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녹화 시작.
7화 녹화 시작.
녹화 시작 당일, 방송국 스튜디오. 중앙 통제실의 분위기는 기분 좋은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여기, 마지막 남자 6호의 프로필입니다.” 실비아가 내민 양피지를 받아 들었다. 얼마 전 마리의 합류로 성비가 6대 6으로 맞춰지면서, 내가 실비아에게 직접 섭외를 맡겼던 마지막 평민 참가자였다. 프로필 사진 속 남자는 길게 기른 머리를 반묶음으로 질끈 묶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어딘가 나른한 분위기가 풍기는 묘한 인상. “이름은 율리우스. 나이는 스물넷. 수도 뒷골목 유랑 극단에서 구르는 무명 배우입니다.” “배우라. 연애 프로그램에 배우를 섭외했다고?” “외모와 언변은 확실합니다. 극단이 사기를 당해 빚더미에 앉아 있는지라, 우승 상금에 목숨을 건 상태입니다.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들 테죠. 분명 국장님의 마음에 드실 거예요.” 나는 율리우스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좋아. 부국장의 안목을 한번 확인해 보겠어.” 얼굴을 보니 확실히 실비아가 허투루 고른 녀석은 아니었다. 여유가 배어 있는 서글서글한 눈매. 웃을 때 살짝 패이는 보조개. 평민임에도 배우라 그런지 귀티가 잘잘 흐르는 귀족같은 외모. 여성 출연자들의 경계심을 단숨에 허물어뜨릴 만한 역할에 딱 들어맞는 얼굴이었다. 돈이 많은 상단주 딸 비비안이나 세상 물정 모르는 귀족 영애들의 마음을 뒤흔들기에 꽤나 매력적인 카드. “자, 율리우스까지 합류했으니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나는 메인 패널 석에 앉아 모니터를 응시했다. 지난 일주일. 나는 열두 명의 출연자들을 철저하게 통제하며 사전 교육을 진행했다. 이 교육의 핵심은 단 하나였다. ‘절대로 자신이 누군지 알아채지 못하게 할 것.’ 연애 예능의 꽃은 남녀가 처음 문을 열고 들어와 눈을 마주치는 그 숨 막히는 첫인상의 순간이다. 미리 안면을 트고 친해져 버리면 카메라 앞에서 날것의 텐션이 나올 리 없었다. 그래서 지난 일주일간의 교육은 철저하게 개인 교습으로 진행되었다. 식사조차 각자 방에서 혼자 해결하며 동선을 완벽히 분리했다. 거기에 더해, 나는 이 방송의 심리전을 극대화하기 위해 특별한 마법을 하나 더 준비했다. 판타지 세계의 귀족들은 외형 자체가 명함이다. 아르젠트 공작가의 타오르는 적발과 적안. 발테르 변경백 가문의 빛나는 은발. 신분을 숨기라고 백날 훈련해 봐야, 머리색과 눈동자 색만 보면 제국민 누구나 그들이 어느 가문 출신인지 단박에 알아챌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환영 마법을 응용하여, 시그널 하우스 부지 전체에 특별한 결계를 쳤다. 이 저택의 문턱을 넘는 순간, 모든 출연자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검은색’으로 고정된다. 타오르는 듯한 적발도, 빛나는 은발도 전부 평범한 흑발 흑안으로 덧씌워지는 것이다. 오직 이목구비와 체형, 그리고 본연의 매력만으로 승부하게 만들려는 설계였다. 이색적인 비주얼이 주는 편견을 지워버림으로써, 서로가 누구인지 끝까지 유추하기 어렵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했다. “오, 국장님. 첫 번째 입소자가 도착했습니다.” 실비아의 보고에 나는 상념을 접고 턱을 괴었다. 모니터 속. 황도 외곽의 아름다운 호숫가에 자리 잡은 대저택, <시그널 하우스>. 카메라가 넓게 펼쳐진 저택의 앞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오늘의 입소 룰은 간단했다. ‘남자 출연자들이 먼저 마당에 모여 대기하고, 이후 여자 출연자들이 한 명씩 차례대로 입장한다.’ 지구의 모 연애 프로그램에서 숱하게 써먹었던,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정석적인 연출. 끼익― 마당의 거대한 철문이 열리고, 커다란 짐가방을 든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 1호, 북부 변경백 아론 발테르였다. 트레이드 마크였던 은발은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잘생기기는 했으나, 머리색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북부의 수호신이라는 위압감은 사라지고 그냥 듬직한 청년처럼 보였다. 게다가 이녀석은 피부도 워낙 하얘서 특별히 내가 피부색도 조금 손봐주었다. ‘너도 머리빨이 좀 있었구나?’ 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텅 빈 마당에 놓인 대기 의자에 가서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앉았다. 곧이어 남자 2호 데릭칸이 들어왔다. 암흑가 보스답게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들어온 그는 아론을 보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아, 네. 안녕하십니까.] 아론이 엉거주춤 일어나 꾸벅 인사를 받았다. 누가봐도 어색한 남자 출연자끼리의 인사. 그부분도 재미있는 포인트였다. 그 뒤를 이어 몰락 백작가의 장남 루카스, 거대 상단의 장남 드렉슬러, 그리고 공돌이 에드가가 차례대로 입장했다. 마당에 마련된 의자에 나란히 앉은 다섯 명의 남자들.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그들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탐색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가 귀족인지, 누가 평민인지 알 길이 없으니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들 마른침을 삼키며 애꿎은 물잔만 축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남자 6호 율리우스가 등장했다. [다들 일찍 오셨네요. 반갑습니다.] 그는 무거운 짐가방을 들고 있으면서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흑발이 묘하게 잘 어울리는 얼굴. 선이 곱고 눈웃음이 매력적인 사내였다. 나는 스크린 속 율리우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긴장될 텐데 시선 처리가 자연스러워. 과연 배우라 이건가. 다른 남자들 사이에서 확연히 튀는 부드러운 인상이야.’ 남자들이 모두 모이자, 마당 구석에 설치된 마도 스피커에서 무미건조한 PD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부터 여성 출연자들이 한 명씩 입장합니다. 여성 출연자가 도착하면, 본인과 같은 번호를 배정받은 남성 출연자가 앞으로 나가 그녀의 짐을 들어주시면 됩니다.] 룰이 하달되자 남자들의 표정에 묘한 파문이 일었다. 여성 출연자에 대한 기대감과 긴장감이 교차하는 얼굴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실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국장님. 이런 게 의미가 있어요? 어차피 신분도 모르고 취향도 모르는 상태에서 번호만으로 짐을 들어주게 하는 거 말입니다. 자연스럽게 마음이 가는 사람이 들어주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나는 과자를 하나 집어 던져 먹으며 대답했다. “에이, 그러면 아무도 안나가. 처음부터 자율에 맡기면 서로 눈치만 보다가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하게 돼. 그 순간 분위기는 얼어붙는 거지.” 나는 모니터 속 남자들을 가리켰다. “일단 강제로 표지판을 붙여준 거야.” “표지판요?” “그래. 숫자대로 일단 너희는 임시로 짝이 맺어졌다는 명분을 주는 거다. 처음 만난 또래의 남녀가 짐을 들어주며 자연스럽게 몇 마디라도 섞을 수 있는 구실. 거기서부터 작은 불씨가 시작되는 거지. 물론, 나중에 마음에 드는 다른 사람이 생기면 치열하게 쟁취해야겠지만.” 설명을 듣던 아에도스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크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 역시 범상치 않소이다!” 그때, 모니터 화면이 바쁘게 전환되었다. 드디어 저택 입구에 화려한 문양의 마차가 도착한 것이다. 마차 문이 열리고, 풍성한 프릴이 달린 실크 드레스 자락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 1호, 로잘린 아르젠트였다. 흑발 흑안으로 변했지만, 도도한 걸음걸이와 특유의 자태는 감출 수 없었다. 그녀가 묵직한 여행 가방 두 개를 옆에 둔 채 마당으로 들어서자, 남자 1호 아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검은 머리에 피부를 약간 그을리게 해놨더니, 우직한 곰 같아 보이는 아론이 긴장한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가방을 번쩍 집어 들었다. 평범한 성인 남성 두 명이 들어도 낑낑댈 무게였지만, 아론에게는 깃털이나 다름없었다. 그 듬직한 모습에 로잘린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광경이 펼쳐졌다. [고맙습니다. 짐이 무거웠을 텐데, 너무 친절하시네요.] 로잘린이 두 손을 다소곳하게 모으고, 수줍은 듯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꾸벅 인사를 건넨 것이다. 콧대 높은 공작 영애의 모습 따위는 보이지 않고, 흡사 순진한 소녀 같은 내숭이었다. 스튜디오가 발칵 뒤집혔다. “이거, 의외인데?” 내가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리자, 실비아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모니터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말 재밌어지는데요? 그 성질머리 더러운 공녀가 카메라 앞에서 저렇게 얌전하게 행동할 줄은 몰랐습니다. 연기력이 수준급이네요.” “큭큭, 이 녀석 기특하네. 방송이 뭔지 제대로 알아. 자신이 어떻게 비춰져야 남성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는지 실험하고 있어.” 아론은 로잘린의 새침한 미소와 나긋나긋한 말에 정신이 팔린 듯,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하나도 무겁지 않습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네, 부탁드릴게요.] 성공적인 첫 만남. 로잘린의 등장이 남자들 사이의 어색한 공기를 부드럽게 녹여버렸다. 이어 두 번째 마차가 도착했다. 여자 2호 세리아. A급 용병이었지만 오늘 만큼은 여성스럽게 꾸민 모습이었다. 남자 2호 데릭칸이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다가가 가방을 넘겨받았다. 세리아는 '아, 제가 들어도 되는데.'라며 머쓱해했지만, 데릭칸은 능수능란한 말솜씨로 분위기를 리드했다. 세 번째는 여자 3호 비비안.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그녀가 들어서자, 남자 3호 루카스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다가가 짐을 들었다. 남은 건 이름 뿐인 몰락 귀족의 장남과 부를 거머 쥔 신생 상단주의 딸의 만남. 비비안은 루카스의 얼굴을 슬쩍 훑어보고는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네 번째로 등장한 여자 4호 클로에. 사람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 은둔형 마법사답게, 고개를 푹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작은 짐가방을 받아 든 남자 4호 드렉슬러는 다정하게 말을 건넸지만, 클로에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자, 다음은 5번이다. 내가 쟤를 꽤 기대하고 있지.” 내가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그 로맨스 소설 광팬이라는 백작 영애 말입니까?” “그래. 소설 속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는 소녀, 세실리아. 쟤 머릿속에는 지금쯤 백마 탄 왕자님이 자신의 짐을 받아주는 환상으로 가득 차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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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익— 마차에서 내린 세실리아는 벌써부터 뺨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며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는 눈빛.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걸어 나간 남자는 5호. 바로 너드미 뿜뿜한 헤파이토스 공방의 수석 연구원인, 에드가였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짐은 제가 들겠습니다.] 에드가가 꾸벅 인사를 하고 세실리아의 짐가방을 덥석 잡았다. 하지만 근력 운동이라고는 숨쉬기밖에 해본 적 없는 연구원에게, 드레스만 30벌이 들어있다는 그녀의 가방은 버거운 상대였다. [윽! 이, 이 가방 무, 무겁네요… 저, 저기 거기 힘세신 분들 중에서 좀 도와주실….] […네?] 운명적인 시선 교환과 로맨틱한 대사를 기대했던 세실리아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그녀는 낑낑대는 에드가를 보며 환상이 깨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푸하하하!” 아에도스가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고, 나 역시 큭큭거리며 웃음을 삼켰다. “가혹하시군요, 국장님. 저 소녀의 로망을 시작부터 짓밟아버리시다니.” “이게 리얼리티 예능이지. 환상과 현실의 갭 차이에서 오는 카타르시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마차가 도착했다. 내가 손수 길거리에서 캐스팅해 온 최고의 원석. 여자 6호, 마리. 끼익― 마차의 문이 열리고 구두코가 땅에 닿는 순간, 거실 창문 너머로 마당을 내다보던 남녀 출연자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췄다. 마치 주변의 공기가 멎어버린 듯한 이상한 분위기. 마차에서 내린 마리의 모습은 내가 황실 수석 디자이너에게 특별이 부탁해 세팅한, 과한 장식 없이도 몸선과 기품을 완벽하게 살려주는 최고급 실크 드레스였다. 그녀가 마당으로 들어서자, 남성 출연자들의 시선이 홀린 듯 마리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