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뭔가… 부족해….
8화 뭔가… 부족해….
누군가의 입에서 멍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흑발 흑안으로 변했음에도 가려지지 않는, 오히려 그 흑백의 대비 덕분에 더욱 눈부시게 빛나는 압도적인 미모. 무거운 쟁반을 나르며 단련된 흔들림 없는 코어는 꼿꼿하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승화되어, 마치 황녀가 강림한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저 사람… 대체 어느 가문의 영애지?] [기품이 장난이 아닌데……?]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성 출연자들, 특히 진짜 공작 영애인 로잘린조차 바짝 긴장한 눈빛으로 마리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로잘린의 부채질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그 압도적인 비주얼의 충격 속에서, 남자 6호 율리우스가 부드러운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렀다. [안녕하세요. 짐 이리 주시죠.] 율리우스가 다정한 눈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여심을 흔드는 완벽한 톤의 목소리. 마당에 모인 모두가 숨을 죽였다. 겉보기엔 고위 귀족 영애인 그녀가 우아하게 손끝을 내밀며 짐을 양보할 것이라 예상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마리는, 빙그레 맑은 웃음을 터뜨리며 가방의 한쪽 손잡이를 꼭 쥐었다. [엇? 고맙습니다! 그래도 꽤 무거우니까 저랑 같이 들어요!] 도도한 얼음 공주인 줄 알았더니, 햇살처럼 쏟아지는 싹싹함과 털털함. 율리우스는 그 극단적인 반전 매력에 허를 찔린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이내 그의 얼굴에 계산된 연기가 아닌, 진짜 기분 좋은 미소가 번지며 가방의 반대쪽 손잡이를 잡았다. [그럼, 저야 영광이죠.] 두 사람이 나란히 짐가방을 맞잡고 걸어오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 훈훈한 투 샷과 마리의 존재감을 지켜보던 거실에서는, 아까보다 훨씬 더 팽팽한 견제의 눈빛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특히 아론의 시선이 마리의 웃는 얼굴에 고정되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짜식, 너도 남자구나 아론. 장하다. “크크, 내 안목 어떠냐.” 스튜디오에서 모니터를 지켜보던 내가 의기양양하게 묻자, 실비아와 아에도스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합니다. 6호 여자분은 마치… 그래… 황실의 인물 같군요.” 나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치? 황실 인간들 어디 하나 나사 빠져 있어서 마리를 보면 황실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 말을 듣고 실비아가 소리쳤다. “나, 나사가 빠져 있다니요!!” “좋은 뜻이야. 선황도 그렇고 테우스도 그렇고 어딘가 귀엽고 황족 같지 않잖아?” “그래도… 아론 경이나 로잘린 공녀는 황족의 얼굴을 알고 있지 않을까요?” “에이, 모를걸? 넌 황족의 사돈의 팔촌까지 다 알아?” “아니오.” “그래, 그봐. 우리처럼 가까이 붙어 있는 사람들도 황족 얼굴을 제대로 모르는데 저들이 알까? 아론과 로잘린도 서로 가문 이름만 들었지 실제로 얼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일걸?” 그랬다. 귀족들이 그리 주야장천 연회를 열고 무도회를 열어 오프라인 만남을 수없이 가진 이유. 그건 바로 친목질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지금, 황제의 명으로 호화로운 연회는 자제하라는 황명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고, 제국은 그 어느 때보다 서로의 얼굴을 잘 모르는 귀족들이 많았다. 특히 어린 녀석일수록 그런 경향이 더 심하지. “크으!!! 등장만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광경이라니!! 노래 소절이 생각이 나는구려! 그래… 이 장면을 노래로 표현하면….” 누가 음유시인 아니랄까 봐 벌써부터 노래를 만들기 시작한 아에도스였다. 뭐, 잘 만들면 <제국 남녀> BGM으로 쓸지도? 그렇게 남녀 열두 명의 입소가 모두 끝났다. 숨 막히는 어색함이 시그널 하우스의 거실을 꽉 채우고 있었다. 열두 명의 남녀가 길쭉한 소파에 나란히 앉아있는 풍경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기묘한 장면.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새카만 흑발과 흑안을 하고 있었지만, 저마다 뿜어내는 기질과 분위기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손톱을 만지작거렸고, 누군가는 의미 없이 헛기침을 했다. 눈이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스튜디오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나는 턱을 괸 채 입꼬리를 올렸다. “큭큭큭, 어색하지. 어색할 거다.” “하지만, 저 설렘을 보시지요! 아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청춘 남녀들의 날것의 감정들인가!!” 아에도스가 탄식까지 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때였다. 거실 벽면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PD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그널 하우스 입소를 환영합니다. 지금부터 입주자 여러분의 첫 번째 일정을 시작하겠습니다.] 스피커의 목소리에 열두 명의 시선이 일제히 허공으로 쏠렸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대리석 테이블 위로, 바닥에 숨겨져 있던 마법 진열대가 스르륵 솟아올랐다. 그 위에는 이슬을 머금은 새빨간 장미꽃 여섯 송이가 놓여 있었다. [남성 입주자분들은 테이블 위에 놓인 장미를 들어 주십시오. 그리고 오늘 첫 만남에서, 첫인상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여성 입주자에게 그 꽃을 전달해 주시길 바랍니다.] 안내 방송이 끝남과 동시에 거실의 공기가 일순간 팽팽하게 당겨졌다. [뭐, 뭣!?] [아, 아니!! 처음 보자마자 그걸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나, 나, 나는 못해…!] [세, 세상에…!!] 저마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충실한 리액션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렴, 이곳이 마도공학이 많이 발전되고 현대 지구의 기술적 차이를 마법으로 메꿀 수 있는 판타지 세계라고 하더라도. 결국 정치 형태는 아주 보수적인 봉건제 + 신분제이다. 남녀 간의 관계? 뭐, 두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로 보수적이지. 그런데 첫 만남에 호감을 표시하라고? 이건 파격을 넘어선 혼란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래, 나는 이런 걸 보고 싶었다고! 본격적인 첫인상 선택. 가장 원초적이고 잔인하며, 동시에 도파민이 폭발하는 연애 리얼리티의 꽃이었다. 여성 출연자들의 표정 관리가 급격히 어색해지기 시작했다. 오직 한 사람, 여자 1호 로잘린 아르젠트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로잘린은 무릎 위에 다소곳하게 모은 두 손을 매만지며, 허리를 더욱 꼿꼿하게 폈다. 검게 변한 머리카락을 살짝 귀 뒤로 넘기는 그녀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저기 로잘린 봐라. ‘당연히 전부 내게 오겠지. 안목이 썩어 문드러지지 않은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얼굴 아니냐?” 그러자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독심술사세요? 정말 그렇게 보이네요….” 하지만, 남자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럼, 저부터 가볼까요.] 침묵을 깬 것은 남자 6호, 율리우스였다. “어? 저러면 안되는데 순서대로…!” 실비아가 당황한 듯이 현장에 있는 촬영팀에게 연락하려던 순간이었다. 나는 그런 실비아를 막았다. “놔둬봐. 재밌게 돌아가잖아?” 그는 특유의 여유로운 걸음으로 테이블로 다가가 장미 한 송이를 집어 들었다. 그의 부드러운 시선이 여성 출연자들을 한 번씩 쭉 훑었다. 로잘린이 율리우스를 향해 눈을 살짝 내리깔며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율리우스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수줍게 앉아 있는 여자 6호, 마리의 앞이었다. [첫인상이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마치 봄을 안내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어, 어머? 가, 감사합니다.] 율리우스가 무릎을 살짝 굽히며 장미를 내밀자, 마리가 맑게 웃으며 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바로 촬영감독의 말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 1호부터 순서대로 해야하는데 6호님께서 새치기를 하셨네요. 뭐, 좋습니다.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하지만, 율리우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아차… 이거 너무 빨리 장미를 드리고 싶은 마음에… 제가 실수를 했네요.]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푸하하하!! 능글 맞은놈. 저새끼 분명 어디 귀족 부인도 꼬셔서 스폰받고 했을거야. 확실해. 사짜 냄새 나잖아?” “……너무 능수능란합니다. 전혀 당황도 하지 않고요. 봄을 안내하는 느낌이라니, 그런 표현은 어떻게 생각하는 거예요? 어우 소름끼쳐.” “니가 데려왔잖아. 아주 잘했어.” “저런 캐릭터인지 몰랐다고요….” “막상 마리는 아주 기뻐하는 것 같은데?” “하아, 저라면 질색을 했을겁니다.” 나는 작게 속삭였다.“그러니까 니가 노처녀….” “뭐라고 하셨습니까?”나는 빠르게 말을 돌렸다.“아, 아무것도 아닌데? 어, 내 조카 일어난다!” 다음으로 일어선 것은 남자 1호, 아론이었다. 확실히 혈통이 혈통인지라 이 중에서 가장 키가 크고 덩치가 큰 아론이 훤칠한 발걸음으로 장미를 집어 들었다. 로잘린의 눈빛이 다시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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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그렇게 쉽지 않다, 로잘린. 짐 한번 들어줬다고 네 남자가 아니야.” 아론이 붉어진 얼굴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아론 역시 다시 한번 로잘린을 지나쳤다. [그… 크, 크흠… 미소가 참 아름다우십니다.] 아론이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채 장미를 쑥 내민 곳. 그곳 역시 마리의 앞이었다. [저 주시는 거예요? 고맙습니다, 1번 님!] 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두 번째 장미를 받아 들었다. 아론은 마리의 미소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뒷걸음질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대사는 촌스럽지만, 아론 치고 잘했다. 큭큭.” 나는 여전히 꿀잼 포인트인 로잘린을 주시했다. 그녀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꼿꼿했던 자세가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테이블 아래에서 부채를 꽉 쥔 그녀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어지는 선택의 시간. 거대 상단주 아들 드렉슬러 역시 고민 끝에 마리에게 장미를 바치며, 마리는 순식간에 세 송이의 장미를 품에 안게 되었다. 그들을 제외한 남은 남자들은 각자의 취향대로 흩어졌다. 암흑가 보스 데릭칸은 용병 세리아에게 장미를 주며 능글맞게 웃었고, 루카스는 화려한 장신구를 한 비비안에게 꽃을 바쳤다. 공돌이 에드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마법사 클로에에게 다가가 쭈뼛거리며 장미를 넘겼다. [모든 선택이 끝났습니다.] 마도 스피커의 알림음이 다시 울렸다. 여성 출연자들의 희비가 엇갈렸다. 누군가는 쑥스러운 미소를,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화면 한구석. 로잘린의 무릎 위는 텅 비어 있었다. 단 한 송이의 장미도, 장미 이파리 하나조차 놓이지 않은 완벽한 빵표. […….] 로잘린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선택받지 못한 적 없던 제국 최고 미녀의 굴욕이었다. 스튜디오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맙소사! 제국 최고의 미녀가 영표라니! 저 콧대 높은 공작 영애가 단 한 표도 받지 못했소이다!” “크하하하! 내 이럴 줄 알았어! 로잘린! 장하다! 기특하다!!” 내 말에 아에도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니, 왜 기특하다고 하십니까? 한 표도 못 받았는데요?” “이래야 시청률이 폭발하니까!! 크하하하하!!”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하하하하!!” “세실리아도 표를 못받긴 했는데 씩씩하네.” “저런 모습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 올수도 있는 법이죠.” “그럼, 그럼!” 아에도스와 나는 배를 잡고 낄낄거렸다. “아, 이 재미있는 걸 나눌 사람이 우리밖에 없다니….” 뭔가… 부족해…. 아쉬웠다. 자고로 콘텐츠를 볼 때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 그래서 한국에 있을 때는 조금만 유명하면 커뮤니티가 생기곤 했다. 방송을 보고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싶은 욕구를 배설할 수 있는 커뮤니티. 내가 굳이 전 제국을 하나의 마도 통신망으로 이어버린 것이 바로 이것을 위한 것이었다. 아직도 사람들은 정규 편성된 유일한 방송인 뉴스에 댓글을 남기거나 황제의 월간 훈화 방송에 댓글을 남기며 놀고 있었다. “안 되겠어. 일단 커뮤부터 만들자.” 이 대륙에 방송국은 우리 방송국밖에 없다. 광고가 뭐 꼭 방송을 타야만 광고인가? 커뮤니티를 만들고 거기에 프로그램 예고편을 올리면 그게 바로 광고가 되는 거다. “실비아, 지금까지 촬영된 걸로 예고편 하나 따자.” “예? 벌써요? 이제 첫인상 선택밖에 안 했는데?” “충분히 자극적이야. 원래 예고편은 여러 개 만드는 거야.” “오늘 촬영 아직 남았는데 끝까지 안 보시고요?” “이제 됐어. 나 재상이야. 할일 많아. 현장 감독한테 콘티와 각본에만 충실하게 촬영하라고 해. 편집은 어차피 나중에 우리가 다시 해야 되는 거니까.”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촬영팀 스포했다가 걸리면 교수형이라고 똑똑히 전해.” 그러자 실비아가 미간을 구겼다. “……교수형씩이나…?” “왜, 꼬우면 네가 재상 하던가.” 스포는 중범죄다 암. 물론 사형까지 시키진 않겠지만, 이 정도는 해야 어디 가서 함부로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출연자 집안이나 관련자들에게도 입단속 철저히 하고.” “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