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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남자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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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남자의 아이

“얼른 준비하자.”

설아의 말에 유민은 가방에 그림공부책과 학습지를 집어넣었다.

“오늘도 하루 종일 있어?”

“아니. 밥 먹기 전까지만.”

“그럼 점심은 집에 와서 먹는 거야?”

유민의 얼굴이 환해졌다.

올해 일곱 살.

통통한 볼살과 붉은 입술이 귀여워서, 설아는 마주 웃어주었다.

설아도 이러고 싶지 않았다. 주말에는 아이와 종일 놀고 싶지만,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짬짬이 알바를 해야 유민이를 남부럽지 않게 키울 수 있으니까.

홀로 키워야 하는 아이였다. 그리고 홀로 견뎌야 하는 삶이었다.

다행히 설아가 일하는 편의점에서 양해를 해 주어서, 유민이를 데리고 출근을 할 수 있었다. 설아가 일하는 동안 유민이는 구석 자리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학습지를 풀었다.

“아침 일찍 준비하고 나오느라 힘들었지? 밥은 먹었고?”

점주인 백인숙은 60대 아주머니로 설아와 같은 싱글 맘이었다. 아들은 벌써 대학 졸업 후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설아의 마음을 잘 이해해 주는 면이 있었다.

“네, 집에서 유민이 챙겨주면서 같이 먹었죠.”

“그거로 돼? 여기, 이거 유통기한 거의 다 된 거긴 한데, 이것도 좀 먹어.”

구운 계란을 유민이 것까지 챙겨서 넉넉하게 내미는 인숙을 향해 설아는 손을 내저었다.

“아뇨. 유통기한 아직 많이 남았잖아요. 팔 수 있는 건데.”

“팔아서 몇 푼이나 한다고. 좀 먹어. 사람이 단백질을 챙겨 먹어야지. 유민이도 먹고.”

“고맙습니다.”

계란을 좋아하는 유민이는 얼른 두 손으로 받고 나서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아이고, 예의 바른 것 좀 봐. 누가 키웠는지 아들 참 잘 키웠어.”

인숙이 유민의 머리를 쓰다듬자 유민이 헤헤 웃었다.

늘 제 딸처럼, 그리고 제 손주처럼 그녀와 유민을 돌보아 주는 인숙을 보며 설아는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마워요, 아주머니.”

유민과 앉아서 계란을 먹고 있는데 목 막힌다고 인숙이 유민이 먹을 우유와 설아가 먹을 사이다를 가지고 왔다.

설아는 사이다를 꿀꺽꿀꺽 마시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민아, 그러면 공부하고 있어. 엄마 얼른 일하고 올게.”

“응, 엄마 걱정하지 마.”

환하게 웃는 유민의 이마에 입을 가볍게 맞춘 설아는 카운터로 갔다.

평소처럼, 친절한 손님이 있는 반면 꼬깃꼬깃한 돈을 던지듯이 내미는 진상 손님들도 있었다. 설아는 잔뼈가 굵은 알바답게 적절히 대응하면서 오전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약속한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

이제까지 했던 것을 간단히 정산해 놓으며 마무리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계산을 하려는지 카운터로 왔다.

“아, 죄송합니다. 얼른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설아는 고개를 들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장승처럼 우뚝 선 남자는, 7년 전에 그녀가 떠나온, 그리고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남자였다.

“하.”

설아는 어떤 말도 더 할 수가 없었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지.

7년 전에 두고 온 기억이었다. 다시는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남자이기도 했다.

JK그룹의 기획전략부 본부장, 한승준. 그는 JK그룹 회장의 맏손자로 날아오르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세를 가졌다는 자였다.

승준의 두 눈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설아는 알았다. 그 역시 적잖이 놀랐다는 것을. 그의 손에 커피 캔이 꽉 쥐어져 있었다.

“계산.”

설아는 허둥지둥 계산을 했다. 커피를 들고 바코드를 찍었다. 그러다가 그만 손이 떨려 커피를 놓치고 말았다. 얼른 고개를 숙여 주우려는데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엄마, 내가 주워줄게.”

언제 왔는지 유민이 설아에게 커피를 주워서 내밀었다.

“고마워, 얼른 가, 가서 공부해야지.”

설아는 저도 모르게 말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끼며 얼른 커피를 받아 들었다.

그 모습을 승준은 무표정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계산, 해 드리겠습니다.”

설아가 다시 커피를 바코드에 찍고 승준이 올려놓은 카드로 계산을 했다. 블랙 카드. 기억했다. 7년 전 설아에게 맘껏 쓰라고 준 것이었다.

설아는 거절했고.

비서로 3년, 그리고 연인으로 1년. 설아는 그것으로 족했다. 아이가 생겼고, 승준에게는 결혼할 사람이 생겼다. 그러니 끝이었다. 이 아이를 모르는 여자의 아이로 키울 수는 없었으므로.

승준은 카드와 커피를 내미는 설아를 보고는 커피만 집어 들었다.

그러고 나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편의점을 걸어 나갔다.

“저, 손님.”

설아는 카드를 들고 승준을 다급히 뒤따라 나섰다.

문이 닫히기 전 흘긋 유민 쪽을 보니, 그는 다행히 학습지를 푸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손님, 카드 안 가져가셨습니다.”

승준은 설아가 카드를 내미는 것을 보고도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손님.”

“가져.”

“네?”

설아의 두 눈이 커졌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손님 물건인데 가져가셔야죠.”

“그것만 가져간 것도 아니지 않나?”

승준이 고개를 내려 설아의 두 눈을 똑바로 맞춘 채 말했다.

“내 아들.”

설아의 동공이 떨렸다. 누가 봐도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른 고개를 내린 채 설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승준은 대답 없이 픽 웃었다.

승준의 몸이 설아에게 훅 다가왔다.

그에게서 늘 맡던 향기가 났다. 옅은 머스크향과 체취가 섞인.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향이기도 했다.

군살 하나 없는 탄탄한 몸에 안기면, 그 향기가 그녀의 가슴 속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나른함에 젖었던 기억. 그렇게 오늘이, 그리고 내일이 사라졌으면 했던 날들.

“손님 아들은 손님 댁에 있겠죠. 왜 여기에서 찾으시는지.”

침묵이 버거워 설아는 한마디를 더 했다.

“없어.”

승준이 냉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하시지 않았습니까.”

눈을 들어 바라본 설아는 순간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의 커다란 동공이 설아를 집어삼킬 것처럼 까맣게 빛나고 있었다.

“결혼한 적 없어. 헛소문이었지.”

이번에는 설아의 동공이 커졌다.

분명히 결혼 소식이 기사로 났었다.

“그런 시답잖은 이유로 떠난 거였나? 겨우 결혼 소식 하나 가지고.”

겨우라니. 어차피 당신은 내게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잖아. 결혼 소식에 현실을 자각한 것뿐이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우린 어차피 계속 함께 갈 수는 없는 사이였어.

“엄마.”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유민이 설아가 없으니 나와본 듯했다.

“엄마, 왜 여기 있어?”

“아, 손님이 뭘 안 가져가셔서 챙겨 드리려고.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설아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린 채 유민에게 말했다. 그 모습을 승준은 흥미로운 듯 보고 있었다.

유민이 도로 들어가자,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승준이 설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진실이야 조사하면 다 나오는 거고.”

설아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건, 진실을 다 알아낸 후 내가 다시 찾아가는 것으로 하지.”

승준이 설아의 손에 제 블랙 카드를 기어이 넘기고 돌아서서 걸어갔다. 설아가 승준을 따라가려는 순간 누군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을 두고 더는 나와 있을 수는 없었다.

설아는 멀어지는 승준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손에 들린 카드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꼭 그것이 카드가 아니라 가슴에 꽂힌 칼인 것처럼.

*

“이제 잡는다!”

“와아아아!”

며칠 후.

하원 후에 유민은 같은 유치원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다.

오늘은 설아의 퇴근이 평소보다 늦는 날이었다.

설아는 같은 어린이집 엄마 중에서 친분이 있는 편인 윤성 엄마에게 유민이를 맡겼다.

“애들 배고프겠다. 나 잠깐 간식거리 좀 사 올게요. 어디 안 가실 거죠?”

놀이터 옆 벤치에 앉아 있던 윤성 엄마는 옆에 있는 신영 엄마에게 말했다.

“네, 여기 있을 거니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윤성 엄마는 놀고 있는 아이들을 흐뭇한 모습으로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땡!”

“으아아, 잡혔다!”

그 사이, 아이들은 술래잡기를 시작했다.

유민이가 술래가 되자, 5분도 되지 않아 아이들이 전부 잡히고 말았다.

유민은 신체적인 조건이 좋아서 또래보다 머리 하나가 컸고, 달리기 실력도 남달랐다.

“얼른 다음 술래 뽑자!”

유민이 말하자 가장 먼저 잡힌 신영이 불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너무 잘하니까 앞으로 술래 되면 한 발로 뛰어.”

멋대로 정해버린 규칙에 유민이 바로 항의를 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러면 다들 한 발로 뛰어야지!”

“그래. 그건 유민이 말이 맞아.”

유민과 친한 윤성이 동조했으나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신영의 편에 붙었다.

“아니야, 유민이만 계속 이기니까 재미없어.”

“싫으면 너는 그냥 집에 가.”

처음에 한 발로 뛰라고 제안했던 신영이가 손가락질을 하며 말하자, 그편에 동조한 다른 아이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 집에 가. 너는 튼튼 학습도 안 하잖아.”

튼튼 학습은 유민을 제외한 다른 아이들이 같이하는 과외 학습이었다. 신영 엄마의 주도로 영어와 국어, 수학 선행 공부를 하고 있었다.

설아도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지금 사교육을 시켰다가 돈이 부족하면 중고등학교 시기에 제대로 서포트할 수 없을지도 몰라서였다. 그리고 비싼 대학 등록금도 미리 마련해야 했다.

설아는 직접 한글과 수학, 영어를 유민에게 가르쳤고, 유민이는 다행히 엄마표 교육이 잘 통했다. 지금 유민이는 누구보다도 좋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또래들과 함께 사교육을 받지 않는 까닭에 유민이는 친구들로부터 가끔 소외가 될 때도 있었다.

“튼튼 학습은 엄마가 안 해도 된댔어!”

유민이 소리쳤으나 신영도 지지 않고 외쳤다.

“아니야. 튼튼 학습은 해야 해. 우리 엄마가 그건 꼭 하랬어. 넌 아빠가 없어서 돈이 없으니까 못 하는 거야.”

“뭐라고?”

유민의 두 눈이 커졌다.

튼튼 학습을 하라고 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아빠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설아와 자신을 슬프게 하는 것이므로.

“야, 너 사과해!”

유민이 신영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신영은 사과를 하는 대신 혀만 날름 내밀었다.

“싫은데. 아빠도 없는 주제에.”

“사과하라고!”

유민은 주먹으로 신영의 머리를 내리쳤다. 신영이 놀라서 울음을 터뜨렸다.

“어어어어어엉!”

그때까지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던 신영 엄마가 신영이 우는 것을 보고 놀라서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왜 울어?”

신영 엄마가 묻자, 신영이 손가락으로 유민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유민이가 때렸어. 주먹으로 때렸어!”

신영 엄마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유민을 바라보았다.

“니가 때렸니? 유민이 너 나쁜 아이구나? 친구를 때리면 안 되지! 왜 때렸어, 신영이를 왜 때렸냐고!”

신영 엄마는 유민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러나 유민은 입을 꾹 닫은 채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왜 때렸냐고, 왜 대답이 없어, 응?”

그러나 유민은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때려서는 안 된다고 했었다. 유민은 스스로 그런 것을 어겼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때 한 남자가 그들에게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장신의 남자는, 무뚝뚝한 얼굴로 그들을 본 채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