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인터뷰 (2).
5화 인터뷰 (2).
인터뷰는 차례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내가 고위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몇 달은 더 걸렸을 테지. 공간 이동의 쿨타임은 하루. 나는 하루에 한 명씩 출연자들을 찾아가 꽤나 알찬 사전 인터뷰를 나누었다. 일단 남자부터. [남자 2호 : 데릭칸 / 28세 / 정보 길드장 겸 암흑가 보스, 카지노 및 유흥업체 다수 보유. 평민.] “정말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말씀이시죠?” “그럼. 규칙만 잘 지키면 어떻게든 해도 된다.” “하하, 이거 기대가 되는군요. 그런 거 제 전문인데요? 다들 제 손바닥 위에서 놀게 될 겁니다.” “그래. 어디 한번 잘 가지고 놀아봐. 기대할게.” [남자 3호 : 루카스 데이룬 / 25세 / 몰락 백작가의 장남. 현 황도 경비대 소속 경비대장. 귀족.] “연애 프로그램이요…?” “어. 너도 결혼은 해야지. 그래야 가문도 되살리고 하지 않겠냐?” “제게 맞는 여자 분이 계실까요?” “걱정마라, 분명 있을테니까.” [남자 4호 : 드렉슬러 / 21세 / 제국 최대 상단 ‘이카루스’의 장남. 평민.] “아무리 그래도 출연료가 너무 적은 거 아닙니까? 적어도 이거 다섯 배는 되어야 제가 나갈 만한….” “이카루스와의 거래량을 절반으로 줄인다.” “……. 아주 합리적인 출연료 같습니다.” “방금 전까지 적다며.” “제가 이 프로그램의 가치를 잘못 판단한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재상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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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5호 : 에드가 루스펜서/ 27세 / 제국 최대 마도 공방 ‘헤파이토스’ 수석 연구원. 귀족.] “카메라 마도구의 영상 송출 지연율이 3초 미만이라니, 그건 이론상… 잠깐, 렌즈의 마나 굴절률은 어떻게 잡으셨습니까? 이 회로의 배열은 누가 생각한 거죠?” “그건 합숙소에 오면 직접 뜯어보게 해줄게. 최종 커플까지하면 설계도를 주지.” “약속 지키셔야 합니다.” “……그래, 공돌아.” 개성 넘치는 녀석들. 다음은 여자 차례였다. [여자 2호 : 세리아 / 25세 / A급 용병. 평민.] “보수만 빵빵하면 뭐든 까라면 깝니다. 근데 연애? 거, 굳이 선택 안 해도 되는 거죠? 사람 마음이라는 게 움직이지 않으면 열심히 안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뭐 그래도 좋은데, 커플 성공 시 꽤 큰 상금이 있다.” “어, 엄청나잖아요!? 바, 반드시 최종 커플이 되겠습니다!” [여자 3호 : 비비안 / 22세 / 신흥 거대 상단 '라비에르' 상단주의 딸. 평민.] “방송이라는 거, 결국 누가 화면에 더 많이 나오냐의 싸움이잖아요? 국장님, 제 옷에 저희 상단 로고 좀 박아주시면 안 될까요?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해드릴게요.” “광고국장 실비아 찾아가서 정식으로 초당 단가표 받아와라. 꼼수는 안 통한다.” “칫, 깐깐하시긴. 뭐 좋아요. 고위 귀족도 나온다고 그랬죠?” “가서 부딪혀 보면 알겠지?” “후후, 나온다는 소리네요? 고위 귀족 하나 물어서 판로를 트면…. 열심히 해야겠네요!” [여자 4호 : 클로에 예리트 / 20세 / 천재 마법사, 은둔형 외톨이. 귀족.] “사람 많은 곳… 싫은데… 저 꼭 가야 하나요…?” “안 나오면 네 연구실 예산 삭감하고 방 뺀다.” “히익! 갈게요… 가요… 하, 하지만… 남성분들과 이야기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최종 커플 달성 시 연구비 지원과 상급 마석을 지원해주지. 아마 평생 연구 걱정은 없을 거다.” “저, 정말요!?” [여자 5호 : 세실리아 오데인/ 23세 / 백작가 영애, 로맨스 소설 광팬. 귀족.] “진짜 소설처럼 운명적인 사랑이 그곳에 있을까요? 저를 두고 남자 두분이 결투를 벌이는 그런 로맨스요!!” “어, 그래……. 의욕이 충만하니 보기 좋네. 웬만하면 싸움은 시키지마….” “아아…! 나의 운명의 상대가 거기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너 하는 거에 따라 달라질 거야. 아마 재미없진 않을 거다.” 그리고 마지막. 아론과 비견되는 마지막 인터뷰 상대. 『로잘린 아르젠트』 제국 최고의 대귀족인 공작가의 적장녀이자, <제국 남녀> 여자 1호. 전 공작께서 오냐오냐 키웠다가 악역 영애 같은 성격을 지니게 된 몹쓸 녀석이다. 하지만, 뭐. 본인 스스로는 악의가 없다랄까? 이번 제국 남녀의 가장 기대되는 빌런이기도 하고. 뭐, 아직 자격이 되지 않아 공작위를 완전이 물려 받지는 못했다.공작 정도 되면, 심사가 깐깐 하거든. 로잘린이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아저씨도 아시겠지만, 침구는 무조건 남부에서 직조한 최고급 실크로 부탁해요. 면 방직물은 피부에 닿기만 해도 발진이 생기거든요. 아, 그리고 아침에 마실 물은 동부 산맥의 암반수여야 합니다. 그 외의 물은 비린내가 나서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으니.” 그녀의 입에서 쏟아지는 오만방자한 요구 사항들은 끝이 없었다. 나는 허공에 띄운 마도 카메라의 각도를 미세하게 조절하며 턱을 괴었다. “식사는 당연히 황실 수석 셰프급이 준비하겠죠? 평민들이나 먹는 퍽퍽한 빵 조각을 씹게 만들진 않을 거라 믿어요. 저는 식재료의 원산지까지 꼼꼼히 따지는 편이거든요.” 부채로 입가를 가린 로잘린의 눈빛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자신이 저택에 들어가서도 지금처럼 완벽한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확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원산지 따지는 거 중요하고말고.” 네가 직접 요리 해서 먹어야 한다는 사실만 빼면 말이지. 나는 애써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터무니없는 요구들을 양피지에 적는 시늉을 했다. 시청자들의 얄미움을 독차지할 완벽한 빌런. “알지? 최종 커플이 되지 못하면 공작가에 주어지던 독점권을 회수할 거야.” “원래 진작 뱉었어야 하는 이권이지만 이렇게 기회를 주신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죠. 후후후, 아저씨도 짓궂으시네요. 다른 귀족의 반발을 누르려고 굳이 이런 귀찮은 과정을 거치시다니.” “뭐, 벌써 커플이 될 것처럼 말한다?” “어머? 아저씨도? 저 로잘린 아르젠트랍니다? 감히 저한테 안 넘어오는 남자가 있을 것 같아요?” 음, 그래. 그렇게만 해다오, 로잘린. 기대한다. 그렇게 길고 길었던 모든 인터뷰를 끝냈다. 역시나 사람은 재밌다. 모두가 각자의 뚜렷한 개성과 목적을 품고 있었다. “후우.” 나는 수도 외곽의 한적한 숲길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카메라 마도구를 거두어들였다. 양피지에 적힌 열 명의 명단을 훑어보며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이제야 인터뷰가 다 끝났나. 기획부터 섭외까지… 프로그램을 직접 만드는 과정도 꽤나 재밌는걸?’ 방송국장으로서의 첫 외근은 대성공이었다. 어깨 결림을 풀며 목을 꺾던 나는 문득 멈춰 섰다. 저 멀리 산등성이 아래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촌락의 연기가 보였다. ‘흠. 오랜만에 나왔는데, 암행 시찰이나 좀 다닐까?’ 나는 단순히 방송에 미친 놈이 아니다. 본업은 이 제국의 행정과 살림살이를 총괄하는 재상이다. 국민들이 어떤 밥을 먹고, 어떤 옷을 입고, 내가 내린 정책들이 일선에서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 또한 내 본연의 임무 중 하나였다. 나는 손가락을 튕겨 가벼운 인식 저해 마법을 몸에 둘렀다. 화려한 재상의 제복이 평범한 리넨 셔츠와 낡은 가죽 조끼로 변했다. 짐을 짊어지고 대륙을 떠도는 평범한 방랑 상인의 행색이었다. 나는 흙먼지가 날리는 길을 따라 산 아래의 시골 마을로 걸음을 옮겼다. ***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왁자지껄한 소음과 활기찬 기운이 훅 끼쳐왔다. 캉캉캉캉캉—! 망치질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지고, 흙길 위로는 짐수레를 끄는 소들의 방울 소리가 울렸다. 무너졌던 돌담이 반듯하게 쌓여 있었고, 밭에서는 사람들이 허리를 굽혀 부지런히 씨앗을 심고 있었다. 마을 광장 중앙에는 내가 3년 전 하달했던 깃발이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다시 세우는 제국의 영광!]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모티브로 삼아, 백년전쟁 직후 내가 미친 듯이 밀어붙였던 ‘새제국 운동’의 표어였다. 국가에서 종자와 농기구를 지원하고, 스스로 일어나는 마을에는 인센티브를 주어 경쟁을 붙였던 정책. 효과는 굉장했다. 처음에는 전쟁의 참상에 빠져 무기력하게 실의에 빠져 있던 평민들도, 눈앞에 떨어지는 성과를 보자 눈빛이 달라졌다. 지금 이 시골 마을 사람들은 패배감이나 절망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그들은 살기 위해, 아니 더 잘 살기 위해 진심으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주 좋아. 새제국 운동 덕에 이런 변방의 시골 마을까지 활기가 넘쳐흐르잖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군.’ 전쟁은 상처를 남겼지만, 사람들은 어찌어찌 살아간다. 희망이라는 비료를 주니 무럭무럭 자라난다. 이게 바로 인간의 의지였다. 인간으로서, 재상으로서의 뿌듯함이 가슴을 채웠다. 내가 밤을 새워가며 서류에 결재 도장을 찍었던 보람이 눈앞의 풍경으로 증명되고 있었다. 꼬르륵— 그러고 보니 오늘 아무것도 안 먹었네. 나는 마을 한가운데 가장 크고 붐비는 여관 겸 식당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끼익— “어서 오세요! 빈자리 아무 데나 앉으시면 됩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훅 끼쳐오는 고기 굽는 냄새와 구수한 스튜 향기. 식당 내부는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마을에서 일하는 장정들과 상인들이 죄다 이곳으로 몰려든 것 같았다. 나는 구석의 빈 테이블에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아 식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 많은 인원을 여관 주인이 어떻게 다 감당하나 싶었는데, 내 시선이 한곳에 머무는 순간 그 의문은 사라졌다. ‘뭐야, 저 녀석은?’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앞치마를 두르고 쟁반을 나르고 있는 한 여자아이였다. “톰 아저씨! 여기 주문하신 구운 감자랑 맥주 두 잔이요! 오늘 밭일하시느라 허리 아프실 텐데 맥주는 서비스로 더 꽉꽉 채웠어요!” “하하하! 역시 우리 마리밖에 없다니까!” 그녀는 양손에 무거운 나무 쟁반을 들고 식당 안을 나비처럼 날아다니고 있었다. “힐다 아주머니! 오늘 스튜는 평소보다 소금 덜 넣고 푹 끓였어요. 저번 주에 속 안 좋으시다고 했잖아요. 천천히 드세요!” “어머나,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고맙다, 마리.” 이제 고작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화려한 장신구 하나 없이 질끈 묶은 갈색 머리. 수수한 리넨 옷에 때 묻은 앞치마. 하지만 그런 볼품없는 차림새로도 가려지지 않는 엄청난 미모였다. 단순히 얼굴이 예쁜 것을 넘어, 뿜어져 나오는 분위 자체가 달랐다. 밀려드는 주문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쳐내는 군더더기 없는 일 처리 능력. 식기들이 달그락거리는 소음 속에서도 마을 사람들의 이름과 취향을 하나하나 기억해 맞춤형으로 음식을 내어놓는 섬세함. 뜨거운 스튜 냄비를 탁탁 내려놓는 품새에서는, 식당을 운영해 본 살림 만렙 고인물의 내공이 엿보였다. 싸구려 맥주잔을 나르고 땀을 닦는 그 거친 동작 속에서, 묘하게 흐트러지지 않는 올곧은 기품마저 배어 있었다. ‘어쩐지. 이렇게 여관이 미어터지게 붐비는 이유가 따로 있었군.’ 마을 장정들의 시선은 온통 그녀의 싹싹한 미소에 쏠려 있었다. 나는 턱을 괸 채 그녀의 동선을 유심히 관찰했다. 공작 영애 로잘린처럼 오만하지도, 상단주 딸 비비안처럼 약삭빠르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하고 성실하게,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가 온몸에서 배어 나왔다. 쿵—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예능 PD로서의 촉이 미친 듯이 경보를 울리기 시작했다. ‘출연자는 10명으로 끝내려고 했건만……’ 완벽하게 세팅된 판이었다. 화려하고, 가식적이고, 목적이 뚜렷한 남녀 열 명. 하지만 만약, 저렇게 맑고 단단한 원석을 그 진흙탕 같은 세트장 한가운데에 툭 던져놓는다면? 사람을 의심하고 경계하는 데 익숙한 귀족들이나 상단후계자들이 조건 없는 호의와 진심을 건네는 저 미소에 흔들리기 시작한다면? “미쳤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탄성이 튀어나왔다. 연애 프로그램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버릴,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변수 창출녀. 아무리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 없었던 마지막 마스터 피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양손에 빈 그릇을 가득 들고 주방으로 향하던 소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기.” 내 부름에 소녀가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맑고 투명한 갈색 눈동자였다. “네, 손님! 주문하시겠어요? 처음 오신 분이신가 보네요? 오늘 사슴 고기 스튜가 아주 맛있게 끓여졌는데. 그걸 추천드릴게요!” 직접 대화해 보니 촉이 왔다. 이 녀석은 내가 찾던 마스터 피스가 맞다. 반드시 출연해야 한다. “혹시 인터뷰 가능하실까요?” 이번 제국 남녀는 6대 6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