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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신이 왜 거기에.

네가 길들인 남자 — novel.naver.com · All chapters

2. 당신이 왜 거기에.

“누구, 아 편의점 총각?”

신영 엄마의 말에 남자는 뒷머리를 긁었다.

“삼촌!”

유민이 남자를 보고 소리쳤다.

그는 설아가 일하는 편의점 점주의 아들 진철이었다. 마침 오늘이 면접 날이라 슈트를 입고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머니가 점주로 있는 편의점에서 자주 일을 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대개 그의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는 우연히 집 근처 놀이터를 지나가다가 유민에게 소리치는 여자를 보고 놀라서 다가왔다. 그러나 성격이 소심하고 내성적인 그는, 서슬이 퍼런 신영 엄마의 태도에 멈칫대고 있었다.

“유민이 삼촌이라고요?”

신영의 엄마가 다시 눈에 쌍심지를 켰다.

“그러면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 좀 해야겠네요. 유민이가 우리 애를 때렸는데!”

“아, 그게. 유민이가 막 그렇게 사람 때리고 그러진 않는데…….”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애가 이렇게 깡패처럼 구는데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아무리 애들이라도 폭력은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 거 알죠?”

신영 엄마는 잘 걸렸다 싶어서 다시 따발총이 되어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진철은 진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죠. 죄송합니다.”

그때였다.

“뭡니까.”

첫 번째 남자와는 같은 슈트 차림인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다른, 위험한 느낌의 남자가 그들에게로 다가선 것은.

수려하고 매끈한 외모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남자는,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것처럼 압도적인 존재감을 풍겼다.

그는 위협적인 눈으로 신영 엄마와 진철을 번갈아 보다가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 유민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아니, 당신은 또 누구세요? 이번에는 삼촌 아니고 이모부쯤 되나?”

신영 엄마는 놀리듯이 남자에게 물었다. 그러나 남자는 진철처럼 머리를 긁지도, 어수룩한 표정을 짓지도 않은 채 똑바로 신영 엄마를 내려다보았다.

“유민이하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유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철은 알고 있었지만 이 남자와는 초면이었다. 그런데 왜 자신을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걸까.

“하, 이거 참. 유민이가 우리 애를 때렸어요. 주먹으로 때렸단 말이죠.”

“그래서.”

승준이 신영 엄마를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전후 사정도 듣지 않은 채 무조건 때렸다고 아이를 몰아붙이는 중이었다는 거죠?”

“네? 아, 아니, 그래도 사람을 때리는 건 나쁜 거잖아요. 그걸 가만 놔둬요?”

신영 엄마가 소리치자 승준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좋은 건 아니죠. 그렇지만 왜 그랬는지 정도는 묻고 상황을 파악하신 후에 혼내든가 말든가 해야죠. 그게 순서 아닐까 싶은데.”

신영 엄마를 비롯한, 모두의 안색이 굳었다.

그는 말 하나, 몸짓 하나로 상대를 충분히 긴장시킬 수 있는 그런 위압감을 가진 남자였다.

“누구세요? 누군데 우리 일에 이렇게 막 끼어드시는 거예요?”

신영 엄마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남자를 올려다본 채 소리쳤다. 승준은 차분하지만 냉랭한 어조로 답했다.

“내가 누군지가 중요합니까? 누구라도 어른이 아이에게 이렇게 대하는 것을 보면 끼어들 수밖에 없을 겁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 이상한 사람이네. 갈 길 가요.”

신영 엄마가 빽빽 소리를 지르자 승준은 품에서 티켓 몇 장을 꺼냈다.

“골드랜드 티켓입니다. VIP티켓이라서 퍼레이드 관람 및 촬영, 놀이기구 탑승 시 우선권 있고요. 퇴장 시 선물도 증정합니다.”

“골드랜드! 엄마, 우리 골드랜드 가자, 골드랜드 가!”

골드랜드는 회원제 어린이 테마파크로 일반인은 돈이 있어도 가지 못하는 곳이었다. 부모 중 한 명이 JK카드의 VIP회원이어야 입장이 가능했다.

신영은 티켓을 보고 눈이 돌아간 듯 자신의 엄마를 붙들고 소매를 잡아당겼다.

신영이 조르자, 기세가 등등했던 신영 엄마는 순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눈빛으로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받으시죠.”

승준이 재차 권하자 신영 엄마는 못 이기는 척 티켓을 받았다.

“그리고 앞으로는, 내 아이만큼 남의 아이도 귀하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같이 사는 세상 아닙니까. 난 이렇게 모르는 사람에게도 내 것을 나눠주는데.”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씀,”

신영 엄마가 얼굴이 벌겋게 된 채 고개를 들었을 때, 신영이 티켓을 들고 방방 뛰었다.

“와, 이거 진짜 금박 티켓이다, 완전 멋있어!”

이제 이 상황을 누가 지배했는지는 명백해졌다.

싸움의 승자는 많이 말하는 이가 아니었다. 많이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그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승준이었다.

신영 엄마는 신영의 뒤통수를 손으로 내리쳤다.

“아아, 엄마, 왜!”

“으이그. 빨리 가자, 가!”

신영을 연이어 쥐어박는 시늉을 하며 신영 엄마는 가 버렸다.

유민이 승준을 보았다. 승준이 남은 티켓을 내밀었으나 유민은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경계의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아이를, 승준은 착잡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

어느덧 퇴근 시간이었다.

설아는 허겁지겁 일을 마무리했지만 막 일어서려는 순간 그녀의 책상으로 무언가 툭 떨어졌다.

“내일 아침까지 정리해.”

설아는 고개를 들었다.

설아의 책상으로 일감을 던진 사람은 이 작은 회사 대표의 딸이자, 최근에 낙하산으로 들어온 문희선이었다.

설아가 일하는 회사는 ‘우단 식품’이라는 작은 식품 회사였다. 아이를 홀로 키우면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최대한 야근이 적고 출퇴근이 자유로운 조건을 찾아 취직을 했다.

그러나 처음 약속과는 달리, 점점 설아에게 많은 업무가 밀어닥치고 있었다.

희선이 던진 자료는 JK식품 심사에 보낼 서류 자료였다.

최근 JK식품에서는 작은 식품 회사를 상대로 공고를 냈다. 맛있고 좋은 식품을 발굴해서 JK식품에서 마케팅을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우단 식품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이걸, 다요?”

“길어야 한두 시간이면 되잖아? 내가 온종일 작업했으니까 그냥 숫자 한두 개 고치면 될 거야. 내가 내일 커피 쏠게.”

설아는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도 희선이 같은 말을 해서 일을 떠맡았다가, 퇴근도 하지 못하고 열두 시가 넘도록 야근을 해야 했다.

염치 불고하고 인숙에게 유민이 저녁을 부탁하고 나서 작업을 한 그 밤, 유민이 엄마를 찾다 눈물 자국이 난 얼굴로 잠든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속이 뒤집어졌는지.

“못 하겠습니다.”

설아는 그렇게 말하고 희선에게 일감을 돌려주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설아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원래 거절을 잘 못 하는 성격이었다. 지금 이 말도 꽤나 용기를 냈다.

“야.”

희선은 미간을 좁힌 채 허리춤에 손을 대었다.

“너, 이 회사 길게 다니고 싶지 않아?”

그게 유일한 무기인 여자. 설아는 심호흡을 했다. 일단 내지른 이상, 질 수는 없었다. 그러면 내지른 것도 소용이 없게 되지 않나.

“네, 길게 다니고 싶어요. 그래서 못 하는 것은 미리 말씀을 드리려고요. 문 과장님도, 길게 다니고 싶으시면 이렇게 남에게 일 떠넘기는 버릇 고치셔야 할 겁니다.”

설아는 자신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가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희선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이제껏 시키는 것은 고분고분 일했던 그녀였으니까.

“야!”

“무슨 일이야, 왜 큰 소리야?”

그때 멀리서 강춘식 전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강 전무는 사장 라인의 사람으로 희선과도 친했다.

순간 설아의 얼굴에 곤란한 빛이 스쳤다. 강 전무가 끼어들면 백전백패였다. 사장은 강 전무에게 실무 전반을 맡기고 있으므로, 밉보였다가는 내일 당장 사표를 쓰게 될지도 몰랐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회사 안에서 이렇게 큰 소리를 내?”

정작 큰 소리를 낸 것은 희선인데, 강 전무의 시선은 설아를 향해 있었다.

“그게.”

“하여튼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어. 또 뭐야, 애가 또 아파? 문제 생겼어? 이래서 애 엄마는 쓰면 안 된다니까. 맨날 애가 이렇다 저렇다, 전에 지각한 것도 내가 사장님께 얼마나 빌었는 줄 알아?”

그때 지각을 한 것은 밤에 갑자기 유민이 열이 펄펄 났기 때문이었다.

응급실에 아이를 데리고 가서 꼬박 밤을 새우고 아이를 지키다가, 겨우 열이 내려서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고 출근을 한 것이었다.

하루쯤 쉬게 하고 싶었는데, 출근 때문에 어린이집을 보내야 하는 설아도 마음이 찢어졌었다.

그런데.

그걸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설아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전무님은, 알에서 태어나셨나 봅니다.”

“뭐라고?”

“어머니 배 속에서 태어나 어머니 돌봄을 받지 못하셔서, 어머니 마음을 전혀 이해를 못 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요.”

설아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그래, 나에게 욕을 하는 건 참을 수 있어. 하지만 유민이는 건드리면 안 되지.

“전무님께서 부탁하신 판매 실적 보고서, 지금 거의 완료가 되어 갑니다. 하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아이 가지고 치사하게 구시면 당장에 제 컴퓨터 포맷시킬 겁니다. 보고서는 제시간에 올라가지 못하겠죠.”

“뭐, 뭐라고,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강 전무가 소리쳤다. 설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하수였다. 소리밖에 내지르지 못하고 정작 일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네, 협박하는 겁니다. 그러니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에게는 야단을 쳐도, 제 아이 들먹이지 마세요. 들먹이는 순간 제 컴퓨터 모든 자료는 날아가는 겁니다. 저도 사표 쓰겠지만 그 결과가 어떨지는 전무님이 더 잘 아실 겁니다.”

차가워지는 설아의 얼굴에 강 전무의 호흡이 가빠졌다.

“하, 진짜, 하극상도 이런 하극상이. 문희선 너는 회사에서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귀청 떨어지게. 조용히 좀 일하자, 조용히 좀!”

강 전무는 애먼 희선에게 소리치고는 몸을 돌렸다.

그 역시, 설아가 모든 자료를 없애버리면 누구에게 그 여파가 가장 크게 올지 알고 있었다. 설아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눈을 꾹 감았다.

머리가 핑 돌면서 어지러웠다. 이제껏 문희선이나, 강춘식과 맞붙었던 적은 없었다. 늘 고분고분, 순종하고 헌신하면서 살아왔었다.

유민이가 나를 많이 달라지게 만드는구나.

마음먹고 내지르긴 했으나, 그녀 역시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자리로 돌아온 설아는 급하게 퇴근 준비를 하고 회사를 나왔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설아는 휴대폰을 꺼냈다.

‘유민이는 잘 있나.’

아이를 맡긴 윤성 엄마에게 전화를 해 보았다.

[놀이터에서 노는 거 보고 간식 사 가지고 오니까, 편의점 총각이랑 같이 있더라고. 편의점 총각이 자기가 챙기겠다고 데리고 갔어요.]

편의점 총각이라면 진철이었다. 설아도 종종 진철에게 유민을 부탁할 때가 있으므로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전화를 끊고 난 설아는 바로 진철에게 전화를 했다.

“진철 씨, 우리 유민이 잘 있나 해서,”

[어디지?]

그런데 들려오는 목소리는 진철의 것이 아니었다.

당신이 왜 거기에. 승준의 목소리를 들은 설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