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샌드백이 되었다(1)
왕실의 샌드백이 되었다(1)
취미로 웹소설을 자주 보았다.처음은 게임 판타지로 시작해, 현대 판타지. 정통판타지. 그러다가 무협까지.그렇게 10년이 훌쩍 지나다 보니 볼 게 없었다.간간이 나오는 신작들을 찍먹하며 취향에 맞는 것들을 찾다가 슬쩍 눈을 돌려 로맨스 판타지, 흔히 로판이라 부르는 장르를 보았는데.‘생각보다 볼만한데?’남자가 뭔 로판이냐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생각한 것 이상으로 볼만하더라.아니, 볼만한 수준을 넘어 그냥 순수하게 재밌었다.장르에 로맨스가 붙어서 연애질만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안 그런 게 많을 줄이야.물론, 모든 작품이 그런 건 아니고. 취향에 맞지 않는 작품도 많았으나 그건 판타지나 무협에서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그렇기에 판타지와 무협 장르에서 볼 것이 없었던 나는 로판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빠져들었다.문제는.“애덤.”“네, 전하.”“어떻게 해야 그녀가 나에게 관심을 줄까?”“……”직접 살아보니, 로판이라는 장르는 그다지 살기 좋은 동네는 아니라는 것이였다. * * * 어느 날 눈을 뜨니 판타지 세상이었다.어이가 없었다.주변에 제발 이세계 좀 보내달라고 지랄을 하던 놈들이 그렇게 많았는데.왜 현실에서 제대로 살고 있던 나를 이세계로 보냈단 말인가!…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생각보다 쉽게 이세계에 적응하고 말았다.물론, 그것도 태생 덕분이기는 했다.어제까지만 해도 취업 준비생으로 이리저리 치이던 내가, 여기서는 백작가의 자제?일단 취업을 걱정해야 할 일은 없다는 말이다.더 나아가 그냥 평생 백수로 지내도 나 하나쯤은 먹고 살릴 능력이 있는 집안이었기에 마음 편히 살 수 있었다.“애덤은 검에 재능이 있구나.”허나, 사나이로 태어나 그냥 놀고먹는 것만 하는 것은 아깝지 않은가.심지어 전생과 달리 이번 생은 집안에서 빵빵한 지원을 해주니, 남들이 꿈꾸는 이세계 라이프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렇기에 가문의 영재 교육을 받으며, 검사라는 적성을 찾게 되었다.나를 가르치러 온 전직 기사 출신의 강사들이 제법 괜찮은 재능이라고 추켜세우는 것은 물론, 나 또한 검을 휘두르는 것에 제법 보람을 느꼈기에 기사라는 직업이 내 천직이라고 생각했다.그래, 들어보니 장남이 가문을 이끌고 동생들은 내정이나 무력으로 형을 도와준다고 하니, 스미스 가문의 3남인 나 애덤은 기사로서 첫째 형과 둘째 형을 돕는 것이다!소설에서 보면 가문을 차지하기 위해 형제들이 온갖 난리를 피우는데, 얼마나 아름다운 형제애인가!“이 아이는 천고의 기재구나!”하지만 첫째 형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둘째 형이 나를 껴안는 감동의 시나리오는 어느 날 찾아온 불청객으로 인하여 깨지고 말았다.알고 보니 강사 중 하나가 전직 왕실 근위대 소속이었고. 그 신분을 숨기고 취미로 강사를 하다가 나의 재능을 깨닫고는 전 직장에 밀고한 것이다.“제, 제가요?”“그렇다.”그렇게 왕실에서 파견을 나온 현 왕실 기사단 소속 기사는 나를 보물 보듯 쳐다보며 그대로 국왕이 사는 집으로 납치를 해갔다.고위 귀족인 백작? 왕실에 거역하면 그냥 날아가는 것이다.그렇기에 부모님은 물론 형제들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었다. 한치의 아쉬움도 없는 모습이 조금 그렇지만, 어쩌겠는가.“이 아이를?”“그렇습니다. 이 녀석으로 말할 것 같으면……”그렇게 끌려간 왕실에서 나를 데려온 기사와 조금 더 높아 보이는 기사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그러고는 다짜고짜 나에게 검을 쥐여주며, 한판 붙자고 한다.그리고.“대륙을 다 뒤져도, 이렇게 적절한 재능을 가진 이는 없을 터.”그냥 처맞기만 했던 것 같은데, 나를 평가한 기사는 나를 천재라 불렀다.그것도 대륙에 둘도 없는 천재.이게 그 말로만 듣던 전생자 보정이라는 건가? 앞으로는 판타지 주인공처럼 살게 되는 건가!그런 생각이 맞다는 듯 이어지는 말들은 나에게 아주 좋은 이야기들이었다.“마침 5왕자 전하와 함께할 이가 필요했다.”같이 수업을 듣는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평소에 배우던 것보다 몇 단계 수준이 높은, 왕가의 교육을 함께 받는다는 말이다.개인의 실력을 늘리기에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없었다.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왕자와 함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이다.어린 시절부터 함께 배우고, 자연스럽게 함께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무사히 졸업만 하면 왕자의 심복으로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물론 그 과정에서 실수할 경우 내 목은 물론 가문까지 같이 날아갈 수 있겠으나, 먼저 방생한 건 가문이지 않던가!사나이로 태어나서, 이세계까지 왔는데! 왕자의 심복이 되어 출세 정도는 노려도 괜찮지 않겠는가!그렇기에 나는 적극적으로 어필하여, 왕실 소속 기사가 될 수 있었다.왕실 교육 기사단 소속, 교육관.가장 가까운 곳에서 왕족을 함께 배우며, 때로는 가르치고, 위급 시 그들을 지키는 자들.그것이 내 첫 번째 직책이자, 마지막 직책이 될 예정이었다.그리고 그 위대한 업적의 첫 발자국은 바로.“이것이 앞으로 네가 익혀야 할 패배검이다.”“……?”지는 법이었다. * * * 딱 한 판만.전생에서 게임을 할 때 사람들이 자주 하던 말이었다.개인적으로는 전략 시뮬레이션인 우주 전쟁을 시작으로 AOS 장르인 전설의 레전드라는 것이 대한민국의 패권을 쥐었기에 가능한 말이라고 생각한다.딱 한 판.두 게임 모두 그것을 실현하기에는 정말 좋은 게임이었으니까.하지만, 동시에 두 게임은 딱 한 판만을 실현하기에 정말 좋지 않은 게임이었다.“이 새끼, 날빌 쓰네?!”딱 한 판만을 선언했으나, 일꾼 하나 뽑지 않고 달려오는 우주 괴물 6마리에 게임이 끝나거나, 우주로봇을 앞세우고 보병들이 달려오는 일명 치즈러시 등을 당하면 한 판은 무효가 된다.가끔 졸렬한 외계 종족에서 수비하라고 만든 광자레이저를 내 기지에 짓는 것도 마찬가지였다.그뿐인가?“아, 서렌 쳐. 이거 못 이겨.”“뭐야, 또 서렌이야?”1:1 전략 시뮬레이션과 달리 5:5 게임인 전설의 레전드는 더욱 상황이 좋지 않았다.1:1은 뭐가 되었든 내가 쳐 발린 것이지만, 5:5는 남 탓할 상대가 네 명이나 존재했기에 온갖 변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그렇다.딱 한 판만. 그건 어느 한쪽이 우세한 것 없이 양쪽 다 팽팽한 밸런스로 게임을 하던 도중, 나의 캐리로 승리를 이끌게 되어 도파민이 최대치에 이른 한 판을 말하는 것이다.그 과정에 이르기 전에 끝나면 한 판으로 인정이 안 되는 것이요.그 과정에 이르러서 패배해도 한 판으로 인정이 안 되는 것이다.그렇게 무한의 찐막이 끝에, 진정한 한판이 끝나고 보면 원래 예정이었던 게임의 시간을 훌쩍 넘어버리기 일쑤였으나, 진정한 한판을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제물로 바치곤 하였다.그렇기에 전생의 기억을 가진 나는 눈앞의 교육관 단장에게 당당히 대답할 수 있었다.“그러니까, 5왕자 전하와 대련을 하며 적절히 위기감 있는 공방을 주고받다가 서로 마지막 일격으로 승부를 보려고 할 때, 전하께서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패배하면 되는 것이군요.”“훌륭하다!”역시 천고의 기재구나.왕실 교육 기사단장은 손뼉을 치며 나의 재능에 감탄했고, 나는 그들이 말하는 나의 재능에 절망했다.재능이 있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그 재능이 적당한 실력에 적당한 포텐, 그리고 존나 뛰어난 눈치였다는 소리 아닌가!“왕자님들은 모두 왕의 혈통이다. 그에 맞는 왕자의 교육이 존재하는 법이지.”전생에 저런 소리를 했다가 갑질 레전드 사건으로 뉴스에서 시끄러웠던 기억이 있으나, 안타깝게도 이곳에 서는 논란이 되지 않는다.진짜로 왕의 혈통이고, 진짜 왕자를 교육하는 것이었으니까.심지어 갑질은 맞으나, 진짜로 갑이 맞았으니까!“흔히들 패배하는 것에서 배운다는 말을 하고,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지. 하지만 우리의 패배와 왕의 혈통의 패배는 전혀 다른 것이다.”그렇긴 하다.자국에서 왕족을 이겨 먹으려는 눈치 없는 놈들은 없을 테니, 왕족이 패배했다는 것은 타국에 패배했다는 말이다.작게는 타국의 아카데미로 유학을 가서 패배했다는 것이요, 크게는 전쟁이 일어나서 타국의 적에게 패배하는 일밖에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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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면 국가를 대표한 개망신이요, 후자면 개망신을 더 해 나라가 망할 징조였다.그렇기에 타국에 왕족이 유학을 가는 일은 거의 없고, 있어도 타국에서 알아서 외교 관계를 고려해서 적당히 맞추어주는 편이라고 한다.“그렇기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다.”왕의 길을 걷는 자는 패배해서는 안 된다.허나, 과보호할 시에는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세상을 알지 못하니.왕족이 한계에 계속 도전할 수 있게 몰아붙이면서도, 결과적으로는 늘 패배해야 하는 페이스 메이커가 존재해야 했다.“그게 우리다!”교육을 가장한 샌드백.그것도 그냥 샌드백이 아닌, 때리는 사람이 가장 만족할 상황을 만들어주는 최적의 샌드백.말로는 참 그럴싸했다.“단장님.”“궁금한 것이라도 있느냐?”천고의 기재를 만났기에 감동한 단장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최소한 5왕자 전하와 제 실력이 비슷해야 가능한 일이지 않습니까?”그렇다. 이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최소 상대와 대등한 실력을 갖추어야 했다.아니, 솔직히 대등한 상태로는 어렵다. 사람이란 기계가 아니었으니까. 최상의 컨디션인 날에는 나보다 한 수 뛰어난 사람을 이기기도 하고. 최악의 컨디션에는 한참 아래의 사람에게도 패배하는 것이 사람이다.왕자라는 위치를 생각하면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할 수단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아무리 마법과 신성력이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라고 하더라도 평생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그러니 만약의 사태에도 대등한 승부를 벌이기 위해서는 내가 상대보다 강해야 했다.그냥 강한 것도 아니고, 좀 많이! 상대를 압도할 정도로!“하하.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그런 나의 걱정에 교육관의 단장님은 웃으며 나를 안심 시켰다.“우리는 왕국의 반석을 세우는 일을 하는 자들이다. 그런 이들에게 지원이 없을 것 같으냐?”역사에 이름을 남긴 검사가 기틀을 만들고, 왕국에서 손꼽히는 검사들이 대대로 투입되어 만들어진 검술이 패배검이라고 한다.그뿐인가? 그 패배검을 완벽하게 소화해낼 수 있도록 나 같은 교육관들에게는 매년 막대한 지원이 있을 예정이라고 한다.왕실로 진상이 되는, 몸에 좋은 온갖 식자재를 사용하여 왕실 요리사가 만들어주는 식사는 물론이요.마력을 증진시키는 영약과 몸 관리를 위한 전문인력, 그리고 전대 교육관들의 전문적인 가르침을 원할 때마다 받을 수 있다고 한다.오직 왕가의 샌드백이 되기 위해!그것도, 아슬아슬하게. 한계에 부딪히다 간신히 이길 수 있는, 영혼의 맞수를 만들기 위해!“그것이 네가 해야 할 일이다.”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하지만, 그것만 해낸다면 부와 명예는 물론, 작위까지 준다.거기에, 왕실 기사 공인 재능까지 있다고 하지 않은가?“하겠습니다!”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왕족을 상대한다는 것이 조금 버겁긴 하겠다만, 인생 2회차 버프까지 받아놓고 애들을 상대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그래. 오늘부터 넌 자랑스러운 왕실 기사다.”왕국 역사상, 최연소 왕실 기사 타이틀까지 얻게 되었으니 사람으로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인생 2회차 초반치고, 이 정도면 훌륭한 것 아닐까.“기사의 명예에 어울리게, 완벽하게 패배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훌륭하다!”대화의 내용이 조금 그렇지만, 이것도 기사의 임무다.주군을 위해, 맡은 바 책무를 다하는 것이 기사의 도리.그렇게 주군이 될 5왕자 전하를 만나기 전까지, 왕실 기사로서 완벽한 패배검을 연습하였고.2년 후, 우연을 가장하여 주군이 될 5왕자 전하를 만나게 되었다.“안녕하세요.”“애덤 스미스라고합니다.” 하지만, 이때의 난 몰랐다.내가 담당할 5왕자가 로판 속 서브 남주 중 하나라는 사실을.그것도 단순한 왕족이 아닌, 훗날 대륙 제일검으로 이름을 날릴 놈일줄은.그렇게 작품 설정상 최강의 검사를 상대로 영혼의 맞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가벼운 마음으로 훗날 대륙 제일검으로 이름을 날릴 5왕자의 샌드백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