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없으면 만들면 되지
1화 없으면 만들면 되지
“하아.” 내 입에서 새어 나온 깊은 한숨 소리에, 맞은편에서 서류를 넘기던 펜촉이 우뚝 멈췄다. 천장까지 닿을 듯 빽빽하게 꽂힌 양피지 두루마리들. 그 사이를 부유하는 푸른 마나의 광원들이 넓은 책상 위를 비추고 있었다. 내 눈앞에는 미처 결재를 끝내지 못한 서류 더미가 산더미처럼 솟아 있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제국 행정부의 최고 책임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제국의 재상. 『이안 클레베르』 그게 지금의 내 직함과 이름이다. “존나 심심해.”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늘어졌다. 재상실 수석 비서관인 실비아가 깃펜을 내려놓더니 안경을 치켜올렸다. “언제까지 그런 경박한 단어를 입에 담으실 겁니까, 재상 각하? 자각을 좀 하십쇼.” 나는 실비아를 바라보며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치만… 심심해. 심심해서 미쳐버릴 것 같다고.” “표정을 좀 똑바로… 아니, 재상 각하. 백 년 넘게 이어진 마족과의 전쟁이 끝난 후 이제 겨우 숨을 고르고 있는 시기입니다. 제국 전체가 전후 복구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만.” “그러니까 문제지.” 나는 짚고 있던 책상을 밀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차라리 전쟁할 때가 나았어. 매일 전선 시찰 나가고, 마수 대가리 깨부수고, 보급로 뚫고. 몸과 마음은 고달파도 지루할 틈은 단 1초도 없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손가락으로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뭉치를 툭툭 쳤다. “북부 영지 구호품 횡령 사건 조사, 귀족 영애들 다과회 드레스 코드 규정 개정안, 수도 하수도 정비 예산안. 이게 제국 재상인 내가 할 일이야? 이런 건 아래에서 처리해도 되잖아!!” “선황제 폐하의 유지를 받들어 제국 2인자 자리를 스스로 수락하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 전부 책임자의 결재가 없으면 시행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하아… 염병….” 선황제의 유지. 그 단어에 나는 입을 다물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을 바라보는 시선 끝이 한없이 공허해졌다. 나는 본래 지구라는 곳에서 평범한 대학생으로 살았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판타지 세계에 떨어졌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마법을 익혔고 재능을 꽃피웠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을 뒹굴며 끝내 백 년 전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선황제는 나의 친구이자, 훌륭한 군주였다. 나이 차이는 제법 났지만…. 황제는 언제나 전장의 최전선에서 나와 함께 피를 흘리며 제국을 지탱했다. 그가 마지막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숨을 거두기 직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내 손을 꽉 잡고 남긴 약속이 있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다오, 이안. 그러면 제국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라도, 네 소원 한 가지를 반드시 들어주마, 친구여.] 그렇게 선황제는 세상을 떠났고, 그의 뜻대로 분노한 나를 중심으로 제국은 승리했다. 내 소원은 단 하나, 지구로의 귀환이었다. 마왕의 심장을 꿰뚫고 전쟁을 끝낸 직후, 나는 황실과 마탑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 차원 이동진을 구성하려 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차원을 넘어 이세계로 사람을 불러오는 것은 우연과 기적이 겹쳐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역으로 정확한 좌표를 잡아 원래의 세계로 돌려보내는 마법은 이 대륙의 마법 이론으로는 불가능했다.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지구로 돌아가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 컵라면에 물을 올려 스마트폰을 보며 뒹굴거리려던 소박한 꿈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났다. 선황제의 뒤를 이은 것은 이제 고작 다섯 살이 된 어린 황태자였다. 핏덩이나 다름없는 어린 황제가 무너져 가는 거대한 제국을 온전히 수습할 수는 없는 노릇. 옥좌에 앉은 꼬마는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대성통곡했다. 제발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결국 돌아갈 방법도 없는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섭정을 위해 제국의 재상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귀환이라는 뚜렷한 과제가 사라지자, 남은 것은 지독한 권태와 허무함뿐이었다. ‘너튜브 마렵다. 아니, TV라도….’ 도파민이 팡팡 터지는 숏폼 콘텐츠. 욕하면서도 챙겨보는 매운맛 아침 드라마. 아무것도 없는 산골에 던져 놓고 살아남으라고 하는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 등등. 방구석에 누워 배달음식을 시켜 무수한 콘텐츠를 찾아보던 지구에서의 평범한 일상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이곳의 유흥은 참담할 정도로 빈약했으니까. 자극이 부족했다. 도파민이 말라붙어 뇌가 썩어 가는 기분이었다. “실비아.” “네, 재상 각하.” “사람들이 무도회에서 대체 무슨 재미로 놀지?” “보통 춤을 추고, 파벌을 나누어 술이나 차를 마시며, 은밀하게 뒷담화도 하죠.” 뒷담화가 그들의 가장 큰 유흥이라는 소리다. “지루해. 현학적이야. 평민들은?” “뒷골목에서 투견을 보거나 주사위 도박을 합니다.” “그나마 그게 나은데 그것도 별로야.” 나는 팔짱을 끼고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결심했다. “그래, 볼거리가 없으면….” “예?” “내가 직접 만들면 되잖아?” 권태로 죽어 가던 내 눈동자에 모처럼 생기가 번졌다. 실비아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또… 또 무슨 짓을 벌이시려고…!!” “재미있는 걸 만들려고 해.” 그 한마디와 함께, 제국의 역사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틀어지기 시작했다. 이왕 평생 여기서 살아야 사는 거, 역사책에 남을만한 인물이 되어 주마. *** 그리고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제국의 풍경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꼬맹이 황제도 이제 열 살이 되었고. 음, 짜식이 아버지 닮아서 이제야 귀티가 좔좔 흐르며 인물이 난다. 무엇보다 남자도 홀릴 만큼 귀엽고 잘생겨졌다. 수도 중앙 광장. 과거 황실의 정원으로 쓰이던 넓은 부지 위에는, 지금껏 대륙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웅장한 건축물이 우뚝 솟아 있었다. 지구의 현대적인 마천루를 연상시키는 뾰족한 마나 첨탑. 건물 정면에는 거대한 황금빛으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제국 마법 방송국(IBS)] 그 거대한 건물 최상층. 탁 트인 창문 너머로 수도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완벽해.” 지난 5년은 피와 땀, 그리고 자본을 물 쓰듯 쏟아부은 시간이었다. 사실, 모든 것을 완전한 밑바닥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었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기반을 닦아 둔 것은 다름 아닌 나와 선황제였다. 그는 살아생전 광활한 제국을 하나로 묶고 통솔하는 방식에 관심이 많았다. ‘방송을 통한 연설’. 그것이 내가 제안했고 선황제가 수락했던 통치 인프라였다. 수도의 황궁에서 황제가 마이크 역할을 하는 마도구에 대고 말을 하면, 제국 전역의 광장에 설치된 수신탑을 통해 음성이 퍼져 나가는 시스템. 그 원대한 계획을 위해 선황제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대륙 지하 곳곳에 마나 케이블의 뼈대를 심어 두었다. 나는 그 유산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음성만 전달하던 수신 시스템을, 영상을 실시간으로 송출하고 수신하는 통신망으로 전면 개편했다. 북부 산맥의 드워프 장인들과 마탑의 정예 마법사들을 번갈아 갈아 넣으며 5년 내내 땅을 파고 거점을 세웠다. 동시에 텔레비전 역할을 하는 ‘마도 디스플레이’ 보급에 열을 올렸다. 귀족들에게는 고급스러운 프레임을 씌워 각 가문의 문장을 새겨 고가에 팔아넘겼다. ‘이 마도구가 없으면 사교계의 흐름에 뒤처진다’는 소문을 은밀히 퍼뜨리자, 귀족들은 앞다투어 단말기를 사들였다. 평민들에게는 제국 긴급 재난 알림용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국가 예산으로 광장, 여관, 마을 회관마다 대형 단말기를 무상으로 설치해 주었다. 열 살이 된 어린 현 황제는 이 거대한 장난감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황궁에 설치된 벽면만 한 디스플레이를 보며, 대체 언제 자신이 저 화면에 나와 백성들에게 손을 흔들 수 있냐며 매일같이 재상실로 전령을 보낼 정도였다. 그야말로 국가적 대공사였다. 그렇게 5년의 세월 끝에 대제국 전역이 단 하나의 거대한 마나 통신망으로 연결되었다. 수도의 화려한 저택에 사는 대귀족부터, 눈보라 치는 북부 변방 마을의 평범한 농부까지. 내가 중앙 통제실의 스위치만 올리면 수천만 명의 인구가 동시에 같은 영상을 볼 수 있는 압도적인 인프라가 완성된 것이다. 해냈다, 시발… 내가 해냈다고!! 똑똑— 집무실 문이 열리고, 눈 밑이 퀭하게 다크서클이 내려온 실비아가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지난 5년간 재상실 수석 비서관이자 공사장 현장 소장, 노조 협상가 역할을 겸하며 완전히 반쪽이 되어 있었다. “재상 각하. 개새… 아니, 재상 각하.” 아, 과도한 노동 때문에 혼자 있을 때 내 욕을 하는 버릇이 생겨서 저렇다. 그리고 나는 그게 전혀 상관없다. 그만큼 실비아는 없어서는 안 될 엄청난 인재였으니까. “편하게 개새끼라고 불러. 넌 그럴 자격이 있다. 상황 보고해.” 실비아가 이를 악물며 품에 안고 있던 양피지 차트를 넘겼다. “후우… 제국 내 87개 주요 영지와 300여 개의 소도시 광장에 단말기 설치를 완료했습니다. 귀족가 개인 보급률은 98%에 달합니다. 어제 자정 기준, 최종 송출 테스트 결과 대륙 끝자락에서도 지연율 3초 미만을 기록했습니다.” 음, 3초. 그 정도면 지구에 있는 광케이블과 별반 다르지 않는 속도였다. “마도 카메라 세팅은?” “고화질 다각도 촬영이 가능한 최신형 영상 기록 마도구 스무 대를 1번 스튜디오 내부에 배치 완료했습니다. 음성 집음 마도구 역시 결함 없이 작동합니다.” “수고했어, 실비아. 폐하의 반응은?” “오늘 아침에도 전령을 보내 언제 첫 방송이 송출되냐고 독촉하셨습니다. 황실 연회장에 손님들을 모아놓고 대기 중이십니다.” 나는 창틀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기계는 완벽하다. 시스템도 흠잡을 데 없다. 대륙 역사상 유례없는 초대형 정보망이 내 손끝에서 통제될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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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것은 스위치를 올리는 것뿐이다. “그런데 개새… 아니, 국장님.” 실비아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인프라도 다 깔렸고, 수신기 보급도 끝났습니다. 기술적인 결함도 없습니다. 다 좋습니다만.” “말해봐.”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실 작정이십니까? 설마 국장님께서 집무실에서 서류에 서명하는 모습을 대륙에 생중계하실 건 아니겠지요?” “응, 아닌데? 실비아 일하는 모습 송출할 건데? 미리 축하해, 대륙의 인기인. 실비아는 예뻐서 인기가 많을 거야.” “……!” 실비아가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보였다. “야, 이 개새….” 나는 잽싸게 말을 잘랐다. “농담이야.” “그럴 줄 알았습니다.” 반응이 이런데 어떻게 안 놀려? 지난 5년 동안 나는 방송 인프라 구축에 반, 실비아를 놀리는 것에 반을 인생에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실비아에게 말했다. “다 생각이 있지.” “…뭐… 그러시겠죠.” “그건 차차 이야기하자고. 일단은 첫 방송은 당연히 황제 폐하의 연설이 제격이겠지. 준비는 됐지?” 그러자 실비아의 눈빛이 변했다. “네,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쇼.”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랜 시간 준비한 나의 최초의 공식 방송. 일명 ‘쇼타 황제와 함께하는 귀여움 뿜뿜 훈화 시간.’ 열 살 남짓한 황제의 엄청난 미모와 귀여움을 생각했을 때…. 이건 대박이 날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