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충
우중충
흐리다 싶더니 역시나였다.맞고 간다는 선택지는 없다는 듯 무작정 쏟는 비 앞에서 나는 머리를 긁었다.시원하게도 내리네.분명 예보에선 늦은 밤부터 온다고 했었다고.요즘 예보가 아무리 안 맞는다 해도 이정도로 내리는 건 알려줘야 하지 않나."와 비 뭐야!!""엄청 쏟는다.""그러게. 그래도 빗줄기는 얇아서 다행... 아니 것보다! 혹시 예린이 못 봤어? 분명 내려가는 걸 내가 아까...""저기."나는 비를 뚫고 걸어가는 한예린을 가리켰다.그리고 이어서 입을 열려고 했다.이주영이 아무리 한예린에 미쳐 있어도 설마 이 비를 맞진 않겠지 생각했는데."야 땡큐! 나 먼저 간ㄷ, 예린아!!! 기다려어어!!"와 이걸 맞네.쟤도 참 대단하다...... 아 잠만 그렇네.오늘이구나, 그 이벤트.우산도 없이 뛰어가는 이주영을 보니 그제야 떠올랐다.아주 중요한 에피소드 중 하나인 '비 오는날, 우산 하나'.소제목 그대로 둘이 우산 하나를 같이 쓰는 날이다.우연히 가까운 곳에 산다는 걸 깨닫는 날이기도 했다.3년간 그것도 몰랐냐고?놀랍게도 그렇다.일단 등교 시간부터 극과 극이기도 하고, 들이대는데 모든 용기를 소진한 이주영은 방과후의 한예린을 건드리지 못했다.여기까지면 그냥 흔한 에피소드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중간에 우산이 뒤집혀서 둘 다 흠뻑 젖는다.그러다가 둘이... 어떻게 되더라.모르겠다.뭔가 이벤트가 생기긴 하는데...솔직히 이쯤 되면 잘 기억도 안 난다.아무튼 둘의 관계가 달라지는 계기가 되는 날이었다.이주영의 순애보가 마침내 이뤄지는 지점.결국 해냈구나.나라는 불순물에 껴 있음에도 같은 장면을 만들어낸 둘을 보고 있으니 어딘가 울컥하고 뭔가가 올라와 나는 그대로 멈춰섰다.마침 비도 오겠다 감성에 취해 그대로 가라앉히고 있었는데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목소리가 들렸다."김재현?""?"뒤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우중충한 하늘을 무안하게 만드는 그녀가 서 있었다.늘 그렇듯 웃고있는 입과 밝게 빛나는 눈.여자치고 큰 키라 그런가 얼굴이 확 눈에 들어왔다.솔직히 다른 애들은 시야에 잘 안 들어오니까.새삼 신유리의 키가 크다는 걸 느끼며 평소처럼 눈을 맞춘 순간, 나는 어딘가 멍해졌다.
d3kza0VLSVdxajZ6L09aWC8xUnR2S2Y2YlNRSVR5dVF5QUN4dzBLRjQrUmxac1hueDBPcTVwMzhPdk43SmJZWg
의문을 가질 틈도 없이 빠져버렸다.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평소와 달리 눈이 반쯤 감겨 있었는데, 그 탓에 조금 날카롭고 앙칼져 보였다.달리 말하면 도발적이라는 뜻이다.역시 강아지보단 여우에 가까운 것 같다.일단 강아지라기엔 너무 화려하니까.이렇게 보니 머리색도 여우 털 색이랑 비슷하네.웹툰 속 인물이라 그런지 색 배합이 아주 잘 됐다.그래서 그런가, 신유리의 얼굴은 보면 볼수록 묘한 만족감을 줬다.분명 평소에도 자주 보는 얼굴인데 왜 오늘따라 이렇게 다를까.눈매? 분위기?아니면 단순히 내가 감성에 젖어서 그럴수도.아니면..."내 얼굴이 뭐 묻었어?"아 맞다.나는 이어지던 상념을 강제로 끊었다."아니.""아 난 또 그런 줄 알았네. 시선이 너무 뜨거워서 오해했잖아."점짓 인상을 쓰며 말하는 신유리를 보며 그제서야 깨달았다.상태가 아주 안 좋다는 걸.이렇게 된 이유는 모르겠지만 해야할 건 명확했다.빨리 이 자리를 떠야 한다."미안 지금 상태가 좀 이상하네.""괜찮아. 내 얼굴이 좀 잘나긴 했지?"나름대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뱉은 말이었지만 여전히 멍한 상태였기에 마땅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잠시 침묵이 흐르고 신유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근데 왜 가만히 서 있었어? 혹시 우산 없어?"그리 말하며 우산을 꺼내 드는 신유리를 보며 나는 아까부터 느껴진 묘한 감정의 정체를 알아챘다.내가 지금 왜 이렇게 동요하고 있는지도.말했지만 난 잘 쳐줘야 조연이다.처음에 무리에 합류했을 땐 솔직히 기대도 조금 했다.무료했던 일상에 뭔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그런.하지만 난 딱 거기까지였다.내 삶은 여전히 무료했다.어떤 이벤트가 벌어지면 난 늘 그 범위 밖에 존재했고 난 한 발짝 늦거나 빨랐다.마치 그렇게 정해지기라도 한 듯.나는 언제나 방관자였다.이야기에 껴 있지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당장 주인공은 내가 있음에도 결국 그 장면을 연출했다.내가 없었던 원작과 비슷한 날에 똑같은 구도로 말이다.분명 꽤 바꿨다고 생각했는데.난 그게 꽤나,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아냐, 나도 가방에 있어."우연히 마주친 이성 친구와 같은 우산을 쓰는 그런 이벤트는 벌어지지 않는다는 거다.나는 가방 한구석에 박혀있는 우산을 꺼내 폈다."먼저 간다. 내일 보자."언젠가의 내가 넣어놨을 게 분명한 접이식 우산을."어, 응. 잘 가. 내일 보자."오늘 하늘은 우중충했다.적당히 맘에 들 만큼.#이게 안되네.신유리는 멀어지는 김재현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분명 뭔가 불안정해 보였다.파고든다면 오늘이었는데...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린 그녀는 손에 들린 우산을 까딱였다.우산이 있는 건 알겠다.그래, 굳이 따지면 같이 갈 필요도 없겠지.집 가는 길이 다를지도 모르고, 만약 그렇다면 교문 앞까지만 같이 가는 거니까.더 따지면 우산을 쓰고 같이 간다는 건 여러모로 불편한 일이기도 했다.그런데...보통은 같이 가지 않나?나 정도면 충분히 예쁘고, 한창때의 소년 소녀에겐 충분히 설렐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눈을 그렇게 떨었으면서, 나를 그렇게 바라봤으면서 거절했다고?신유리는 충분히 큰 자신의 우산을 바라봤다.비 맞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탓에 구매한 꽤 큰 우산.같이 쓸 생각은... 없었어.일단 키가 너무 커서 괜히 신발 젖을 것 같고, 사실 아직 어색하기도 하고, 남자랑 단둘이 우산 쓰고 있다간 소문도..."내가 왜 이런 생각을."이래서야 차인 것 같지 않나.신유리는 유독 날뛰는 소유욕을 가라앉히며 애써 다른 생각을 했다.얼굴은 또 왜 그렇게 오래 봐?우산이 있으면 진작 가던지 왜 길을 막고.하,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이어지던 여러 상념을 짜증으로 끊어낸 신유리는 우산을 펴 빗길로 나아갔다.생각의 시간이 길었는지 김재현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칙칙하고 차분한 빗길이 그를 강제로 떠올리게 만들었다.신유리가 김재현과 가까워져 버린 이유는 그 특유의 가라앉은 눈동자 탓이 컸다.그래, 가까워져 버린 것이다.그녀는 거리를 잘 쟀다.사람과 사람 간의 간격을 본능적으로 알아챘고 이용해 왔다.하지만 김재현은 달랐다.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듯한 차분한 두 눈은 그녀의 감각에 혼동을 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가까워져 있었다.분명 멀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손 뻗으면 닿을 위치에 있었다.아, 친하다는 건 아니었다.말 그대로 거리감이 가깝다는 거지.둘은 명백히 다른 개념이었고 그렇기에 신유리는 다시금 거리를 두기보단 오히려 더 가까워지기로 마음먹었다.그쪽이 더 자연스럽기도 하고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기왕 가까워진 김에 뭐 하는 사람인지 알아볼 생각이었는데... "하."신유리는 우산을 두드리는 빗줄기를 느끼며 생각했다.역시 우산은 충분히 컸다.바람에 실린 비도 막아줄 만큼.#집에 들어오자마자 방송을 켰다.오늘은 그러고 싶은 날이라.카테고리는... talk.문득 궁금한 게 생겨서 물어볼 생각이었다.나는 유튜브를 뒤져 적당한 음악을 틀고 잠시 천장을 바라봤다.딱히 이제 와서 우울해진 건 아니다.[1빠][오늘 뱅온곡 왜캐 우울하냐]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곰하][오][빨리 왔누][안녕하세요]어디에 있든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은 그런, 묘한.아 이게 우울한건가?[웬일로 토크?][다음 겜 정하는 거 아니냐][그게 정배임]"아, 네 반갑습니다."[이제야 여길 봐주는구나][그래서 이제 뭐 함?]"아 안 그래도 그거 정하려고요."[하, 기도 한다][킹더컴2지][방장 성격상 다른 겜 나올듯][문명도 괜찮은데][문명은 제발 아니길]나는 요동치는 채팅창을 보며 작게 웃었다.두 달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하지만 시청자들이 내 성격을 파악하긴 충분한 시간이었다. 절대 남의 말을 들어먹지 않는 심보를 파악하기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시간이었지.이제 시청자들은 설득보단 기도를 했다."원래라면 킹더컴2를 이어서 하려 했는데."나는 그리 말하며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평소엔 잘 들어오지도 않는 방송국에 들어가 시청자 게시판을 클릭하자 다시금 채팅창이 올라오기 시작했다.[엥][나 이 사람이 게시판 보는 거 처음 봄][이거 확인하는 거였음? 아 똥 글 지울걸]"아뇨 저도 어제 처음 봤습니다."[좀 확인해 줘;][휴 사람 바뀐 줄][ㄹㅇㅋㅋ]그리고 몇 개 안 되는 글 속에서 내가 찾아냈다.조회수는 많아봐야 10, 댓글은 대부분 0인 게시글 속에서 유독 튀는 글 하나를."조회수가 46에 댓글 6개. 사실 이 정도면 제 방 시청자는 다 봤다고 보면 되는데, 그 호응에 힘 입어 최초로 개념글에 올랐습니다. 자 박수."[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와 개념글!][진짜 최초네ㅋㅋ][그래서 게시판은 왜?]"그러니까 굳이 어렵게 수요 조사 할 거 없이 이 글로 보겠습니다. 이 글이 시청자를 대변한다고 생각할게요."{제목: 혹시 방장님 인생 서버는 관심 없으신가요?}킹더컴 하시는 거 보니까 RP서버 맛있을 것 같던데(대충 신청 링크)<<<<관심 있으시면 ㄱㄱㄴ 오ㄴ 역시 큰일은 유동이ㄴ 존나 동의합니다ㄴ 킹더컴2 바로 가야지ㄴ 가서도 걍 일만 존나 할 것 같은데 ㄴ 이거 ㄹㅇ"인생 서버?"[제발 일단 링크를 눌러][근데 들어가도 남자 하꼬라서 좀 애매하긴 한데][잘하긴 할 듯][본인 1일 차부터 본 사람인데 무조건 잘함][킹더컴2 안 함?]뭔진 몰라도 반응이 거셌다.마우스를 움직여 링크를 클릭하자 뜨는 건 간단한 소개와 규칙, 그리고 신청 방법."GAT는 한 번도 안 해봤는데."[경이나 갱 할 거 아니면 상관없긴 해][님 정도면 걱정 안 해도 됨]"RP는 또 뭐야."[걍 인격 하나 새로 파는거][롤플레잉][역할극 같은거임][컨셉]나는 채팅창을 잠시 보다 규칙과 방식을 진득하게 읽었다.그리고 잠시 뒤 완전히 이해했다."한 서버에 사람이 400명이 들어갈 수 있고."[최대 정원은 400][저번작이 대박 나서 아마 다 채워질 듯]"그 400명이 전부... 그러니까 연기를 하면서 각자 사는거야? 뭐 갱단, 경찰, 소상공인. 이런 식으로?"[ㅇㅇ 말 그대로 인생 서버라][어허 연기라니, 인생입니다]"아 연기가 아니라 RP. 암튼 그걸 한다고. 400명이 한 서버에서."[ㅇㅇㅇㅇㅇㅇ][재미없어 보이는데 킹더컴2나 ㄱㄱ][위는 제발 닥치]오..."그거 모집 언제부터 하는지 아시는 분?"[이게 된다고???][소통을 하는 것도 신기한데 인생섭까지?][이거 꿈이냐?] 아니 사람 400명이 한 서버에서 각자 살아간다고.AI가 아니라 사람이.이걸 왜, 어떻게 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