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3)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3)
시간을 조금 돌려, 아카데미 입학 당시.입학 직전까지 나는 왕자의 샌드백이자 왕국의 명성을 떨어트리지 않게 열심히 살았다.매일 같이 왕국의 이름난 검술 사범들에게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돌려졌고, 도핑도 몸이 받을 수 있는 최대치를 꾹꾹 눌러 담았다.덕분에 무려 30번 중 한 번은 왕자님을 이기는 기적을 이루어 내었다.다르게 말하면, 그 개고생을 했음에도 서른 번 중 한 번.그것도 운이 좋아서 이긴 거였다.뭐라고 해야 할까?전생에 유명한 RTS게임 우주 전쟁에서 우연히 프로게이머를 만났을 때 느꼈던 벽을 느꼈다고 할까?분명 초반에 빌드를 9대 1수준으로 압도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개쳐발렸을 때의 느낌을 매번 느끼고 있었다.분명 심리전에서는 내가 이겼는데, 왜 내가 쳐 발리고 있을까.체급은 딸리지 않는데. 아니 도핑 파워로 내가 더 강한데!하지만 검을 맞대다 보면, 결국 지고 있는 것은 나였다.기술, 그리고 감각의 차이였다.초반을 유리하게 풀어나가도, 중후반에 이르러서는 불리해졌고.중후반까지 좋게 풀어나가도, 엘렌 왕자와의 소모전에서 지기 일쑤였다.뭐라고 해야 할까.절대적인 마력의 양은 내가 더 많은데, 연비가 다르다고 해야 할까?마력이라는 것이 정확한 수치로 표현하기는 어려웠으나, 내가 100의 마력을 사용하면, 엘렌 왕자는 3~40의 마력으로 막아내는 느낌이었다.미친 짓이었다.말로는 간단하지, 저 행동은 대응하는 마력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바로 꺾일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승리를 위한, 극한의 외줄 타기.그 극한의 외줄 타기를 엘런 왕자는 매번 시도하여 성공한다.실패 확률 1/30.무서운 건 대련을 하면 할수록 실패 확률이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천재란 것은 참 무서운 족속들이구나.검이란 것을 배우면 배울수록, 재능의 차이라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 되어버렸다.그리고 그 인식은, 아카데미 입학식에 이르러서 정점을 찍었다.“검술과 수석 교수를 맡은 아렌이오.”그 한 마디에 조용하던 강당에 함성이 울려 퍼졌다.조금 전까지는 의무적인 박수만 울려 퍼졌는데, 지금은 흐느껴 우는 사람도 간혹 보일 정도였다.아렌.그 이름보다는 검제라는 칭호가 더 유명한 인물이었다.평민 출신이나, 검 하나만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으나, 아직도 검 하나만을 품고 있기에 더더욱 존경받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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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이야기에서나 나오는 기사도를 간직한 어린 검사들에게는 여신보다도 더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검사였다.나처럼 시큰둥한 사람은 이 강당에도 거의 없겠지.하지만 그렇기에 알 수 있는 것도 있었다.최강의 검사라 불리는 이, 추앙할만한 업적과 성품을 지닌 영웅이 아닌.단 한 명의 검사로서 냉정하게 검제를 평가할 수 있었으니까.“……”괴물이었다.내가 아는 검사 중 가장 강한 단장조차 검제에게는 안 된다.같은 소드마스터인데,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수 있을까 싶다가도.겉보기에는 비슷한 수준인 나와 엘렌 왕자의 차이를 떠올리면 이해가 되었다.이래서 소드마스터가 검의 시작이라는 건가.우리 단장님, 아직 갈 길이 머시네.그런 생각을 하는데, 우연일까. 검제의 시선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애덤. 검제님이 이쪽을 보셨어.”옆에서 사춘기 소녀처럼 얼굴을 붉힌 엘렌 왕자의 말이었다.보통은 남자 새끼가 저러면 징그러워야 정상인데.외모가 되니까 저것도 그림이 되는 것이 무섭다.“시선 한 번씩 주는 거겠죠.”“진짜 검제님한테 배울 수 있는 거지?”“수석 교수니까요.”수석 교수면 필수 강의로 2개는 배정받는다.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온 왕국의 왕자가 검제의 수업을 못 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아니, 엘렌 왕자의 재능과 실력이라면 레온의 왕자라는 타이틀을 떼어놓고도 강의를 들을 수 있겠지.“됐다!”입학식 이후 일주일간의 체험 기간이 끝나고, 나와 엘렌 왕자는 당연하게도 검제의 강의 수강에 성공했다.전투의 기초 5학점.실전 검술 기초 5학점.무려 5학점짜리가 두 개.제목의 전투와 검술의 기초.대륙의 인재를 모은 제국 아카데미에서 기초 수준의 강의를 내놓는 것은 그냥 들어오지 말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으나, 그 당사자가 검제가 되니 기초부터 다시 배우라는 검제의 뜻깊은 강의라고 학생들은 흥분했다.“역시 기초부터 단단해야지!”엘렌 왕자도 마찬가지였다.솔직히 저기서 뭘 더 배우려는지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본인이 좋다는데 어쩌겠는가?그렇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실전 검술 기초의 첫 강의 날이 찾아왔는데.“우선은, 자신의 현 위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검제란 양반은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대뜸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를 시전했다.“추첨을 통해 무작위로 결투를 진행한다.”규칙이 제법 자세했으나, 한마디로 상대 수준에 맞추어 적당히 해라였다.방식은 1:1 무제한 결투.패배하면 바로 탈락이고, 승자는 같은 승수의 인원과 바로 붙는다.그렇기에 첫 번째 상대는 일격에 끝났고, 두 번째 상대도 마찬가지였다.세 번째쯤 되니까 몇 합을 주고받을 정도가 되었으나, 네 번째 상대는 세 번째 상대보다 약하여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그렇기에 빠르게 이긴 권리로 다른 사람들이 투덕거리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는데.“애덤 스미스, 맞습니까?”익숙한 얼굴 하나가 다가와 물었다.소검제, 아스란.왕실 공인, 엘렌 왕자의 라이벌 후보.그는 사람 좋은, 그러나 투기가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맞습니다만.”“다음 상대인 아스란이라고 합니다.”“벌써요?”“예상보다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아서, 이긴 사람들은 빠르게 시작한다고 합니다.”하긴,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떨어지고. 지금 남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 실력자들이다.그런 이들이 맞붙으니, 생각보다 시간이 걸린다고는 생각했다.“좋네요.”운이 좋았다.예상보다 빠르게 소검제의 실력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고.동시에 패배가 확정된 엘렌 왕자와의 대결을 피할 수 있었으니까.아무리 나라도, 계속 지면 자신감이 줄어든다.내면의 기가차드씨조차 엘렌 왕자가 상대라면, 때려치우라고 말할 실력차니까.“하하하, 그렇죠.”소검제는 싸울 수 있다는 소리에 기분이 좋았는지, 경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모습만 보면 소검제라기보다는 아무나 물어뜯고 싶어 하는 광견 느낌인데.인격자로 유명한 검제의 손주였기에, 그냥 호승심이 높은 사람으로 보일 뿐었다.이것이 배경의 힘.엘렌 왕자가 얼굴의 힘으로 어중간한 것들을 다 좋게 보이게 만드는 것처럼, 아스란 또한 검제의 후광으로 어지간한 것들은 다 좋게 보이게 만들었다.그럼 얼굴도, 후광도 없는 나는 뭘 보여줘야 하는가.바로 실력이었다.“아스란 대 애덤 스미스. 5차전 시작합니다.”심판 역인 조교의 말과 함께 주변의 시선이 모였다.이미 탈락한 학생들의 시선이었다.내가 아닌 아스란을 향한 시선이었으나, 그 안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그들의 시선에 각인시켜야 한다.소검제 아스란에게도 쉽게 지지 않는, 검사의 이름을.가볍게 마력을 끌어올려, 검기를 내뿜는다.어중간한 이들은 모를까, 소검제를 상대하는데 이 정도는 필수였다.“하.”그에 아스란의 입가에 만족감이 가득한 미소가 지어졌다.규칙에 얽매여, 전력을 내지 못했던 맹수가 이빨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그리고 찰나의 순간, 검과 검이 마주쳤다.그리고.“스, 승자 애덤 스미스.”“……”그 결과가 이것이었다.총 서른 네 번의 합을 겨루었고, 승자는 나였다.초반,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 간을 보았는데.그걸로 끝난 것이다.“역시 애덤이야!”뒤쪽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를 제외하면,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그럴만하다.대륙에 위명을 떨치는 신성, 작은 검제라 칭송받던 아스란이 쳐 발렸으니까.나라도 제삼자였다면 비슷한 느낌이었을 것이다.와 시발, 이게 뭐지.그런 생각을 하고 지켜보았겠지.“와 씨.”발 이게 뭐지?사건의 당사자가 되니까 제삼자보다 더 당황스럽다.하지만 내가 이긴 것은 사실이기에, 승리한 원인을 생각해보았다.일단 첫 번째 가설.대륙의 호사가 새끼들이 또 소문을 부풀렸다.흔히 있는 일이었다.호사가 중에서는 돈 받고 업적을 부풀리는 새끼들도 있었으니까.문제는 그 당사자가 아스란이라는 것이다.그의 별호, 소검제는 그의 할아버지인 검제의 별호에서 나온 것이다.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할아버지를 따라 아버지가 받은 귀족의 성마저 버린 아스란이 자신의 실력을 부풀릴 것 같지는 않았다.만약 다른 사람들이 소검제라 부르더라도, 자신의 실력이 그 위명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거절했겠지.레온 왕국의 정보에 따르면, 아스란은 그런 인물이었다.그렇다면 두 번째 가설.아스란의 컨디션이 별로였다.그럴 수 있다.나도 엘렌 왕자가 독감에 걸려 빌빌거리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문제는, 싸우기 직전까지 아스란의 모습을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는 것인데.갑자기 화장실이라도 급했나?그런 것 같지도 않았는데.-하긴, 나도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는 약한 줄 알았으니까.그때 떠오르는 것은, 몇 달 전 루시아 선배의 말이었다.헤스티아 왕녀한테 매번 털려서 개허접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카데미 패왕이었던 루시아 선배의 한탄.세 번째 가설, 사실 내가 존나 센 거였다의 대두였다.하긴,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 스텝 업을 엄청나게 하고 오기도 했으니까.사실은 내가 아카데미 최강자에 가까운 실력자가 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그렇기에 든 의문이었다.대륙 최고의 신성이라는 소검제 아스란을 가볍게 팬 나를.“승자, 엘렌 레온!”매번 때려잡는 우리 왕자님은 도대체 뭐 하는 새끼일까.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고 생각했는데.최강자는 내 옆에 있었던 것 같았다. *** “그렇게 되었습니다.”-그렇게 되었구나.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단장에게 보고했다.수정구 너머, 단장의 표정은 어이가 70%쯤 빠져나간 느낌이었다.-소검제도 안 되는구나.짧지만, 검제에게 직접 검을 배운 단장이었다.그렇기에 그 검제의 이름을 이어받은 소검제가 왕자님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엘렌 왕자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아스란을 그렇게 평가한 당사자가 단장이었으니까.-그, 그래도 아직 학생이다. 성장하면 모른다.말은 그렇게 하지만 단장도 아는 것 같다.아스란이 성장하면, 엘렌 왕자는 더 성장하겠지.엘렌 왕자의 성장을 나 다음으로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사람이었으니까.“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다음 주 정기 연락을 기대하겠다.한숨을 내뱉으며, 전혀 기대하지 않는 표정으로 단장이 연락을 껐다.그에 나는 창문 넘어,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았다.“밥이나 먹어야지.”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그렇게 기숙사를 나와 아카데미에 있는 식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자연스럽게 주변의 시선이 몰린다.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진다.하루 만에 아카데미의 유명인이 되었으나, 착잡할 뿐이다.소검제 이새끼… 우리의 믿음을 배신하다니.배신의 상처 탓일까, 매운 것이 먹고싶어졌다.근데 팔려나.판타지 세계가 다 좋은데 매운 음식 찾기가 어렵던데.그렇게 식당을 들어가려는 찰나.“애덤!”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반항조차 불가능한 기묘한 악력에 나는 그대로 식당 뒤편, 으슥한 곳까지 끌려갔다.“무슨 일입니까, 왕자님.”“그,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개를 돌리자 나를 이곳까지 끌고온 범인.기묘하게 얼굴을 붉힌 엘렌 왕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아니, 표정이 왜 저래.여기서 BL드리프트로 꺾는다면, 왕자고 뭐고 패야지.“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시발. 그게 나라고 해봐라. 진짜 왕자고 뭐고 팬다.“오늘 처음 만났는데!”다행히 BL드리프트는 아니었다.아니, 근데 시발.“자세히 좀 이야기 해봐요.”왕자란 새끼가, 첫날부터 사고 칠 생각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