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남자는 좀 조심해야겠더라.
5. 남자는 좀 조심해야겠더라.
- 아가씨, 괜찮아?
한참 울고 났을 때, 인숙이 설아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그제야 설아는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았다.
‘엄마’ 없이 한 평생을 살았고, ‘엄마’가 된 것을 알고 도망쳤다. 그리고 더는 ‘엄마’가 될 힘이 없다고 절망하고 있었다.
내가 과연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보고 배운 것도 없는 내가 어떻게.
그런데 무심코 들은 ‘엄마’라는 말에 마음이 바다처럼 출렁거렸다. 마치 그 말이 그녀의 인생을 푸는 열쇠인 것처럼.
- 엄마, 누구예요?
그 상황에도 여전히 ‘엄마’라는 말은 그녀를 때리고 있었다.
- 글쎄, 모르는 분인데 많이 힘들어 보이네. 이러지 말고 안에 들어가서 얘기해요.
설아가 인숙의 품에 어쩌다가 안긴 것은, 그녀의 힘이 다 빠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인숙은 말없이 설아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 고맙습니다.
천천히 포옹을 푼 설아는 인숙의 안내로 편의점 구석에 놓인 의자 위에 앉았다. 곧 인숙의 아들인 진철이 사발면에 뜨거운 물을 받아 왔고, 인숙은 진열되어 있던 도시락을 가지고 왔다.
- 좀 먹고 기운 차려요. 따뜻한 국물도 마시고. 젊은 사람이 왜 그리 힘이 없어.
설아는 묵묵히 제 앞에 놓인 라면과 도시락을 바라보았다.
- 저한테, 왜 이러세요?
설아는 아직도 눈물이 젖은 눈을 들어 인숙을 바라보았다.
- 왜 이러긴. 걱정이 되니까 그러죠.
인숙이 따뜻한 눈으로 설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 누구나 말 못 할 사정이 있죠. 당분간 어려우면 여기서 계속 도시락을 먹어도 돼요. 사람이 살고 봐야지.
설이는 입술을 힘 있게 깨물었다.
내가 지금 절망의 벼랑 위에 서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내 눈빛만으로도 다 짐작이 가능한 걸까.
- 나도 그런 적 있어. 나도 아가씨처럼 젊을 때였어요. 의지할 데도 아무 데도 없고. 그냥 딱 죽고 싶었을 적이 있었지. 근데 쟤가 있어서 살았어요.
인숙은 눈으로 편의점 청소를 하는 아들을 가리켰다.
- 사니까 살아지더라고. 그 작았던 아이가 벌써 저만큼 컸어요. 벌써 대학생이야. 그래도 툭하면 저렇게 엄마 돕겠다고 여기 나와서 일해요. 기특한 애지.
설아는 다시 제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이 아이가 죽지 않고 살면, 저렇게 클 수 있을까. 엄마라고 말하고, 웃고, 돌아다니면서.
다시 울컥 눈물이 솟으려 했다.
저는 죄가 있었으나 아이는 아니었다. 자격 없는 엄마였지만 그래도 무너져서는 안 되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 아이 아빠는,
설아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의지할 데가 없다는 뜻은 아빠도 없다는 뜻일 텐데. 왜 난 눈치도 없이.
- 괜찮아요. 없어요. 처음부터 그랬어.
인숙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설아는 눈을 내려 그녀가 잡아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그래도 나도 살잖아. 아빠 없이 쟤 키우면서 뭐 좋은 일만 있었겠어요? 별말을 다 듣고 손가락질도 받았지. 그래도 후회 안 해요.
그때 진철이 인숙에게 다가왔다.
- 나 약속 있어서 나가 볼게요.
진철은 인숙에게 인사하고는 설아에게도 눈인사를 했다. 훤칠하게 큰아들. 저만큼 키워내는 것도 쉽지 않았겠지.
설아는 진철의 인사를 받으며 홀로 생각에 잠겼다.
- 저도, 실은.
그녀의 손이 다시 제 배로 향했다.
- 아이가 있어요.
인숙의 눈이 커졌다가 긴 꼬리를 끌며 휘어졌다.
- 그랬구나, 역시. 남 같지 않았어. 아, 그럼 이런 라면은 안 좋겠네. 바꿔줄게요.
인숙이 일어서려는 것을 설아가 막았다.
- 아니에요. 먹을게요. 저 지금 너무 배고파요. 며칠을 거의 굶어서요.
먹고 살게요. 그래서, 내 아이 나도 어떻게든 키워볼게요.
좋은 엄마가 될 자신은 없지만, 적어도 곁에 있어 주는 엄마가 될게요. 당신처럼.
설아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인숙도 마주 웃어주었다.
- 그래요. 잘 먹어야 해.
설아는 그날로 간직하고 있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원래 주인인 승준에게 보냈다. 그녀의 인생 2회차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
유민은 자신이 왜 신영을 때렸는지 말하지 않았다.
- 뭐 그냥 애들끼리 투닥거렸나 봐요. 나도 그때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심각한 건 아닌 거 같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윤성 엄마도 말을 안 해주려고 했다.
- 저는 나중에 유민이 봐서요. 죄송해요, 누나.
진철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설아는 고민 끝에 신영 엄마를 찾아가기로 했다. 어쨌든 신영을 때린 건 사실이니 사과도 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도 싶어서였다.
왜 유민이 그토록 그 이유를 감추려고 하는지도 궁금했고, 승준이 아무래도 그 일을 아는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인지도 알고 싶었다.
마침 어제 중요한 일 하나를 끝내서 오늘은 좀 늦게 출근해도 괜찮은 상황이었다. 그녀는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유민이 등원 후에 바로 신영 엄마의 집을 찾았다.
‘여기구나.’
신영 엄마의 집은 설아의 집 인근 고급 아파트였다. 신영 아버지가 무슨 사업을 한다고 하던데, 꽤 잘 사는 모양이었다.
설아는 괜히 위축되려고 하는 마음을 다스린 채 공동 현관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저, 유민이 엄마입니다.”
[아, 오셨구나. 들어오세요.]
미리 연락을 주었던지라, 신영 엄마는 바로 문을 열어 주었다.
“전화로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접 뵙고 사과드리고 싶어서요.”
신영 엄마는 설아가 내미는 과일 바구니를 보고 한쪽 눈썹을 찡긋했다. 가격이라도 가늠해 보듯이. 설아는 손이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눈꼬리와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설아는 신영 엄마와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그나마 엄마들 중에서 마당발인 윤성 엄마를 통해 신영 엄마와 말을 튼 정도였다.
“거기 두세요. 아줌마, 차 좀 내와요. 아, 그거 말고. 그냥 커피로 내와요.”
신영 엄마는 일하는 여자에게 눈짓했다. 여자는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고 얼른 찬장에서 다른 찻잔을 꺼냈다.
설아가 한눈에 보아도 처음 찻잔은 고급이었고, 두 번째는 그저 아무 데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부류였다.
“혹시 유민이가 얘기해요? 자기가 우리 신영이 때렸다고.”
신영 엄마의 말에 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전후 사정이 궁금하기도 해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왜요? 말 안 해요? 아니면 그 남자분한테 물으시던가. 유민이랑 잘 아는 사이 같던데.”
설아의 두 눈이 커졌다.
“남자분이라니.”
“유민이 보호자처럼 굴던 남자 있었는데. 마침 신영이 과외 시간도 다 되고 해서 그냥 왔지만요. 그 남자랑, 안 친한가 봐요?”
진철이라면 신영 엄마도 모를 리가 없었기에, 그녀가 말하는 남자란 승준이 맞는 것 같았다.
정말로 승준이 그 자리에 있었구나. 설아는 제 예감이 맞았음을 깨닫고 어색하게 웃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모르다니. 유민이도 아주 잘 알고 있었던 남자인데 유민이 엄마가 모른다고? 거짓말하지 마요.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이러다가는 궁금한 것은 묻지도 못하고 엉뚱한 의심만 받을 것 같아서, 얼른 설아는 말을 돌렸다.
“제가 그 남자를 알면 말씀대로 그 남자한테 전후 사정을 물어봤겠죠. 모르니까 이렇게 신영 어머님을 찾아온 것 아니겠어요.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요?”
신영 엄마는 그래도 의심이 가시지 않는다는 눈으로 설아를 보다가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게, 평소 애 교육 좀 잘 시키세요. 그렇게 다른 애들 때리고 다니면 나중에 초등학교 적응도 잘 못 해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설아는 순간 격한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애써 참고 답했다.
“유민이가 평소 그런 행실을 보이던 아이는 아니었어요. 유치원에서도 그런 피드백을 받은 적은 없고요. 그래서 저도 상황이 궁금한 겁니다.”
“하, 그런데 우리 신영이 때렸잖아. 때려놓고 뭐, 원래 그런 애 아니라고 하면 때린 게 어디 가나요? 그러니까 이번에 단단히 교육해서 다신 이런 일 없게 해요. 안 그래도 유치원 엄마들이 그 동네 아이들이랑 어울리는 거 싫어하는데.”
신영 엄마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나 설아는 이미 속이 뒤집어진 후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설아의 형형한 눈빛을 본 신영 엄마가 천천히 손을 입에서 떼었다.
“그렇잖아요. 내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엄마들이 그래요. 그 동네 아이들, 우리 아파트 아이들이랑 같은 유치원 다니는 거 솔직히 거북해하는 엄마들 많아요.”
설아의 동네라는 것은 신영의 고급 아파트와는 반대편에 있는 단독주택과 빌라들이 밀집한 지역을 말하는 것이었다.
인접해 있지만 땅값은 천지 차이라, 설아는 아파트 쪽만 보아도 괜히 위축이 되었다.
“물론 이런 말이 기분이 좋지는 않으실 거지만, 저는 유민 엄마 위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저야 신영이 맞은 거 그냥 넘어가 드릴 거지만, 어떤 엄마는 사는 지역까지 들먹이면서 유민 엄마 괴롭힐 수도 있어요. 그러면 유민 엄마 거기서 못 살아요. 이사 가야 해.”
신영 엄마는 한 다리를 꼰 채 고개를 들고 설아를 내려다보았다.
설아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가방을 그러쥔 채, 설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민이가 신영이 때린 건 사과드릴게요. 하지만, 사는 지역 들먹이면서 그렇게는 말씀 안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희가 부끄러운 짓을 한 것도 아니고요.”
부들부들 떨리는 아랫입술을 쥐어뜯듯이 물었다.
그래도 볼이 파르르 움직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내가 부끄러운 짓 했다고 했나요. 그리고 내가 그런 말 했다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엄마들이 그렇다고요. 조심해서 나쁠 거 없잖아요?”
신영 엄마는 눈웃음을 쳤다.
“그리고 남자는 좀 조심해야겠더라. 나 깜빡 속았잖아. 그럼 유민 엄마랑 그 남자랑은 아무 관계 없는 거죠?”
설아는 더 말할 전의를 상실한 채 몸을 돌렸다.
애초에 이곳에 오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취급을 받을 줄 알았다면.
“그만 가 보겠습니다. 제가 괜한 발걸음을 한 것 같네요.”
문을 닫고 나오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유민이를 그 유치원에 계속 보내는 것이 옳을까. 엄마들이 그러면 아이들도 마찬가지일 텐데. 조금 먼 곳으로 옮겨야 하나.
이제는 상황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저런 엄마 밑에서 자란 아이가 유민을 어떻게 대했을 지는 뻔히 예상할 수 있기에.
아픈 머리를 한 채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제 자리에 놓인 서류를 보았다. 얼마 전에 희선이 설아에게 맡겼던, JK식품에 보낼 서류였다.
설아가 거절하는 바람에 다른 직원의 손에서 마무리가 된 서류였다. 그런데 이게 왜.
마침 전화가 울렸다.
“희선이가 갑자기 몸살이 났다고 해서 하루 쉬라고 했어. 외근 좀 다녀오지. 오늘까지 심사라서.”
설아를 사장실로 호출한 문 사장이 한쪽 손을 바지에 찔러넣은 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