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안 잡아먹으니까 걱정하지 마.
3. 안 잡아먹으니까 걱정하지 마.
승준은 경계심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유민을 지그시 마주 보고 있었다.
지방 출장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운전기사가 극도로 피곤해하는 것이 보였고, 승준은 기사를 잠시 쉬게 해주고자 차를 세웠다.
가만히 앉아 있기 머쓱해서 마침 눈에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섰다. 그곳에 누가 있는지도 모른 채.
그가 버린 기억의 일부가 그곳에 있었다.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었다. 더는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가 모르는 아이. 하지만 어쩌면, 나와 깊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아이.
다음 날, 승준은 사람을 시켜서 그녀가 그를 떠난 후의 행적을 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정기적으로 산부인과를 다녔던 것으로 드러났다. 출산 시기를 보니 이미 그에게서 떠날 때 임신이 되어 있던 상태였다.
아이는 일곱 살이었다.
승준은 그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미련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분노였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감히 내 것을 키우고 있었던 것인가.
내 허락도 없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일단 슬쩍 보고만 오자고 생각했다. 어떻게 크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혹시 몰라 말이라도 트면 주려고 골드랜드 티켓을 챙겼다.
유치원 하원 시간이었고 아이들이 놀이터로 몰려가는 것이 보였다. 승준은 유민을 금세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사건이 터졌다.
사교육을 하지 않는다고 놀림 받는 아이, 아빠가 없다고 손가락질 당하는 아이. 부족함 없이 재벌가에서 자란 한승준의, 아들은 그렇게 자라고 있었다.
“누구시냐니까요.”
유민은 승준이 사준 케이크에는 입도 대지 않은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승준은 피식 웃었다.
“저, 누구시냐는데요.”
그리고 그들 사이에 진철이 앉아 있었다.
소심한 성격상 신영 엄마에게 뭐라고 하지 못하고 물러났지만 진철은 몰래 숨어서 사태가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신영 엄마가 화를 내고 돌아가자, 승준은 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진철을 불러냈다.
- 삼촌이라면서. 잠깐 얘기 좀 하러 갈 건데 같이 가지.
승준이 먼저 걸어가고, 유민과 진철이 남겨져 있을 때 마침 볼일을 마친 윤성 엄마가 왔다.
- 어머, 신영 엄마는 어디 가고 편의점 총각이 있어요?
- 아, 볼일이 있어서 제게 유민이 맡기고 가셨어요.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진철은 승준 쪽을 흘긋 보고 나서 윤성 엄마에게 말했다.
윤성 엄마가 사실을 알게 되면 설아에게까지 전달이 될 것 같았다. 가뜩이나 회사 일로 바쁜 설아가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 그래요, 그럼 난 애들한테 가 볼게요. 부탁해요.
윤성 엄마가 돌아간 후, 저만치 혼자 걸어갔던 승준이 도로 돌아왔다.
- 왜 안 오는 건데?
진철은 당황한 눈으로 승준과 유민을 번갈아 보았다. 거절하고 싶었으나 무서워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진철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승준이 그의 휴대폰을 뺏어 들었다.
통화를 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설아를 알긴 하는 것 같았다. 설아가 당장 가겠다고 하는 목소리가 진철에게까지 들렸다.
- 상황 파악됐으면 좀 가지.
전화를 끊고 난 승준은 앞장섰다.
원래는 그가 잘 아는 호텔 VIP전용 티룸에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유민이 승준의 차에 타는 것을 강력히 거부했다. 엄마가 모르는 사람 차에 타지 말라고 했다면서.
해서 유민이 원하는 동네 카페로 왔다. 그리고 설득 끝에 저 이상한 케이크 하나를 주문할 수 있었다.
“안 먹을 거야?”
승준은 케이크를 제 앞으로 가져다 놓았다. 포크로 귀퉁이를 살짝 찍어 혀에 대었다.
그는 바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버려.”
“네?”
“맛없으니까 버리라고. 싸구려란.”
승준은 거친 손길로 케이크를 구석으로 치워 버렸다.
“싸구려 아닌데요.”
유민이 눈을 들어 승준을 바라보았다.
“칠천 원이나 하잖아요.”
“그러니까 싸구려지. 하긴, 질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높은 값이긴 해.”
“질이 뭐예요?”
눈을 또랑또랑하게 뜬 채 유민이 물었다.
승준은 다시 웃었다.
그 패기 하나는 봐줄 만했다. 어디서 주워다 입힌 것 같은 옷을 입고서는 승준 앞에서도 제 할 말은 다 하는 모습이.
“질은, 그러니까 품질, 퀄리티를 말하는 거야.”
“퀄리티는 뭔데요?”
“네가 입은 그 옷.”
승준이 눈으로 유민의 옷을 가리켰다.
“그거 어디서 산 거야?”
“엄마가 장터할 때 사다 준 거예요.”
“장터?”
“아파트에 일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장터요. 거기에 좋은 물건이 많이 나온대요.”
승준은 기가 막혀 웃었다.
역시 짐작했던 대로였다. 전용 퍼스널 쇼퍼에게 계절마다 옷을 추천받는 승준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
잘 키워볼 생각으로 임신한 채 도망간 거 아니었나. 그래 놓고 지금 이게 잘 키우는 거야? 돈 한 푼 안 받겠다고 유세는 있는 대로 떨고.
“그래, 네가 입은 그 옷이 질 낮은 옷이야. 누가 입으라고 줘도 안 입는 옷.”
승준은 그렇게 말하고는 눈앞의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마셨다.
더럽게 맛이 없었다.
제대로 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이 동네는. 승준은 신경질적인 시선으로 작은 동네 카페를 휘돌아 보았다.
“아닌데요?”
그런데 이번에는 유민이 발끈했다.
“뭐?”
“이 옷 질 안 낮다고요. 이 옷 좋은 옷인데요.”
유민은 가슴을 펴고 대들듯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승준을 닮은 두 눈이 까맣게 빛나고 있었다.
“질 낮고 높고가 뭔지는 확실히 알았군.”
승준은 그렇게 말하고는 유민의 똑똑한 시선을 마주했다.
두 사람이 서로 눈에 불꽃을 튀기는 속에서 진철은 긴장한 마른침만 삼키고 있었다.
“유민아!”
그때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카페 문이 열렸다.
뛰듯이 들어선 설아가 승준을 노려보고 섰다. 승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짓이에요?”
유민과 비슷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설아를 마주한 승준이 두 모자를 번갈아 보고는 다시 피식 웃었다.
“진철 씨, 이분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예요?”
설아가 진철에게 묻자, 그는 할 말이 없어 뒷머리만 만졌다.
“죄송합니다. 같이 가자고 하시는 바람에.”
설아는 진철도, 승준도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진철은 착하지만 남의 말을 잘 거절 못 하고 어리숙한 면이 있었고 승준은 그런 사람을 잘 이용할 줄 알았다.
“알았어요. 유민이 좀 부탁드릴게요. 먼저 데리고 가 주세요.”
상황을 더 듣고 싶었지만, 지금은 이 남자를 쫓는 것이 먼저일 것 같아 설아가 말했다.
“왜,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람 아닌가. 증인이기도 하고.”
그러나 승준이 그것은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 성큼 설아에게 다가섰다.
그 순간이었다.
승준과 설아 사이를 유민이 파고든 것은. 유민은 두 손으로 승준의 배를 밀쳤다.
“저리 가요, 아저씨!”
승준은 황당한 기분으로 유민을 내려다 보았다. 제 반토막밖에 안 되는 작은 몸이 씩씩거리고 있었다.
“우리 엄마한테 소리 지르지 마요!”
승준은 입을 벌렸다.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 아이는 지금 상황 파악을 전혀 못 하고 있었다. 소리를 지른 것은 제 엄마였다.
“소리 안 질렀어.”
“위협했잖아요.”
“위협도 안 했어. 너 질도 모르고 위협도 몰라? 대체 아는 게 뭐야?”
승준이 으르렁거리자 이번에는 설아가 그의 어깨를 떼밀었다.
“유민이한테 그러지 마요.”
승준이 눈을 들어 설아를 바라보았다.
“너는 또 왜 그래. 내가 먼저 그랬어?”
“어른이 왜 유치하게 애랑 싸우고 그래요.”
승준은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더 이 꼬마를 두고 이야기를 하다가는 혈압 때문에 제 뒷골이 먼저 당기게 될 것 같았다.
“그래, 아이는 보내.”
“엄마는.”
유민은 승준과 설아를 번갈아 보았다.
“안 잡아먹으니까 걱정하지 마.”
승준의 말에 유민이 그 작은 눈을 부라렸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경찰서는 112. 구급차는 119.”
“왜, 간첩 신고도 하지? 113.”
승준이 말을 하는데 설아가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승준은 입술을 꾹 깨물고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진철과 유민이 가고 난 후, 설아는 작은 한숨을 쉬며 자리로 돌아왔다. 승준도 마음을 가라앉히며 자리에 앉았다.
설아는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뭘 하려는 것인가 싶어 승준은 미간을 좁혔다.
“마침 만났으니 주인 찾아 드려야죠.”
설아가 지갑에서 꺼내서 내민 것은 승준의 블랙 카드였다.
“뭐?”
그 순간 승준의 입술이 비틀렸다.
“이 카드 주인은 내가 아닌데.”
승준의 눈빛이 화살처럼 설아를 찔렀다.
“내 아들이지.”
설아의 동공이 속절없이 떨렸다.
다 알아냈구나.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승준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하고도 남았다.
도망쳤어야 했나. 하지만 갑자기 어디를 간다는 말인가. 갈 곳도 없었고 가도 못 찾아낸다는 보장도 없었다. 갈 돈을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긴말할 시간 없어. 난 내 아들 이곳에 이 꼴로는 단 하루도 더 두고 싶지 않아. 그 카드 써서 이제라도 제대로 교육시켜. 먹을 거 입힐 거 확실히 하고. 아니면 내가 데려갈 거니까.”
승준이 일어서자, 설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오른쪽 뺨이 씰룩 움직였다.
“못 데려가요, 제가 키운 제 자식이에요. 절대 못 데려가!”
마주 일어선 설아가 소리쳤다. 승준은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을 입에 댔다.
“그래서 기회를 주는 거잖아. 일단 이사해. 유치원도 옮기고. 이상한 애들하고도 관계 끊고.”
“이상한, 애들이라뇨.”
설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수준 떨어지는 애들 말하는 거야. 내 애가 그런 아이들하고 어울리는 거 더는 못 보겠어. 아이 키우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승준이 더 있고 싶지도 않은 카페를 나가려고 테이블 밖으로 한 걸음 디뎠을 때였다.
“유민이는, 당신을 전혀 모르고 또 당신하고 달라요. 일부러 그렇게 키웠어요.”
승준의 귀로 독한 음성이 흘러들었다.
승준이 설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일부러?”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아는, 세상 자기만 아는 그런 거만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요.”
승준의 입으로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 그래서 어디 갖다 버려도 안 입는 옷을 주워다 입혔고, 칠천 원짜리 싸구려 조각 케이크가 비싼 케이크라고 말할 정도로 먹는 것도 형편없이 챙겼어?”
설아의 눈썹이 구겨졌다.
그녀가 넉넉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민이를 못 입히고 못 먹인 것은 아니었다.
메이커가 아니어도 질 좋고 튼튼한 옷을 입혔고, 먹는 것도 늘 영양소를 고려하여 고루 챙겼다. 선천적으로 장이 안 좋은 것을 제외하고 유민이는 건강하게 잘 크고 있었다.
“형편없다고요? 그래요, 당신의 그 오만한 눈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겠죠. 하지만 유민이는 누구보다 당당하고 멋진 아이예요. 당신이 보지 못하는 그것을 가진 아이니까요.”
설아의 두 눈에 눈물이 휘돌았다.
끝내 흘러내리는 눈물을 승준은 무표정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 전화가 오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카페를 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