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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샌드백이 되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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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샌드백이 되었다(4)

처음, 5왕자를 만났을 때 든 생각은 하나였다.“에, 엘렌입니다.”다행이다.왕족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우리는, 잘리지 않는 한 평생을 왕족 하나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한다.기사의 나라로 명한 왕국이기에 왕족들이 어린 시절부터 기사도를 배운다고 하지만, 헤스티아 왕녀와 같은 사람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하지만 내 담당인 5왕자는 척 보기에도 소심해 보였다.왕족임에도 나와 시선을 마주치는 것조차 어려워하고 있었으니까.물론, 왕족으로서 너무 소심한 것도 문제지.하지만 성격이 더러운 것보다는 낫다.어차피 그 소심함은, 나의 환상적인 패배로 자신감을 채워주면 해결되니까.그것이 내 존재 이유며, 왕국이 나 같은 전문가들을 육성하는 이유였다.그걸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5왕자보다 조금 더 강하거나. 그 직전의 실력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냥 지면 안 되니까.마지막 순간까지 누가 이길지 알 수 없게.정말 치열한 한 수 한 수를 맞댄 끝에, 간신히 이겨내는 그림을 만들어야 했으니까.5왕자가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 그날 있었던 대결을 떠올리고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런 대결을 만들고.그로 인하여 자만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게 만드는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해야 했으니까!“비상! 초비상!”그렇기에 헤스티아 왕녀가 패배한 순간 나는 단장을 끌고 가 회의에 들어갔다.“우, 우연이겠지.”단장의 두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다른 사람도 아니고 헤스티아 왕녀였다.자국은 물론 타국에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검의 실력자이자, 그 실력보다도 검에 대한 집착이 더 유명한 인물.재능과 노력, 모두 가지기 힘든 두 가지를 동시에 지닌 인물이 바로 헤스티아 왕녀다.그런 왕녀가 졌다.비록 한 번뿐이지만, 나와의 대련 이후로 좀 유해지긴 했지만!그래도 패배는 패배였다!심지어.“이긴 과정에 문제가 없지 않았습니까!”“끙…”우리 5왕자님의 실력은 진짜였다.아직도 헤스티아 왕녀와 10번을 싸운다면, 9번은 지겠으나.잘하면 한 번은 이길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왔다.이건 매우 큰 거다.비록 한 번이지만, 0과 1은 완전 다른 영역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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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에서, 이제는 잘하면 한 번은 이긴다가 되었으니까.그걸 한 번에서 두 번으로 바꾸고. 두 번에서 세 번으로 바꾸면 되는 것이다.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내 목적이었고, 그렇기에 이번 승리는 좋은 것으로 볼 수 있었으나.“사실 예전부터 몰래 검을 배운 게 분명합니다.”“……”“그렇다고 말해주세요!”내 간절한 외침에 단장은 시선을 피했다.그에 나는 절망했다.“아니, 왕자님은 검을 배운지 1년밖에 안 되었잖습니까?!”검을 배운지 이제 1년이다.우리의 목표는 3년 후의 승리였지, 오늘의 승리가 아니었다.“왕자님이 천재신가 보지.”그에 단장이 시선을 피하며 대답한다.천재.뭐, 우리 왕가가 대대로 검의 천재들이 가득했으니 그럴 수 있지.“헤스티아 왕녀님은 천재가 아닙니까?”문제는 그 상대인 헤스티아 왕녀도 모두가 인정하는 천재라는 점이다.“천재를 뛰어넘는 천재나 보지.”“아하!”천재를 뛰어넘는 천재구나.그래서 천재인 헤스티아 왕녀님을, 고작 1년 만에 이길 수 있었구나!“사퇴하겠습니다.”빠르게 상황파악을 한 나는 가슴 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사직서를 내밀었다.왕자의 교육관이라는 직책은 아쉬웠으나, 5왕자는 내가 상대하기에는 너무 큰 그릇을 지닌 것 같았다.뭐, 내 나이 열하나.아직 앞길이 창창할 나이이니, 교육관이 아니더라도 잘 살겠지.“어림도 없지!”내 사직서를 받자마자 단장은 갈가리 찢어버렸다.참 어이가 없는 모습이지만,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다.사직서 제출한다고 다 사직했으면, 헤스티아 왕녀님의 담당인 루시아 선배는 진작 탈출해서 행복한 일상생활을 즐기고 있을 테니까.“단장님.”“왜?”선배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그것이 올바른 후배의 자세다.“더 있습니다.”내가 누구인가? 준비된 남자 애덤 스미스.매주 한 번씩은 사직서를 북북 찍히는 루시아 선배의 뒷모습을 보고, 사직서 복사본은 세 장까지 들고 다니는 남자였다.“이 새끼가?”또다시 빼앗은 사직서가 북북 찢겨나갔다.다음에는 종이가 아니라 강철로 만들어야 할까.어차피 소드마스터의 손에 걸리면 종이나 강철이나 별 차이는 없겠으나 의지 표명은 되겠지.“더 있습니다만.”“……”또다시 부활한 사직서에 단장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으나, 나도 할 말이 많았다.“왕자님의 그릇을 감당하기에 제 그릇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교육관으로서 제법 오랜 시간 훈련을 받은 나도 헤스티아 왕녀와 싸운다면 10번 중 두 번을 간신히 이기는 정도다.이것도 첫 대련 이후 검기를 사용하지 않아서이기는 하지만.그래도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나의 피땀 눈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그런데 따라잡혔다.추월당한 것도 아니고, 아직 한참 뒤에 있다고는 하지만.고작 1년 만에 5왕자는 내 뒷모습이 보이는 곳까지 따라온 것이다.“원래 초반이 빠른 사람들이 있다.”“그건 그렇죠.”인생이라는 기나긴 마라톤에서, 초반에 빠르게 치고 나가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는 하다.개중에는 뒷심이 부족하여, 뒤처지는 이들도 적지 않은 편이다.하지만 보면 안다.아니, 알 수밖에 없다.“근데 왕자님은 아니잖아요?”검을 직접 맞대는 사람으로서 안다.이 새끼는 급이 다르다.첫날에는 검을 잡는 것조차 어설펐는데, 그 다음날 익숙하게 검을 휘두르지 않나.한 달이 지났을 무렵에는 검을 배운 지 1년은 되어 보이는 포스를 보여주었고.반년이 지났을 때는 슬슬 긴장되기 시작했다.“우리 왕자님은 초반도 빠르고 중반도 빠르고 후반도 빠를 것 같습니다.”그에 비하면, 나는 초반이 정말 빠른 게 전부다.검에 대한 재능이 아예 없냐고 묻는다면 분명 아니지만, 그보다는 정신의 나이 덕분에 애새끼 시절을 낭비하지 않았던 것이 더 크다.남들이 기어가기는커녕 가만히 서 있을 때부터 나는 열심히 달린 것이다.“안타깝지만, 제 능력으로는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안타깝게도 내 재능으로서는 여기가 한계였기에.미련 하나 없이 자신 있게 사직서를 낼 수 있었다.   * * *   정중히 사직서를 제안하는 모습을 보며 단장인 카릭스는 생각했다.‘맞는 말이지.’검사의 꿈이라는 소드마스터에 도달한 카릭스다.그가 보기에도, 5왕자 엘렌은 천재를 넘어 괴물이라 불리기 충분한 재능을 지녔다.그에 비해, 애덤의 검에 대한 재능은 천재라고 불리기에는 조금 부족한 상태.다만, 나이에 걸맞지 않은 성격과 노력으로 인하여 천재라 불리는 이들과 비견될 수 있을 뿐.그렇기에 장담할 수 있었다.‘엘렌님에게는 애덤뿐이다.’기사의 왕국, 그곳에서 검을 배우는 아이들은 많다.그렇기에 어릴 때부터 자신의 재능을 깨닫고, 천재라 불리는 이들이 많았다.그러나 천재란 결국 상대적인 것이다.엘렌이 지금처럼만 성장한다면, 아니 지금의 절반의 속도로만 성장한다면 왕국에 이름난 천재들도 다 범부가 될 것이다.‘원래 높은 곳에서 떨어질수록 더욱 아픈 법이지.’앞으로 왕국의 수많은 천재가, 엘런의 재능 앞에 좌절할 것이다.물론 그중에서 몇몇은 일어서 더욱 앞으로 나아갈 테지만,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다.하지만 애덤은 달랐다.‘자신의 실력에 좌절한 게 아니지.’그냥 합리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없기에 내린 결론이다.말 그대로, 자신의 재능으로는 왕자와 맞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뿐이다.그 찬란한 재능을 바로 옆에서 보고, 느꼈으면서도 꺾이지 않았다.그것이 기사로서 좋은 마음가짐이냐라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다.꺾이지 않았다는 것은 애초부터 검사로서 자존심이나 호승심 같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니까.‘하지만.’우리 왕국에, 아니 지금 이 시대에 엘렌 왕자와 비슷한 재능이 존재할까.‘쉽지 않지.’만에 하나 그런 천재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혼자 입신양명을 꿈꾸지 왕자의 샌드백이 되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다.‘놓치면 안 된다!’중요한 것은 망가지지 않는 샌드백, 아니 저 압도적인 재능에도 부러지지 않는 정신력!그리고 애덤은 사직서를 내는 순간까지도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그렇기에.“기본급 두 배.”“……”카릭스는 사직서를 접어두고,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저를 돈으로 사려고 하시는 겁니까?”“세 배.”“…그런다고 재 재능이 갑자기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최고급 영약 제공.”“크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너만을 위한 최고의 강사진 지원.”“아무리 그래도 재능은…”“왕자님의 수준을 맞추기면 하면 성과급 별도 지급.”“……”애덤의 눈알이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대충 이쯤 되면 도전해볼 만한데 고민하는 모습이었다.‘스미스 백작가가 그렇게 궁한가?’왕실에서 조사하기로는 유명 백작가와 비교하면, 약소한 곳이지만.그래도 백작가는 백작가다.고위 귀족으로 통하는 최초의 관문이자 왕국에 48개만 존재하는 가문 중 하나.웬만한 일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최소 3대는 놀고먹어도 망하지 않을 ‘왜지?’그런 유복한 가문에 태어났으면서, 저렇게 돈을 밝히는 모습이 의문스럽지만.그래도 사람 중 가장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이 돈으로 해결되는 사람이었다.“설령 임무에 실패한다고 해도 회수하지 않겠다.”이 정도로 지원했음에도 안 된다면, 불가능했던 일일 뿐이다.애덤에 노력이 부족하면 모를까, 받는 만큼은 일하는 녀석이라는 걸 카릭스는 알고 있었다.“그저, 전하의 곁에서. 전하가 나태해지는 것만 막아다오.”5왕자 엘렌이 그럴 성정은 아니지만, 사람 일이라는 것은 모르는 거다.너무나 압도적인 재능에 검에 흥미를 잃거나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게 없는 일은 아니었으니까.페이스메이커 역할을 못 한다고 하더라도, 좋은 친구로서 좋은 영향력만 주어도 충분했다.“제가요?”“그래.”썩 자신이 없다는 표정이었으나, 그렇기에 더욱 만족스러운 카릭스였다.선배 교육관 중에서도 애덤만큼 노력해주는 이는 없었으니까.한 명의 검사로서, 학구열이 넘치는 이들은 많아도.교육관이라는 직업의 업을 제대로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반대로 말하면, 너무 일처럼 대하고 있는 게 조금 문제라고 생각했지만.’엘런 왕자의 잠재력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좋은 상황이다.‘괜히 루시아처럼 꺾이지 않을 테니.’헤스티아 왕녀의 담당 루시아 아르티엔.그녀는 그 헤스티아 왕녀조차 인정하는 검사로, 또래에서는 남녀 가리지 않고 적수가 많지 않은 실력자다.하지만 검의 실력에 비해 정신력은 부족하여 일주일마다 사직서를 들고 찾아오지 않는가?하지만, 애덤은 달랐다.“일이 힘든 만큼, 고생 좀 하겠지만.”“비싼 돈 받는데, 당연히 고생 좀 해야죠.”언제 사직서를 냈냐는 듯, 웃으며 손을 내뻗는 애덤을 보며 카릭스는 웃으며 손을 맞잡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