석들이 하루 종일 나를 품평하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겠나.그런 생각에 톡을 보낸 건데, 돌아오는 답이 없다.아니, 아예 톡방 대화가 툭 끊겼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