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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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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2)

유학 준비에 딱히 내가 할 일은 없었다.왕족의 유학인 만큼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고, 나는 그 덤인 느낌이라 왕국에서 알아서 다 처리해주었기 때문이었다.내가 할 일이라고는 그동안 저택 관리를 맡길 사람을 구하고, 내 상가에 입점한 상인에게 장기 계약을 맺는 일.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제국 유학을 이야기 하는 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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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가는구나!”그중 가장 기뻐하는 여인을 보며 나는 실망감을 가득 담아 대답했다.“루시아 선배. 후배 취급이 너무하지 않아요?”평소와 다르게, 머리 색을 닮은 붉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사랑스러운 후배가 머나먼 타지로 떠난다는데, 이렇게 기뻐하다니.참으로 너무한 선배였다.“너무한 건 너지! 너한테 지면 헤스티아가 얼마나 날뛰는지 알아?!”곧바로 울상을 짓는 루시아 선배지만, 나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안 보이는 곳에서는 나라님도 욕한다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국의 공주를 반말로 부르고 있었다.물론 헤스티아 왕녀가 강요한 일이라고 하나, 그걸 익숙하게 내뱉다니.선배는 이미 늦었다. 아마 평생을 헤스티아 왕녀의 옆에서 살 것이 분명했다.“슬슬 선배도 저처럼 사직서 대신 계약서 챙겨 다니시죠.”“후배야, 그게 무슨 소리니…”“이미 늦었다는 걸 본인도 잘 아시잖아요. 도망칠 수 없으면 챙기는 거라도 많아야죠.”“그, 그게 무슨 소리니! 올해는 꼭 사퇴해서 남자 하나 잡고 결혼을 약속할 상대를 만날 거야!”장담할 수 있었다.힘들 거다.루시아 선배가 집안이 부족하지도, 외모가 부족하지도, 본인의 능력이 부족하지도 않았다.아니, 오히려 차고 넘치는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그리고 그게 문제였다.적당한 남자를 잡는 것까지는 쉽게 할 수 있겠지만.“일단 그 남자는 헤스티아 왕녀님부터 넘어서야 할걸요?”동생 친구 예정자를 시험한다고 칼부터 꺼내는 사람이 헤스티아 왕녀였다.자신의 가장 소중한 샌드백, 아니 친구인 루시아 선배를 위해서라면 양손이 검을 들고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후배야, 그게 진짜 무슨 소리니…”“본인이 제일 잘 알지 않아요?”본인도 다 알고 있다. 알면서 도망치는 것뿐이었다.그저 인정하지 않을 뿐, 나보다도 더 자신의 미래를 잘 알고 있지 않을까?“포기하면 편해요.”단장이 루시아 선배 같은 고급 인력을 포기할 일은 없겠으나, 설령 단장과 왕실이 포기하더라도 헤스티아 왕녀가 루시아 선배를 포기할 일은 없을 것이다.“애덤의 말이 맞다. 그리고 우리의 역할은 왕실의 기둥들을 보조하는 것. 그 명예로운 일에 도망치려 하지 말아라.”무덤덤한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커피 원두를 분쇄기로 갈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금발의 푸른 눈, 그림으로 그린 듯한 외모와 숨만 내쉬어도 귀족 같아 보이는 분위기를 내뿜는 인물.현 교육관 중 가장 첫 번째로 선발인 인력이자, 변수가 없는 한 차기 국왕으로 확정된 1왕자의 교육관인 다니엘 선배였다.현직 교육관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차기 국왕의 심복으로서 사교계에도 주목을 받는 인물.즉, 교육관 중에서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인물이었으나.“선배님은 명예롭겠죠…!”상대는 루시아 선배.다니엘 선배보다 모든 면에서 상위 호환인 단장에게 매주 세 번은 사직서를 찢기면서, 다음 주에 또 세 번의 사직서를 적어가는 인물이었다.“……”그 패기에 천하의 다니엘 선배도 시선을 슬며시 피했다.“알렌 전하께서는 헤스티아 왕녀와 다르시잖아요!”그에 루시아 선배는 애환을 가득 담아 소리쳤다.그리고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기사의 나라답게 알렌 왕자도 어린 시절부터 검을 배웠고 재능도 제법 있었기에 어디서 맞고 다닐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차기 국왕으로 내정된 인물이었다.아무리 기사의 나라라고 하더라도, 야만족이 아닌 이상 국가를 다스리는데 무력만 중요할 수 없는 법.그렇기에 알렌 왕자는 왕세자로서 지금의 엘렌 왕자보다 어린 나이에 검보다는 여러 학문을 배우고, 정치에 간접적으로 참여하며 왕의 자질을 갈고 닦는 데 노력했다.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검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의 교육관인 다니엘 선배 역시 자연스럽게 검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커피 마실 사람.”“저요.”“저도요. 근데 말 돌리지 말고요.”훌쩍이며 눈물이 고인 눈으로 루시아 선배가 노려보자, 다니엘 선배는 입을 다물었다.알렌 왕자가 검을 내려놓으며, 다니엘 선배도 같이 검을 내려놓았기에.솔직히 지금 싸우면 루시아 선배가 이길 게 분명하기는 했다.“훈련장에도 안 다니면서.”“가끔은 간다, 가끔은.”사실, 그 누구보다 이상적인 교육관은 다니엘 선배기는 했다.알렌  왕자와 다니엘 선배와의 대련은 전생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돈 많은 부잣집 사람들이 골프를 치는 느낌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으니까.말 그대로 접대.그리고 그게 원래 교육관의 역할이기도 했다.그렇기에 울상을 짓는 루시아 선배를 힐끔거리면서도, 다니엘 선배는 당당히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다.”그렇긴 하다.다른 왕자나 공주를 담당하는 교육관도 다 사정이 있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보다는 다니엘 선배에 가까운 상황이었으니까.“너희가 이상한 거지.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지 않나?”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헤스티아 왕녀와 엘렌 왕자가 특이 케이스지, 아무리 기사의 나라라고 하더라도 왕족이 사교계보다 훈련장을 더 많이 돌아다니지는 않는다.그저 헤스티아 왕녀가 이상할 정도로 검을 좋아하고, 엘렌 왕자가 기괴할 정도로 괴물일 뿐.나머지는 왕족들은 뛰어난 실력자들이나, 검에 목숨을 건 인간들은 아니었다.“애초에 교육관이 언제든지 왕족에게 승리할 권한을 부여받은 시점에서, 너희는 우리와 다른 길이 정해졌다.”패배검.이름 그대로 오직 패배를 위한 검이었으나, 우습게도 나와 루시아 선배는 패배하지 않을 권한을 얻었다.물론, 그것을 받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애초에 못 이기잖아요!”애초에 이겨 먹으려고 들지 않으면,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상대의 재능이 뛰어나서일 뿐.“그래도 권한이 있는 것과 없는 건 다르다.”“그렇긴 하죠.”교육관의 패배 시기는 단장의 포함한 중진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회의한 끝에 결정된다.너무 이기기만 하면 승리의 쾌감이 떨어지기에, 정당한 시기에 한 번씩은 이겨야 하는데.자칫 잘못하다가 승부욕을 끌어올리면, 왕족의 업무와 공부를 내려놓고 헤스티아 왕녀처럼 검에 배운다고 난리를 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나와 루시아 선배는 다르다.언제든지 이겨도 상관이 없다.물론, 그것에는 여러 사정이 겹치고 겹친 결과물이자 우리가 이기고 싶다고 이길 수 없는 상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나, 권한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다른 교육관과 다른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물론, 제일 중요한 것은.“그리고, 그만큼 받지 않냐.”선배의 말처럼, 나와 루시아 선배의 압도적인 성과급.왕세자의 담당인 다니엘 선배조차, 우리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수준.거기에 각종 영약과 검술 사범들을 생각하면, 나와 루시아 선배가 받는 혜택은 왕족에 버금가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그런 권한 대신 사직서나 받아줄 것이지.”루시아 선배는 모르겠으나, 나는 만족하기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수도의 저택 두 채.언제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단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그러니, 애덤. 너에게 기대가 크다.”“노력은 합니다만, 너무 기대하지 마시죠.”반년은 더 남은 아카데미 생활이나, 들려오는 소식들이 심상치가 않았다.이름난 검가의 검사들이 입학한다는 소식에 이어, 우리 왕국과 라이벌 관계인 데일의 왕족을 비롯하여 여러 마탑의 유명 마법사들이 입학할 예정이란다.말 그대로 소식이기에, 모든 이들이 다 입학하지는 않겠으나.그중 절반만 맞아도, 대륙 신예들 대부분이 제국 아카데미에 몰린다는 소리였다.“엘렌 왕자님만 믿으시죠.”천재 왕자님의 샌드백으로서, 진짜 천재들은 자신이 없다.“……”“……”그런 내 진심에 두 선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날 바라보았다.“뭐. 왜요.”그 시선이 인상을 구기자, 다니엘 선배는 직접 내린 커피를 내밀며 말했다.“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군.”“개구리라기에는 체급이 너무 큰데요?”쓴 커피 때문인지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 루시아 선배가 중얼거렸다.시선이 계속 나를 향하는 것이 묘하기는 했으나, 기분 탓이라고 넘기고 커피에 각설탕을 다섯 개 정도 집어넣었다.“커피는 그대로 즐겨야 하는 것을…”그에 다니엘 선배가 구시렁거렸으나, 마시는 당사자는 나다.여기에 설탕을 넣든, 소금을 넣든 맛있게만 먹으면 상관없지.“뭐, 그래도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겠습니다.”왕국의 자랑은 되지 못할지언정, 망신이 될 생각은 없었다.대충 소검제를 비롯한 열댓 명 정도를 제외하면 해볼 만하겠지.아카데미 검사 서열 11위 정도면, 딱 어울리지 않을까?“맘대로 생각해라.”“하긴, 나도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는 약한 줄 알았으니까.”루시아 선배가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듯 말했으나, 나는 내가 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그저, 이번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학생들을 우습게 보지 않을 뿐.“왕실 아카데미는 다 아는 상대지 않습니까.”기사의 국가라는 칭호만큼, 뛰어난 검사들이 많이 모이는 레온 왕국의 왕실 아카데미지만.학생 대부분이 레온 왕국 출신이다.유학생은 많아야 10%, 대부분이 왕실에서 파악하고 분석한 이들이었다.하지만 제국 아카데미는 다르다.왕실과 단장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다.지금까지와 달리, 오직 순수 실력으로 그들과 싸워야 했다.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물론, 그 넓은 세상에서도 엘렌 왕자는 독보적일 것이라 생각되지만.소검제 아스란을 비롯하여 대륙에 이름난 신성들은 엘렌 왕자와 나란히 설 수 있을 것이다.그들을 만나고, 경험하고 때로는 싸우면서 엘렌 왕자는 더욱더 발전할 테지.애초에, 그걸 위한 제국 유학이었으니까. 32e0f03e485c6b8d7d0927377da65032.jpg “저는 그때까지만 서 있으면 됩니다.”엘렌 왕자가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까지만 곁에 있으면 되겠지.그가 걸어가는 길이 외롭지 않게.혼자 걸어가다, 엇나가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것.그것이 내 역할이니까.“훌륭하다.”그 말에 다니엘 선배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잘나셨어요, 아주.”루시아 선배는 입을 삐죽이며 중얼거렸으나.진한 커피 향과 함께한, 훈훈한 분위기를 내뿜던 이때는 알지 못했다.“……어?”끼익 소리가 날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내 고개를 돌아갔다.주변에 경악 어린 시선에, 나를 향한다.다시 시선을 내려, 아래를 내려보았다.회색빛 단발머리의 남자가 쓰러져 있다.이전까지 투기가 넘쳤던 눈동자에, 생기가 없었다.“……”나는 조용히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소검제, 아스란.올해 입학한 검사 중에서 인지도만 따지만, 엘렌 왕자 이상의 검사의 이름이자.입학 기념, 가볍게 대련하게 된 내 상대의 이름이었다.말 그대로, 가볍게.진짜 가볍게 했는데.그런데 왜.“……왜?”아니, 시발.침대도 아니고, 왜 길바닥에 누워 계세요?진짜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