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머뭇거리기에는 청춘은 너무도 짧다.
6화 머뭇거리기에는 청춘은 너무도 짧다.
“네!? 인터뷰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이 좋아지는 맑고 싹싹하고 기운찬 목소리. “스튜 말고. 난 제국 마법 방송국에서 나온 기자인데,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를 취재하고 있거든. 괜찮다면 너랑 인터뷰 좀 하고 싶은데.” 물론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방송국에서 내보내는 뉴스의 굵직한 소스들은 전부 내 경험이나 재상실에서 나오는 중이었으니까, 넓게 보면 나도 기자나 다름없다. 내 입에서 나온 ‘방송국’이라는 단어에 마리의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어? 설마 그 마도 방송의 기자님이세요?” “맞아.” “우와—!” 마리의 시선이 내 허름한 행색을 한 번, 그리고 내가 허공에 살짝 띄워 보여준 소형 카메라 마도구를 한 번 번갈아 보며 경탄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식당 한쪽에서 그녀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리! 여기 맥주 두 잔 추가!” 마리는 흠칫 놀라며 내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지, 지금은 보시다시피 제가 너무 바빠서요! 혹시 저녁에 영업 끝나고 나중에 할 수 있을까요!?”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웃었다. “얼마든지, 인터뷰 때문에 본업에 소홀할 수는 없지.” “감사합니다!” 어차피 오늘 일정은 텅텅 비어 있었다. 이 원석을 캐낼 수만 있다면 몇 시간 정도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나는 구석 자리에 앉아 튀김과 맥주를 홀짝이며 저녁 영업이 끝날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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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당의 램프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 시끌벅적하던 손님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늦은 밤. 여관 식당에는 이제 나혼자만 남아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곁에는 웬 체격 좋은 중년 사내가 험악한 표정을 짓고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아, 아빠! 나 혼자 할 수 있다니까!” “기자라는 말을 어떻게 덥석 믿어! 요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험한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네가 알아?” 마리가 옆에서 발을 동동 굴렀지만, 여관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잔뜩 경계하는 눈치였다. 마리가 내 앞으로 다가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보시다시피…… 저희 아버지가 좀 과보호가 심하셔서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렇게 예쁘고 똑 부러지는 딸이 있으면 아버지가 걱정할 만도 하죠.” 내 능청스러운 대답에 아버지는 콧방귀를 뀌었다. “허튼소리 마쇼. 제국 방송국 기자라면 신분증 같은 거라도 있을 거 아니오? 그거 먼저 확인합시다.” 신분증이라. 생각해 보니 기자 신분을 증명할 만한 명찰 같은 건 챙겨오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방송국장인데 그런 자질구레한 물건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라는 사람을 증명할 방법은 그것보다 훨씬 확실한 것이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파앗― 몸을 감싸고 있던 인식 저해 마법과 환영마법이 깨지며, 평범한 갈색 머리와 촌스러운 이목구비가 순식간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밤하늘처럼 새카만 머리카락. 그리고 한국인 특유의 검은 눈동자. 대륙을 뒤져도 흔하지 않은 색이기에, 이제는 제국 재상의 상징이 되어버린 색. 거기에 더해 허름한 가죽 조끼는 어느새 은빛 자수가 정교하게 수놓아진 고급 흑색 제복으로 변해 있었다. “……!” 순식간에 벌어진 비현실적인 광경에 두 부녀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자, 잠깐…….” 여관 주인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난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 시골 촌구석의 여관 주인조차도 그 특징을 모를 수가 없었다. “재, 재상 각하!?” 마리의 아버지는 헛바람을 들이켜며 그대로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마리 역시 놀라 굳어버린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맞습니다. 속이려던 건 아니고, 시찰 중이라 눈에 띄기 곤란해서 그랬습니다. 미안합니다. 내가 꼭 따님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요.” 내 부드러운 목소리에 여관 주인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다급하게 외쳤다. “그, 그럼요! 당연하죠! 영광입니다, 각하! 저희 딸년이 각하의 귀한 시간을 빼앗다니요!” “시간을 뺏긴 게 아니라 내가 기다린 겁니다. 괜찮을까요?”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 마리의 등을 내 쪽으로 꾹 밀었다. “당연합죠! 천 번 만 번 나누십시오! 저는 저기 멀리서 귀를 막고 서 있겠습니다!” 여전히 긴장한 듯 두 손을 무릎 위에 꽉 쥐고 있는 마리를 보며, 나는 섣부르게 방송 출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가벼운 질문으로 말문을 열었다. “일을 하는게 아주 능숙하더구나, 주변사람들을 활기차게 만드는 그런 능력은 흔한게 아니지.” 마리는 내 칭찬에 귀 뒤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얼굴을 붉혔다. “과, 과찬이십니다.” 첫인사는 칭찬으로 시작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나는 본격적인 운을 떼기 시작했다. “그래서 몇 살?” “스, 스무살이요.”조금 어리지만 딱 좋은 나이다. “꿈이 있느냐?” “네? 꾸, 꿈이요?” “그래, 꿈. 앞으로 하고 싶은 목표 같은게 있을 거 아니냐.” “어, 어떻게 아셨어요?” “네 눈을 보면 알지, 그건 목표가 있는 사람의 눈이다.” “…….” 그러자 잔뜩 굳어 있던 소녀의 눈동자에 맑은 빛이 돌기 시작했다. “저… 저는… 세, 세상을 보고 싶어요!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넓은 곳으로 가보고 싶어요.” “하하, 여행이라 좋은 꿈이지. 그래, 가장 가고 싶은 곳은 어디더냐?” 소녀는 언제 부끄러워 했냐는 듯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황도요! 황도에 그렇게 신기하고 볼거리가 많다면서요? 마차도 말없이 마법으로 굴러가고, 밤에도 낮처럼 환하다고 들었어요. 물론… 각하께서 만드신 그 방송국도 꼭 한번 가보고 싶고요!” 소녀의 목소리에는 바깥세상을 향한 순수한 동경이 묻어났다. “그리고 또?” “으음… 또라고 하시면….” 마리는 옆에서 우리의 이아기를 훔쳐듣고 있는 아버지를 슬쩍 쳐다보며 눈치를 보았다. 아니, 아버님? 멀리 가 계신다며? 효심이 깊고 책임감이 강해서, 자신이 훌쩍 떠나버리면 남겨질 부모님과 여관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었다. 나는 품을 뒤져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저기 마리 아버님?” “예?” 그리고 그 안에서 번쩍이는 금화 한 닢을 꺼내 아버지 쪽으로 던지듯 튕겨 보냈다. 포물선을 그린 금화가 아버지의 손안에 툭 떨어졌다. “이건 귀중한 시간을 써서 인터뷰에 응해준 비용일세.” 이 세계의 화폐 단위는 크리마. 내가 방금 던진 저 금화는 황실 중앙은행에서 주조한 순금 주화였다. 어디서나 통용되는 값진 귀금속이자, 한 닢에 천만 크리마에 달하는 거액. 금화를 눈앞으로 들어올린 마리아버지의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이, 이건! 너, 너무 많습니다, 각하! 고, 고작 인터뷰 한 번에 천만 크리마라니요!!” 마리 아버지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나는 빙긋 웃으며 제지했다. “넣어두게. 지금까지 땀 흘려 열심히 살아온 사람에게 주는 행운이라고 생각해. 대신, 우리끼리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눌 테니 자리 좀 완전히 비켜주지 않겠나?” “아, 아무렴요! 감사합니다!! 여신의 축복이 각하와 함께하시길!!” 아버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여관 밖으로 사라졌다. 천만 크리마면 당분간 돈걱정은 없겠지, 금융치료는 언제나 확실한 법이다. “자, 우리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방해꾼이 사라진 조용한 여관, 나는 다시 마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또 해보고 싶은 게 없냐고 물으셨어요.” “그래, 또 해보고 싶은건? 뭐가 있지?” 마리는 꼼지락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사실은…. 여관 일은 너무 재밌고, 찾아오시는 단골손님들도 다들 친절하셔서 좋아요. 저도 제가 만든 요리를 맛있게 드시는 걸 보면 뿌듯하고요. 그렇지만….” 나는 바로 마리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눈치챘다. “여관에 매여 있는 것 말고, 네 인생을 위한 다른 일도 해보고 싶다는 말이구나.” “마, 맞아요. 하지만 부모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거라 지레짐작하고 늘 포기했었어요. 제가 없으면 주방이 돌아가지 않으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인생에서 청춘이라는 시간은 야속할 만큼 순식간에 지나간다. 나조차도 지구에서 창창한 청춘에 이곳으로 끌려왔다. 살아남기 위해 미친 듯이 마법을 익히고 전장을 뒹굴다 보니, 어느새 훌쩍 세월이 지나가 버렸다. 캠퍼스의 낭만이나 시답잖은 연애 따위는 겪어보지도 못한 채. 저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을 주방의 기름때 속에서만 썩히게 두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었다. 나는 본론을 꺼냈다. “연애는?” 내 뜬금없는 질문에 마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여, 연애요?” “그래. 수도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것도 먹고, 잘생기고 멋진 남자를 만나서 알콩달콩 연애도 해보는 거지. 네 맘 때 또래 소녀들은 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나?” “그, 그렇죠오…?” 마리는 뺨을 붉힌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귀엽고 순진한 반응이었다. 아마 이 친구는 돈으로 꼬시는 것은 의미가 없을거다. 어디까지나 내가 원하는 건 마리 스스로 내 프로그램에 참여 의사를 밝히는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이 소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자, 내 세치 혀야. 일할 시간이다. “청춘은 순식간이야, 마리. 네가 여관에서 쟁반을 나르고 스튜를 끓이는 동안에도 시간은 멈추지 않아. 나중에 나이가 들어 뒤돌아봤을 때, 좁은 주방의 벽만 기억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어?” “…….” “황도에 오려무나. 내가 기회를 주마. 제국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멋진 청년들이 모이는 자리가 있어. 넌 그곳에서 그냥 네 모습 그대로 편하게 지내며 사람들을 만나고, 즐기기만 하면 돼. 어때, 한 번쯤 네 가슴이 뛰는 대로 저질러 보고 싶지 않아?” 마리는 돈이나 명예 같은 세속적인 욕망으로 움직이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오직 소녀의 잊고 있던 꿈과, 몽글몽글한 희망의 심지를 건드렸다. 결국 한참을 망설이던 마리의 눈동자에 흔들림이 멎고 다부진 결의가 차올랐다. 어느새 그녀는 내가 내민 <제국 남녀> 출연 계약서에 붉은색 인주를 묻힌 엄지손가락을 꾹 찍고 있었다. 지장 획득. 완벽한 섭외 성공. 굿 잡. 마리가 지장을 찍고 번쩍 하고 고개를 들었다. “어? 자, 잠깐만요!? 각하? 저 방금 뭘 찍은 거죠? 가만 생각해 보니 제가 오랫동안 여관을 비우면 주방은 완전히 마비되는데요!?” 뒤늦게 현실을 깨달은 마리가 펄쩍 뛰며 계약서를 뺏으려 했지만, 나는 이미 양피지를 품속에 갈무리한 뒤였다. “그건 걱정마라 내가 해결해 줄테니까. 내일부터 당장 사람 보내줄게. 황실 주방에서 십 년 넘게 칼을 잡은 베테랑 요리사로 보내줄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될거다.” “아… 알겠습니다. 약속하신 거예요.” 그제야 마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보다는 앞으로 펼쳐질 낯선 세상에 대한 설렘이 조금 더 짙게 배어 있었다. 다시 봐도 매력적이다. 남자라면 누구나 무조건 호감이 있을 만큼. 미모, 성격, 말투, 목소리, 몸매, 어떻게 이런 여자 아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완벽했다. ‘얘를 꾸며 놓으면 어떨까?’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맨얼굴도 이정도인데 메이크 업을 한다면? 괜히 공작 영애 로잘린의 절규가 들리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