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관 동의와 난이도 선택은 신중히
약관 동의와 난이도 선택은 신중히
그래서, 내가 어디 있느냐 하면. 그냥 협회 근처의 국밥집에 왔다. ‘세라도 있고 세라 카드도 있으니까 좀 비싼 걸 먹으려는 생각도 했지만…’ 배가 너무 고팠다. 어차피 탑 입구가 협회 지부 바로 옆에 있는 것도 있고. “넌 안 먹어?” “…난 먹고 왔어.” 이세라가 게걸스럽게 국밥에 수육까지 시켜서 먹고 있는 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심지어 소주까지. 이세라. 소중한 내 지갑…아니 훈련소 동기. 나는 헌터로서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녀석은 A급 헌터가 되어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럼 동기 좋다는 게 뭐야. 밥이나 얻어먹는 거다. “푸헤...좋구만.” 뚝배기와 그릇을 전부 비우고 고개를 들어 세라를 보았다. 그녀가 싱긋 웃었다. “통과했더라?” “응.” “능력이 생긴 거야?” “아무래도.” “…나한테도 설명 안 해줄 거야?” 다른 세계로 가서 알록달록 머리만 보다 그녀의 얼굴을 보니 내심 반가웠다. 나는 그녀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올려 묶었지만 숱이 많지는 않은 가는 포니테일에, 딱 눈까지 오는 앞머리가 귀엽다. 목에는 나비넥타이가 달린 초커, 아래는 루즈한 핏의 셔츠와 짧은 멜빵 스커트에 가터벨트, 하얀 스타킹. 덤으로 내가 가지지 못한 빵빵한 몸매와 완벽한 비율이 자리잡혀 있다. 지금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눈길을 받는 유명한 헌터지만,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돌아볼 이유는 충분했다. 이왕 여자가 될 거면 저런 몸매를 가져보고 싶었는데. 특징적인 검은 눈동자가 나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빠르게 내게 설명을 내놓아 보라는 듯. ‘니가 무슨 바가지 긁는 여편네냐….’ 근데 쟤랑 결혼하면 용돈은 많이 주겠지? 미래의 남편이 부럽다. “설명하려면 길어.” “길게 설명해줘. 그럼.” “그냥 짧게 설명할래.” 나는 대충 설명했다. 너무 두서 없는 설명인가 했는데, 이세라는 대충 이해한 듯했다. “…게이트?” “그래. 너도 가 볼래? 난 그냥 받아주던데.” “네 말대로라면 나는 불합격일 것 같은데. 마법학교라며? 재능 있는 사람만 받아주는 거 아냐?” “감각이 없긴 해.” 이세라가 A급 헌터긴 하지만, 마나에 관한 것은 내 도움을 받았었다. 문득 카르나로프나 이사벨 같은 인간이 이 세계에 오면 어느 정도일지 궁금해졌다. 그들의 몸속 마나는 이세라의 것보다 훨씬 농밀하고 짙었으니까. 적어도 A급은 확정 아닐까? “위험하진 않아?” “전혀.”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그 카르나로프마저 적대감을 표출하지 않았다. 정말로 내가 그 학교의 학생이 된 느낌이었다. 아리스까지 가서는 그냥 무해함 그 자체. “그냥 여기서 탑 오르는 건?” 그것도 생각은 해 봤다. 하지만… “나는 마법이 더 좋아.” 이사벨과 카르나로프에게 마법을 배우고 이해했을 때. 등을 타고 올랐던 그 짜릿한 감정.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이해하는 재미. “기초공격마법만 하더라도 아직 숙련도가 부족한데 이 정도야. 근데 다른 건 어떻겠어?” 보통 한 사람당 한 개만 가지는 능력. 그걸 몇 개고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근데 내가 거기선 천민이라 문제지.” “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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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있어.” 더러운 귀족놈들. 그것만 아니었으면 진짜 다닐 만 한데. 그래도 이번에 들어갈 때 짐 좀 많이 챙겨가야지. 그 전에. “탑부터 들어갈래.” “바로?” “오래 끌어서 좋을 거 없으니까.” 징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받으면 안 좋은 건 안다. *** 우린 탑의 입구에 와 있었다. 탑의 입구는 내가 레인하트로 넘어갈 때 썼던 옹이구멍의 그것과 비슷했다. 표면이 불길하게 일렁였다. 그리고 우수현도 똥 씹은 표정으로 같이 끌려왔다. 안내역이다. 이제 오늘은 날 안 봐도 된다고 기뻐했나본데, 그럴 일 없다. “아니, 안내만 할 거면 여기 A급 헌터가 있으신데…” “A급 헌터인 이세라 씨. 여기 우수현 씨가 감히 A급 헌터에게 짬을 때리려고 하고 있어요. 이거 사형감인데?” “그게 아니라! 저도 탑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요! 난 노말 7층에서 막혔다고!!” 우수현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아아, 재밌다. 이게 권력의 맛인가? 호랑이 뒤에서 진상부리는 여우가 된 기분? 째진다. 진짜 호랑이가 된다면 어떨까? 나중에 A급 헌터, 아니 B급 헌터라도 되면 매일 저기 찾아가서 진상부려야지. “하아. 그냥 내가 설명할게.” “이세라 씨, 정말 제가 일하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알아요. 저도 제가 더 잘 아니 제가 설명한다고 한 거에요. 하여간…일단 여기 손 대봐.” [탑에 입장하시겠습니까?] [네/아니오] 그러자, 눈앞에 창 같은 것이 떴다. 나는 네를 눌렀다. “이제 탑을 처음 입장하는 거면 지금 난이도 선택창이 나올 거야.” 난이도. 탑이 각성자의 재능을 파악하고 산정해내는 난이도다. 그리고 난이도는 선택할 수 있다. 보통 이지/노말/하드 의 세 가지 선택지가 가장 많이 나온다. 베리하드나 헬은 잘 안 뜬다고 했었다. “근데 남자가 무슨 이지나 노말이야. 당근빠따 하드지.” 우수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아, 저 사람 노말이었지. “근데 난 지금 여자니까 노말 해야지.” 우수현이 혼란에 빠졌다. 이세라는 알고 있어서 딱히 별 생각 없는 듯했다. 알림창이 넘어가는 데는 좀 시간이 걸렸다. [당신의 정보를 확인합니다.] [난이도가 산정됩니다…] [각성자 분석 중. 등반 가능성 검토.] “난이도는 가장 높은 걸 고르는 게 좋아.” “왜?” “보상이 제일 좋거든. 초반만 먹고 도망가도 되고.” 그런가? 그럼 제일 오른쪽에 손가락 대고 있어야지. 훅훅훅훅훅. 나는 손가락으로 화면 가장 오른쪽을 계속 찔러댔다. 저녁밥도 세라가 사준다고 했다. 각성 기념으로 좋은 데 데려가준다고 했었지. 빨리 끝내고 비싼밥 먹으러 가야겠다. [하드/베리 하드/헬] [이 난이도가 맞습니까? [헬]] [Y/N] 나의 동체시력은 매우 빠르게 알림창을 포착했고, 바로 Y를 눌러버렸다. [헬 난이도에 오신 것을 확인합니다!] “오.” “뭐야? 뭐 떴어?” “헬 난이도.” “…내가 헌터로 각성하고 초반에는 예민한 감각이 주체가 안 되더라고.” “응? 근데 그건 왜.” “아니, 지금도 그게 남아 있나 싶어서. 환각이나 환청 같은 게.” “잘못 들은 거 아닌데?” “…뭐?” “헬 난이도.” “헤, 헤, 헬 난이도라고요!? 전 세계를 통틀어도 들어간 사람이 몇 없는 그 헬 난이도!?” 우수현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뭐, 왜요?” 이세라도 놀란 표정이었다. “아니…특성도 많으니까 놀랍진 않은데, 제일 어려운 걸 바로 선택했다고? 고민도 없이?” “네가 선택하라고 했으니까?” 이세라도 베리 하드였다. 그거보다 한 단계 높은 정도면 할만 하지 않을까? 나는 이세라를 쳐다보았다. 세라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날 쳐다보다, 픽 웃고는 입을 열었다. “…몰라. 너라면 어떻게든 하겠지. 파티나 맺어.” [이세라 님이 파티를 신청하셨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N] 나는 이세라와 파티를 맺었다. 우수현은 덤덤하게 반응하는 세라의 반응을 보고 더 놀란 듯했다. 벙쪄 있는 우수현과도 파티를 맺었다. “그래도 위험해지면 바로 도망칠 수 있으니까, 무리는 하지 마.” “그래.” 나는 몸을 좀 풀었다. 그리고는 포션을 따서 마셨다. 내 몸에 푸른빛이 감돌고, 확실하게 내 마나가 늘어난 것이 느껴졌다. 쏴 봐야 알겠지만 작은 건 스무 발, 큰 건 두 발 정도는 문제없을 듯했다. “그거 뭐야?” “학교에서 교수가 줬어.” “포션도 준다고? 그 귀한 걸?” 하긴, 마나 회복 포션은 매우 귀했다. A급 헌터인 이세라도 찾으려면 옥션을 뒤져서 주머니를 털어야 할 정도.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마나를 늘려야 했으니까. 이세라도 아까워하는 눈치였다. “교수가 그랬는데, 공기 중의 마나로는 마법 못 쓴다고 하더라고.” 카르나로프의 깐깐한 얼굴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물론 그 말을 그대로 믿은 건 아니고, 해봤는데 안 되더라. 나는 세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칼 좀 빌려줘.” “A급 헌터에게 칼 빌려달란 소릴 하는 거야?” “아, 한번만 빌려주라. 무기도 없이 탑에 들어가라고?” “하아, 알겠어.” 그러고는 허공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새하얀 도신부터 뻗어나온 환도가 내 손에 쥐어졌다. 하지만 내가 놀란 건 다른 것 때문이었다. “웨폰 인벤토리!? 너 그건 언제…” SR 특성이잖아! 탑에서 나오는 특성은 등급이 정해져 있는데, 저건 내가 가지고 싶어했던 특성 중 하나였다. 초기특성에 안 나온 게 너무 아까웠다. “그렇게 좋은 건 아니야.” “뭐가 안 좋다고…?” 나는 무기를 쓰려면 몸집도 작아서 질질 끌고 다녀야 하는 신세였다. 아니면 어떻게든 허리에 차거나. 이세라는 노려보는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공간에 넣어놓으려면 정확한 각도로 넣었다 빼야 하고, 무기 판정이 아니면 넣지도 못해. 쿨타임도 길고, 생각보다 불편하다고.” 이세라가 헛기침을 하며 무기를 건넸다. 근데 내가 알고 있던 녀석이 아니었다. “뭐야. 무라마사는 어디갔어?” “그건 수리 맡겼어.” “또 깨먹었냐….” 이 자식, 훈련소에서도 무기를 자주 깨먹더니 그 버릇 아직도 못 고쳤다. “환도, 정일(正日). C급 아티펙트지만 네임드야. 그럭저럭 쓸만할 거야.” “에잉.”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나는 일렁이는 공간에 발을 들였다. [탑에 입장하시겠습니까?] [Y/N] 바로 Y를 눌렀다. 내 몸이 어딘가로 이동되었다. *** “괜찮겠습니까? 헬 난이도는 웬만한 A급 헌터도 특성이나 능력이 성장하지 못한 초반에는…” 우수현은 시험관을 하면서 탑을 오르는 헌터들을 많이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다시는 못 보게 된 사람들도 꽤 있었다. 특히 헬 난이도.들어간 사람은 시체나 괴물 둘 중 하난 되어 나온다는 그 난이도. 괜히 깊이 들어갔다가 안 좋은 소식이 나오면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유미아는 더 오래 봤기에 더 그랬다. “괜찮아요.” “…별로 걱정 안 하시네요.” “제가 있는데 저 자식이 왜 수석이었는지 알아요?” 하긴, 우수현은 예전부터 궁금했다. A급 헌터는 헌터 훈련소에서도 최상급 아웃풋이다. 그런 A급 헌터가 저런 또라이한테 밀렸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보통 마나를 많이 품고 있으면 자연히 신체능력이 강해진다. 아무리 훈련소가 1층도 오르지 않은 헌터를 대상으로 한다고 해도. A급이라면 각성 직후에도 마나를 꽤 품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때와는 차원이 다르지만, 그 시점에서도 일반인과 두세 배는 신체능력이 차이가 났을 거란 이야기다. “뭔가 요행이 있던 거 아닙니까?” “꼼수도 있고 요행도 있기는 한데…” 이세라는 말을 살짝 끊었다.오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대일로 붙었을 때 아무도 못 이겼거든요. 같은 기수의 훈련생 누구도.” *** 나는 탑 안으로 여유롭게 걸어들어갔다. 실제로 탑에서 몬스터를 상대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배운 것은 까먹지 않았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제일층, 사자의 층:첫 번째 방에 입장합니다!] [첫 번째 방에 난이도 버프-어둠의 장막이 발생합니다!] “…잉?” 칠흑같은 어둠이 날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