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이 로판이었다.(1)
내 인생이 로판이었다.(1)
당연한 말이겠지만, 중세 판타지 세상은 기본적으로 신분제 사회다.뭐, 따지고 보면 전생도 작위만 없을 뿐 신분제 사회랑 비슷한 느낌이었으나.공식적으로는 신분제 사회가 아니었고, 힘들긴 하지만 능력에 따라 그 비공식 신분을 얻을 수도 있었다.물론, 여기서도 신분의 벽을 넘을 수 없는 건 아니다.전생보다 힘들 뿐, 검제 양반처럼 실력으로 다 때려 부수면 알아서 신분이 찾아오니까.검제 양반은 남들은 없어서 못 얻는 그 신분조차 거절했지만, 대다수의 평민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검제의 자식들만 하더라도, 소드마스터에 도달한 장남이 제국에서 백작위를 받았으니까.반대로 말하면, 한 번에 오를 수 있는 작위는 백작이 한계였다.심지어, 백작위조차 그냥 주지 않는다.소드마스터나 마탑주 최소 조건인 7성 마법사 이상은 달성해야 가능한일이고.그것도 당사자에게나 해당하지, 그다음 세대부터는 자작위로 격하되었다.물론 그다음 세대가 소드마스터나 7성 마법사에 이르거나, 그에 걸맞은 공적을 유지한다면 백작위를 계속 유지할 수도 있겠으나.백작위를 유지하는 가문은 열 개의 가문 중 하나가 나올까 말까.대다수의 가문은 한 명의 천재가 이루어놓은 것을 유지하지 못하고, 서서히 몰락하는 것이 보통.그만큼 귀족 사회는 만만하지 않다.그것이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정해진, 신분제 사회였다.그런 세상에서, 왕족이란 존재 자체로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한 국가를 지배하는 왕이 될 수 있는 존재들.이미 후계 구도가 완성된 레온 왕국이었고, 왕위 계승에 한참 먼 5왕자인 엘렌 왕자였으나.그가 왕이 될 확률이 0%가 된 것은 아니고,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역사만 봐도 전쟁으로 인해 왕족이 다 죽어, 한참 방계인 귀족 가문에서 왕위를 잇는 경우가 종종 있을 정도였으니까.그리고 최악의 경우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왕족의 연애는 보통 일이 아니다.자신들은 사심 없는 순수 연애를 주장하더라도, 왕실은 상대의 출생부터 현재를 조사할 수밖에 없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기는 레온 왕국이 아니었다.그러니 왕실 소속 교육관으로서, 내가 기초 조사를 해야했다.“첫 만남부터 하나도 빠짐없이, 다 털어놓아 봐요.”“그,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조금 전에 아카데미 교정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였어.”천재는 다들 나사가 빠졌다고 하는데, 그런 의미로 엘렌 왕자는 천재가 맞았다.타고난 길치.레온 왕국의 왕성이 아무리 넓다고 하더라도 자기 집인데.그곳에서도 종종 길을 잃어버리던 사람이 엘렌 왕자였으니까.내가 단장과 이야기하기 위해서 먼저 복귀했는데, 그 짧은 시간에 또 길을 잃은 모양이었다.“내가 길을 잃고 혼자 멍하니 서 있는데, 모두가 모르는 척을 하더라.”이해는 되었다.아직 하루가 지나지 않았으나, 엘렌 왕자에 대한 소문은 아카데미에 퍼져나갔을 것이다.밥 먹으러 나온 나만 하더라도,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니까.레온 왕국의 이름 모를 검사가 소검제를 팼다.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그 검사를 가볍게 처바른 사람이 나왔다?그게 레온 왕국의 왕자다?내가 평범한 제국 아카데미 학생이었어도, 타국 왕자가 혼자 멍하니 있으면 말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심지어 그 왕자가 강의 첫날부터 검술과 1황으로 군림하게 된 엘렌 왕자라면 바로 도망쳤을 것이다.그러니, 그 학생들을 욕할 수 없었다.오히려 도망치지 않은 것을 칭찬해주고 싶었다.“그런 나에게… 그녀가 다가왔어.”그렇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존나 수상하다.머리가 꽃밭이거나 꽃뱀이거나 둘 중 하나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이름이 데이지였는데.”시발, 이름도 꽃이네.“가문은요?”“그, 그건 아직 모르는데.”답답하다.아니, 데이지가 그리 특별한 이름은 아닌데.1학년만 찾아봐도 열댓 명은 나올 것 같은 이름인데!“성도 알아야죠.”“부, 부끄러워서.”하긴, 검을 든 모습이 패왕이라서 그렇지.평소에는 소심해서 친한 사람이 아니라면, 말도 잘 못 거는 인간이었다.“이야기 계속해보세요.”“그게, 있지.”그런 소심한 인간이, 평소와 답지 않게 눈을 빛내며 운명의 그녀와 만난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한다.엘렌 왕자는 매우 아름답고, 운명적인 만남처럼 이야기를 하는데.“별거 없는데요?”왕자가 온갖 미사여구를 넣어서 그렇지, 한 줄로 정리하면 그냥 길잃은 엘렌 왕자에게 친절하게 길 안내해준 것이 전부였다.“그, 그건 그렇지.”“그리고 냉정하게 따지면, 부활동 홍보 아니에요?”심지어 사심을 대놓고 숨기지 않았다.그것이 한 나라의 왕자에게 꼬리치는 것도 아니고.검술과의 폭풍의 핵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는 것도 아닌.그냥 폐부 직전이 꽃꽂이부 홍보라는 것이 어이가 없었으나.뭐, 그런 사람이니 타국의 왕자에게. 그것도 오늘 하루 아카데미에서 가장 유명할지도 모르는 학생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 수 있었겠지.높은 확률로 엘렌 왕자가 누군지도 몰랐을 것이다.그저 예비 부원1 정도로 보지 않았을까?“그, 그래서 그런데!”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엘렌 왕자가 말했으나.“안 가요.”대충 예상이 되었기에, 바로 말을 끊었다.“아, 아직 말 안 했는데.”“같이 꽃꽂이부 가자는 이야기잖아요.”생각해보니, 부활동까지 꽃이네.컨셉 하나는 완벽한 친구였다.“그렇긴 한데…”초롱초롱한 눈으로 정말 안 가주냐는 듯 쳐다보는데, 정말 안 갈 거다.“저는 부활동 안 할 겁니다.”아니, 정확하게는 못한다.부활동.아카데미 활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신분과 학력을 초월하여 다양한 학생들이 교류하는 만남의 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한 명당 최대 세 개의 부활동에 가입할 수 있었고, 대다수의 학생들이 하나를 진득하게 파거나 세 개를 꽉꽉 채워서 다니는 편이었다.전자는 정말로 관심사에 몰방한 경우고, 후자는 인맥을 늘리거나 각종 행사에만 참여하려는 경우였지만.“저는 개인 훈련을 할 겁니다.”진심이었다.검과 관련된 동아리가 없는 것은 아니고, 거기서 선배들과 교류하는 것도 실력에 도움을 받는 이들도 많다고 하지만.오늘 소검제와의 결투로 깨달을 수 있었다.눈앞의 엘렌 왕자는 괴물을 초월한 무언가다.검술계에서는 가히 코스믹 호러적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솔직히 말해서, 엘렌 왕자라면 꽃꽂이를 하면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웃자고 하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생각하니 진짜 될 것 같아서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다.그런 괴물을 상대해야 하는데, 한가롭게 꽃꽂이를 할 수는 없었다.나는 엘렌 왕자와 달리, 꽃꽂이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꽃꽂이… 재밌는데.”“안 해보셨잖아요.”재밌긴 하겠지.지금 엘렌 왕자의 모습을 보면, 그냥 그 데이지라는 여자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뭘 해도 재밌다고 말할 것이다.“그렇게 좋습니까?”“…응.”수줍게 돌아오는 대답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아니, 이쯤 되면 궁금할 정도였다.도대체 얼굴이 얼마나 예쁘면, 별것도 없는 만남에서 이렇게 반한거지?“그, 그럼. 내일 부활동 신청하러 가는데.”기숙사도 제대도 못 찾으니, 동아리실 찾아가는 게 걱정이 되었나 보다.“진짜 동아리실에 데려다만 줄겁니다.”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내뱉는 말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도, 돌아올 때는?”“알아서 돌아오세요.”아니면 그 친절한 데이지 씨에게 같이 가자고 하던가.그렇게 말하자 화들짝 놀라며 부끄러워하는 왕자를 데리고, 식당에서 밥을 먹었고.그대로 기숙사로 돌아와 일주일 후에 보자던 단장에게 핵폭탄을 투하.왕실에 비상이 걸리고, 데이지라는 사람에 대한 신상 조사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어제의 일이었다.그 이후, 잠을 자고.새벽에 일어나서 아침 훈련을 하고.별로 중요하지 않은 강의 2개를 듣고.강의가 끝나자마자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엘렌 왕자를 이끌고 구교사 구석에 처박힌 꽃꽂이부 부실의 문을 연 순간.시발.“……”초인적인 인내로, 입밖에 튀어나오려는 말을 참아낼 수 있었다.“어.”솔직히 말해 한번 보고 싶었다.도대체 어떤 얼굴이기에, 얼굴과 검술은 대륙에 손꼽힐만한 엘렌 왕자가 한눈에 맛이 갔는지.근데, 문이 열리자 마주친 얼굴은 매우 익숙한 얼굴이었다.만난 지 하루밖에 안되었으나, 나에게 매우 큰 충격을 준 인물이었으니까.“소검제.”“……아스란이라고 불러라.”어제와 달리, 퉁명하게 대답하는 녀석이 신경 쓰였으나.그 너머에 존재하는 얼굴들도 참으로 익숙하였기에, 아스란 녀석에게만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뭐지, 시발.잠시 뒷걸음질 친 나는 고개를 들어 교실 명패를 확인했다.-꽃꽂이부내가 생각한 꽃은 장미나 국화 그런 것이었는데.아무래도 여기는 인외마경에서 자라나는 꽃들을 수집할 모양이었다. * * *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제국 아카데미에 다니는 이유는 온전히 엘렌 왕자를 위해서였고.약간의 사심을 더한다면, 내 개인 실력의 향상을 위해서이기도 했다.거기에 이곳은 내가 자고 나란 레온 왕국이 아닌, 엘레라스 제국.레온 왕국에서도 아는 얼굴이 많지 않은 나인데, 제국의 사람들을 알 리가 없었다.그렇기에 익숙한 얼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으면 안 되었다.정확하게는 모여 있더라도 아카데미의 중요 행사에 모여 있어야지, 꽃꽂이부의 작은 부실에 모여 있으면 안 되었다.내가 아는 얼굴이라는 것은 왕실 정보국이 조사한, 대륙 정세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인물들이었기에.“……”일단,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새끼, 소검제도 그렇고.“입부 신청자라.”자기도 조금 전 신청하여 정식 부원도 아닌 주제에, 대선배라도 되는 듯 이걸 받아줘야 하나 고민하는 마법싸개 나라의 왕자 놈도 그렇고.“……”관심도 없다는 듯, 눈을 감고 벽에 기대어 있는 마경과 제국의 국경을 담당하는 변경백의 자식새끼도 그렇지만.“부원 신청이 많아, 그녀가 기뻐하겠군.”하루 먼저 입부하여, 이곳에서 유일한 정식 부원인 제국의 황자 새끼는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시발, 아니. 알 것 같기도 하다.존나 로판 도입부잖아.데이지 양, 로판 여주셨나요?갑자기 꽃꽂이 동아리에 가입해야 할 이유가 수십 개가 떠올랐고.동시에 꽃꽂이 동아리에 가입하면 안 되는 이유가 수십개 떠올랐다.전자는 왕국의 교육관으로서, 꽃꽂이 동아리에서 일어날 일들을 모두 확인 보고 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고.후자는 전생에서 읽은 판타지, 로판 계열의 사건 사고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와씨, 이걸 합류해야 해? 도망쳐야 해?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어?”낡은 문 때문인지,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두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아마 여주 친구랑 또 다른 남주 후보나 보네.그런 생각으로 남자부터 확인하니, 역시나 익숙한 얼굴이었다.대륙 3대 상단 중 한 곳의 후계자.그런 새끼가 장사나 할 것이지, 왜 아카데미에 입학했나 했는데.로판의 남주에 합류하려고 했었구나.“……”그다음 시선을 돌리자, 두 명의 여자가 보였다.한 명은 금발의 화사한, 로판 여주에 가까운 인상을 했고.다른 하나는 보랏빛 장발의, 여주 친구처럼 생긴 인상을 했다.시발, 망했네.뭘 해도 로판으로 생각하게 되어 버렸다.“신입 부원이에요?”그때, 로판 여주로 추정되는.아니, 데이지라고 추정되는 여인이 말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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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흠, 맞다.”“조금 전에…”“어제 만난…”동시에 소검제, 마법싸개, 엘렌 왕자가 대답하는 순간.마음의 소리가 외치고 있다.“아, 저는 아닙니다.”도망치라고.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튀어나온 대답과 함께 빠르게 동아리실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