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이 로판이었다.(2)
내 인생이 로판이었다.(2)
-우리, 일주일 후에 보자고 하지 않았냐?통신구 너머, 수척해진 단장의 얼굴이 보였다.소드마스터 쯤 되면 일주일을 잠들지 않아도 멀쩡할 텐데.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저런 몰골이 되다니.참으로 걱정이 되었으나, 우리 왕자님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저도 그러고 싶었는데요.”나도 매일 단장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엘렌 왕자의 첫사랑 소식에 저런 몰골이 되었는데, 그 라이벌들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변할까.곧 보게 될 미래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또 뭔데…벌써 축 처진 목소리가 안쓰러웠으나, 어차피 알려야 할 사실이었다.이 세계가 로판이든 아니든, 그 조합으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그게.”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해주었다.정말 이 세계가 로판이라는 의심을 1도 집어넣지 않고, 그저 내 눈으로 목격한 사실을 과장 없이 말한 것이다.-지랄하지 마라…그랬는데, 단장의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교육관이 되고 난 이후,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말이었다.루시아 선배가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듯, 매주 세 번씩 사직서를 찾아와도.내가 이 금액으로는 단가가 맞지 않기에, 소드마스터인 단장보다도 더한 연봉을 청구하더라도 허허 웃던 사람이었는데!“안타깝지만, 사실입니다.”-거짓말! 제발 거짓말이라 말해라!단장이 애원하듯 소리쳤으나, 그렇다고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포기하시면, 편해요.”-끄아아악!말 잘 듣고, 재능 넘치던 엘렌 왕자의 첫 일탈에 단장이 울부짖었다.안타까운 일은, 저 한탄과 고통은 단장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연락이 끊기는 순간, 교육관들과 연관된 인원들에게 퍼지고.그 끝에는 정보부가 있겠지.그리고 정보부를 시작으로 시작된 새로운 소식들은, 역순으로 진행되어 단장에게로 향할 것이다.그리고 그 끝에는 내가 있겠지.시발, 엘렌 왕자가 헤스티아 왕녀를 때려잡을 때 은퇴를 해야 했는데.-…일단 우리가 알아낸 정보는 이렇다.바로 이렇게 말이다.“안 들으면 안 됩니까?”-당연한 소리를.하루 사이에, 머나먼 제국의 데이지라는 인물에 대해 조사를 끝냈다니.역시 정보국, 일을 잘하는구나.-제국에서도 촌동네 취급을 받는 남작가 영애더구나.“그렇군요.”전통적인 로판 여주 다운 배경이다.내가 기억하는 최근 로판은, 여주가 공작가 악영 영애 출신인 것들이 많았는데.-어떻게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배경이 없더군.“그렇군요.”이 또한 흔한 로판 여주다운 배경이었다. 저러고 숨겨진 배경이 있는 것이 보통이었지.알고 보니 남작가의 친딸이 아니거나, 어린 시절 전설의 마법사에게 마법을 배웠다거나.아니면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자신의 재능을 깨우치는 스토리도 있었던 것 같았다.-꽃꽂이부에 들어간 이유는, 그냥 꽃을 좋아해서라는군. 애초에 영지 특산물이 데이지 꽃이라니.“어떻게 영지 특산물이 영애 이름…”-그러게 말이다. 근데, 또 가족들은 화목한 편이라고 하니. 대충 지은 이름은 아닌 것 같더군.그 외의 정보들도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다만.-꽃꽂이부는 최근까지 부장과 데이지 영애, 둘뿐이었다고 한다.어제까지라는 말에 단장이 한탄했으나,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부장이 따로 있다고요?”순간 로판 여주 친구처럼 생긴 보라 머리가 부장인가 싶었으나, 이어지는 단장을 말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그래. 올해 졸업 예정인 4학년 남학생이 부장이라고 한다.남자가… 또 있다고?심지어 선배 포지션?-다행히, 그 친구는 평범한 친구였다.평범하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이 세계의 장르가 진짜 로판이라면, 여주와 첫 연이 닿은 남자는 절대 평범할 리가 없었다.“그쪽 정보 좀 주시죠.”-별 것 없다만.단장이 떠드는 내용은, 정말로 별 볼일이 없었다.나조차도 그냥 내가 너무 세상을 로판으로 생각했나 생각할 무렵.-아, 초상화도 구했다.“……”역시 이 세상은 로판이구나!순간 그렇게 소리칠뻔했다.그도 그럴 것이…“실눈이군요.”이 새끼, 실눈캐였다. * * * 제국 공립 아카데미, 4학년 벨리안 에리크.그는 수업이 끝났으나, 교실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왜, 이렇게 된 걸까.”에리크 자작가의 3남으로서, 공부 머리가 괜찮아서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다.평범한 자작 가문에서, 제국 아카데미를 입학하다니.부모님과 형들, 동생들의 기대를 받으며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그의 인생이 크게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성적은 중간. 필기를 제외한 다른 재능은 전무.집안에서나 아카데미에서나, 먼저 나서는 일이 없었고.그렇기에 교우 관계도 평범한 편이었다.그냥, 비슷한 학생들끼리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느낌이랄까.그런 그에게도 제법 친했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꽃꽂이부의 선배들이었다.동아리 인원이 열 명도 되지 않는, 언제 폐쇄될지 모르는 작은 동아리.그렇기에 좋았다.그냥 가볍게 만나서, 가볍게 즐기는. 그러면서도 특유의 끈끈함이 있는 그 분위기가.적은 인원수와 별 것 없는 동아리 활동 내역에 폐부 위기를 몇 번이나 겪었고.그것을 간신히 해결할 때마다 부원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유대가 진해졌으니까.“이게 다 선배님들 때문이야.”-꽃꽂이부가 이렇게 끝나는 것은 너무 아쉬운데.작년에 졸업한 세 명의 선배를 끝으로, 꽃꽂이 부는 폐부가 될 예정이었다.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벨리안 이후로 꽃꽂이 부에 들어온 신입생은 없었고, 아무리 부활동에 자유로운 제국 아카데미라고 하나.1인 동아리 같은 곳을 유지시키지는 않았으니까.그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가 계속 떠올라, 벨리안은 평소답지 않게 용기를 내었다.입학식 당일, 신입생들이 몰려나오는 강당 앞에서.수많은 동아리가 자신을 홍보하는 그 자리에, 벨리안은 평소에 쓰지 않았던 용기를 모두 모아 노력했고.“꽃꽂이부요?”“어, 어!”그곳에서 우연히, 한 신입생을 만나고 말았다.이름은 데이지. 파르반 남작가라는, 작은 시골 동네 가문이었다.어쩐지 익숙한 느낌이었다.자신은 물론, 전대 꽃꽂이부의 부원들도 비슷한 처지였으니까.심지어 꽃을 좋아한다고 하니, 여신께서 인도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심지어.“제 친구도 데려와도 될까요?”
d3kza0VLSVdxajZ6L09aWC8xUnR2RC9adDFnQ1g1c213R0RERmdmVE9ra05NbnZzNXVxaVdmelM2dTZmK3Z2Yw
놀랍게도, 같이 입학한 소꿉친구가 있다고 한다.이것으로 동아리 최소 조건인 3인을 채울 수 있게 되었다.물론, 말 그대로 최소.세 명으로 동아리를 유지하려면 약간의 활동이 필요했으나, 이미 온몸 비틀기로 동아리를 유지하던 꽃꽂이부였다.자신이 있었다.적어도 자신이 졸업하는 그 순간까지, 꽃꽂이부 동아리를 살려낼 자신이.언젠가 우연히, 졸업한 선배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적어도 내가 졸업하기 전까지는 꽃꽂이부를 유지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아닌가? 내가 욕심을 낸 탓인가?”거기까지는 좋았다.데이지와 그녀의 소꿉친구라는 바이올렛.남자 하나에 여자 둘.어울리지 않게, 청일점이 되었으나.벨리안은 단 하나의 사심도 없이, 자신이 좋아했던 꽃꽂이부의 일상을 그녀들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드물게 사계절을 느낄 수 있는 제국 아카데미에서, 다른 지방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꽃들을 관찰하고.그것을 계절에 어울리게 수놓으며, 일상의 사소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온갖 고위 귀족들과 천재들에게 치이는 아카데미 생활에서, 사소하지만 소중한 행복을 그녀들도 느낄 수 있기를 순수하게 바랬다.“부원 더 찾아올게요!”그렇기에, 그렇게 말하며 의욕을 보이는 데이지의 모습에 웃으며 그래 주면 고맙다고 말했었다.원래 끼리끼리 논다고, 특별한 능력도 없어 보이고.가문도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자신과 비슷한 데이지가 누군가를 데려와봤자 우리와 비슷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것이 잘못이었다.“신입 부원, 에시드라고 합니다.”올해 신입생 중 에시드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가 또 있던가.아니, 있더라도 백발에 붉은 눈을 한 친구가 있을 수가 있나?갑자기 등장한 제국의 황자에 벨리안은 반쯤 꺾인 무릎을 마저 굽혀야 할지 펴야 할지 고민했다.그렇게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황자의 동아리 활동 신청서를 받고.기숙사로 가서 잠들고. 일어나고. 아카데미에 등교하고.필기 하나 하지 못한 채, 수업을 전부 반쯤 흘려듣고.사실 이건 다 꿈이 아닐까.‘그래, 아닐 거야.’아무리 황위를 받을 확률이 낮다고 하지만, 아직 차기 황위가 정해지지도 않았는데.바쁘신 황자께서, 다른 동아리도 아니고 꽃꽂이부에 들어올리가 없지.그렇게 생각하며 들어간 동아리실에는.“신입 부원 예정자들이에요!”활기차게 웃는 데이지와 함께, 마경의 입구가 열려 있었다.그게, 어제의 일이다.“선배들. 꽃꽂이부는 이제 불멸이 되었습니다.”모두가 떠난 교실에 앉아, 멍하니 칠판을 바라보며 벨리안은 생각했다.제국의 황자가 하나.기사의 나라의 왕자가 하나.마법의 나라의 왕자가 하나.마경을 수비하는 변경백, 아들이 하나.검제의 손자이자, 소검제라 불리는 이가 하나.제국을 넘어 대륙의 경제를 움직이는 거대 상단의 차기 후계자가 하나.그리고 꽃꽂이부의 부장인 자신 하나.이쯤 되면, 학생회가 단체로 쳐들어와도 물리칠 수 있었다.아니, 자신을 제외하면 한 명으로도 충분하겠지.이걸로 꽃꽂이부의 폐부는 적어도 4년 동안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때려치울까?”하지만, 벨리안의 마음의 평화를 주던 꽃꽂이부는 이미 죽었다.황자가 입부한 그 순간부터 죽어버렸다.상상 속의 꽃꽂이부의 선배들조차 ‘어, 이건 좀…’하고 도망치고 있었다.“그래. 졸업해야 한다고. 공부한다고 관두면 되겠지.”그나마 잘하는 것이 공부 하나였기에, 학업에 노력하는 편이었고.그렇기에 졸업 학점 이미 챙긴 상태였지만, 더 채워서 나쁠 것은 없었다.어차피 가문을 이어받지 못하는 상황.별 볼 일 없는 가문의 출신인 자신의 가치를 올릴 수 있는 길은 제국 공무의 길을 걷는 것뿐이었으니까!“그래, 부장은… 일단 데이지에게 말하면 누군가 받겠지.”자신을 제외하면 남자부원 중 소검제가 가장 만만한 동아리였다.그런 곳에서 부장이라니, 제 명에 못 살지.“안녕하세요, 선배님?”“아, 네?”그렇게 각오를 다시고 교실을 나오는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아니 기다린 것이 확실한 후배가 튀어나왔다.“제가 아카데미 관련해서, 궁금한 것이 많은데. 잠깐 상담 좀 해주실 수 있습니까?”아니요.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최근에 있었던 일들로 인하여 위기 감지 능력이 발달한 벨리안이었다.이건 자신의 의사를 묻는 게 아니었다.그냥, 닥치고 따라오라는 포식자의 목소리였다.“그, 그래.”벨리안이 입학할 당시만 하여도, 1학년이 까마득한 선배인 4학년에게 따라오라 말라 할 수 없었으나.‘그때와 지금은 다르지!’검제와 전대 마탑주가 수석 교수를 맡은 상황.올해 신입생은 그야말로 제국 아카데미 황금기의 시작인 인원들이었다.멀리 갈 필요도 없이, 어제 동아리실만 떠올려도 되었다.그렇기에 아카데미의 작은 카페, 자연스럽게 차 두 잔을 가져온 후배를 벨리안은 긴장한 모습으로 바라보았다.“아, 그러고 보니까 아직 자기소개를 안 했네요. 레온 왕국 출신의 애덤 스미스라고 합니다.”“……”들어본 이름이었다.검제의 수업 첫날, 소검제를 가볍게 이긴 괴물과 똑같았다.“말이 길어지는 걸 싫어해서, 바로 본론을 말하자면. 저희 왕자님이 입부하셨잖아요?”“그, 그랬지.”“그냥, 잘 좀 부탁드린다고요.”아니, 나 그만둘 건데.“왕자님이 좀 많이 소심하셔서. 다른 학생들이랑 잘 못 지내실 것 같은데. 부장님 같은 분이 조금 힘을 써주신다면…”아니, 나 진짜 그만둘 건데!“어, 어. 그래.”하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본심과 달랐기에.“어서 오세요, 부장님!”그는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결국 꽃꽂이부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