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 시간 (2)
청소 시간 (2)
"행정이 최상인데, 부패가 최악일 수 있나?" 돈의 흐름을 파악하는 능력이 최상인데, 부패가 최악이라면. 부패 또한 돈의 흐름으로 인정 받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는 건 즉 세금 자체가 합법적인 루트를 통해 국익이 아닌 곳에 쓰이고 있단 거겠지. "국고에 빨대가 대체 몇 개나 있길래 이런 결과가 나오는가." 벨로스 제국은 모든 힘이 황권에 집중되어 있는, 귀족파 세력은 찾아볼 수 없는 형태를 띄고 있었다. 근데 그런 곳에서 부정부패가 일어난다? '황권파 밑에서 서로 사이 좋게 나눠 먹고 있는 건가.' 황제가 되고자 하는 욕심만 없다면. 황권파는 정말 그 어디보다 안전한 그늘일 거다. 등잔불 밑 바로 아래. 그곳에서 황권을 강화한다는 이름으로 세금을 빼돌리고 있는 거였다. 그것도 특정 개인만 하는 게 아닌 시스템 자체를 그렇게 만들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고가 평균인 이유는. 그건 제국이 아직 위세를 잃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희귀 자원이 심심하면 발견 되는 거대한 땅덩이. 압도적인 인구수와 이를 바탕으로 한 폭 넓은 인재풀. 바다를 꽉 잡고 있는 무역망과 강력한 군대, 가장 선진적인 문화 등. 다양한 요소들이 부패가 최악임을 달리고 있음에도 단단히 제국을 지탱하고 있는 거였다. 심지어 2황자가 그 위에서 기둥을 오함마로 때려 부수며 춤을 추고 있기까지 한데 말이다. '진짜 제국 설정 대단하네.' 소설을 읽을 때만 해도 2황자 내쫓고 황제 찾고 그러면 금방 제국이 정상화 될 줄 알았는데. 이거 뚜껑을 열어보니 어디부터 건드려야 될 지 모를 정도로 문제가 심각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 직위가 말단이 아니라는 것. 황제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행방불명된 지금. 나라를 대신 다스리고 있는 건 실질적으로 황태자인 나였기에. 내가 나선다면 문제가 금방 해결될 듯 보였다. '문제가 많긴 한데, 일단 부패가 최악인 걸 미룰 순 없겠군.' 원래라면 적을 명확히 하기 위해 역사 같은 것도 명확하게 공부하고. 황태자의 기억을 더듬으며, 다양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는데. 지금은 그것보단 일단 실시간으로 제국을 썩게 만드는 것들을 뽑아낼 필요가 있었다. 일단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돈이 어떻게 빠져나가는 지 파악하는 거였고. 사실 그 부분은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었다. '2황자, 그놈한테 빨대를 꽂은 거겠지.' 솔직히 너무 쉬운 일 아니겠는가? 마세린 왕국으로 여러 자원을 보내준다고 했을 때. 그 자원을 이동하려면 당연히 품이 들 테고, 그 품 드는 비용에 장난질을 조금만 쳐도. 비용은 순식간에 부풀며, 주머니에 넣기 이보다 더 쉬운 구조가 없을 거다. 해서 지금 가장 필요한 건. "...방금 전에 외무 담당관한테 부탁했던 투자 관련 리스트인가." 원래라면 혼자 확인하고 읽으면서 2황자의 멍청한 짓을 파악하려고 했는데. 거기에 다른 놈들이 숟가락까지 얹은 게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이라면. "이건 혼자 볼 게 아니네." 난 내 방 앞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에게 말을 전했다. "내일 아침, 국무회의를 진행하니 그 누구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라 그리고 빠진 자가 있다면 엄히 벌할 것을 알려라." "충!" 뒷돈 챙긴 놈들 얼굴 볼까. ++++++ 황태자의 침소를 지키고 있던 기사, 데이런트. 그는 황태자의 명을 받자마자 곧장 몸을 움직였다. 귀족들에게 의사를 전달하기엔 굉장히 늦은 시각. 하지만 기사는 명령에 의문을 표하는 존재가 아니었기에. 그는 일을 보다 완벽히 그리고 효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바로 발걸음을 귀족들이 머무는 관저가 아닌 근위 기사단 관저로 향했다. "누구냐." 근위 기사단 관저 근처로 가자마자 날카롭고 묵직한 음성이 귀에 꽂힌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머리에 구멍을 내겠다는 듯. 날카로운 화살촉이 달빛에 반사조차 되지 않고 목숨을 위협한다. "금일 황태자 전하의 침소 경계를 담당한 데이런트." "침소 경계는 보통 둘이 하지, 그럼에도 자리를 지켜야 할 텐데. 본분을 잊고 이곳에 온 이유가 무어냐." "황태자 전하께서 내일, 정확히는 금일 아침 국무회의가 있을 예정이니 이를 귀족들에게 전달하라 하셨습니다." "그럼 혼자서 전달하면 되지, 어째서 이곳에 왔느냐." 같은 소속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하고 냉철한 대화.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은 이 대화의 긴장감은. "황태자 전하께서 빠진 자가 있다면 엄히 벌할 것을 알리라 하셨습니다." 데이런트의 대답에. "...황태자 전하께서 엄히 벌을 하실 순간이 올 수도 있단 말이냐?" "네, 그렇습니다." "귀하의 판단을 높이 산다. 잘 왔다." "감사합니다." 순식간에 깨졌다. 스윽. 활을 겨누고 있던 초병은 활을 내리고 품 안에서 종 하나를 꺼냈다. 퉁. 종에 마나를 불어넣은 후 가볍게 손가락으로 종을 건드리자마자. 일반적으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가 근위 기사단 관저를 거세게 때린다. 훈련 받은 자들만 들을 수 있는 호각 소리. 그 소리에 눈 깜짝할 사이에 기사들이 전원 무장을 하고 초병 뒤에 나타난다. "뭐야, 무슨 일인데? 태양 종을 왜 새벽에 울려, 다들 자고 있었는데." "태양 종을 울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근데 진짜 왜야?" "아으, 잘 자고 있었는데... 꿈 속에서 엄청난 미녀랑 뒹굴고 있었단 말이다." "빅스,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강판에 갈린 니 면상에 엄청난 미녀는 너무 사치 아니냐? 꿈이어도 과분하다." "이 새끼가!" 낄낄낄낄. 태양 종을 이용해 기사들을 호출했지만, 사실 이런 호출 자체는 굉장히 흔했다. 항상 경계 태세를 갖추란 의미에서 가끔 아무 일 없이도 태양 종을 울려, 기강을 확인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모이긴 모였으나 다들 해이한 상태 속. 활을 든 기사의 말이 차분하게 이어졌다. "황태자 전하께서 명을 내리셨다. 내일 아침, 국무 회의를 진행하실 예정이니 참가해야 하는 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사실 이 부분까지 문장이 이어졌을 땐 다들 '그래서 뭐?'라고 이마에 써진 상태였다. 고작 귀족 부르는데 자고 있는 근위 기사들을 새벽에 전부 호출한다고? 굳이? 그런 의문이 이어지려는 순간. "...빠진 자가 있을 시 엄히 벌할 것을 알려라." 뒷말이 이어지자마자 서로 꿈 이야기를 하면서 놀고 있던 소리가 뚝하고 끊겼다. 교수형을 집행 당하는 사형수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처럼, 툭. 그리고 자연스레 다시 활을 든 기사의 말이 이어졌다. "생애 처음 황태자 전하께서 엄히 벌할 것을 알리셨다. 이를 우습게 여기는 자들은 곧! 벨로스 제국을 우습게 아는 것이며, 이는 곧 반역이다." "반역이다!" "대장군께 이 사실을 알려라, 여태 웃고 계시던 태자께서 드디어 칼을 꺼내셨음을! 태양의 빛을 마냥 따듯하다 여기고 있던 자들에게 작열의 고통을 새길 시간이 됐음을!" 대장군부터 시작해서 근위 기사단들까지. 그들은 행정, 정치, 외교 등 그 어느 것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오직 그들이 신경 쓰는 건 제국을 지키는 것 뿐. 그렇기에 제국을 좀먹고 있는 것들이 활개칠 때도 가만히 있었다. 보급이 나날이 후져지고, 무기의 품질이 안 좋아지며. 봉급 날짜가 애매하게 밀리거나, 서류 처리가 제때제때 안 될 때도 참았다. 명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태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명령을 내리기 싫어하는 사람. 그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고, 자애롭게 웃는 자. 근위 기사단은 자신의 주군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쉽다 느꼈다. 그 웃음 속에 숨겨둔 강함을 조금이라도 꺼낸다면, 제국을 좀 먹는 것들이 입도 뻥긋 못할 텐데. '드디어... 드디어...!' 물론 당장 벌을 내린다고 하신 것도 아니다. 불참한 자들은 엄히 벌할 것을 알리라고 하신 것 뿐이다. 허나. "황태자 전하께서 드디어 칼을 뽑으셨다." 근위 기사들은 알고 있었다. 이게 시작에 불과할 것임을. 지금부터 칼날을 세워야 할 것임을. 그러기 위한 첫걸음이다. 그렇기에 절대로 허투루 할 수 없었다. "제국의 칼이 녹슬지 않았음을, 건방진 귀족들에게 보여주고 오겠습니다." 때 아닌 새벽. "아, 아니 지금이 대체 몇 신데... 몇 신데 침소에 와서 이런단 말이오!" "황태자 전하의 명이다, 명을 받는데 그따위 태도가 맞는가?" 쨍그랑! "이, 이게 무슨 짓이오!" "근위 기사가 황태자 전하의 명을 받고 관저에 진입하려 하는데, 이를 막았기에 벌을 내렸을 뿐이다. 내가 잘못했다 생각하나?" "히이이익!" 제국의 칼이 움직인다. 물론 근위 기사단이 이렇게 움직이고 있단 사실을. "...아, 스마트폰 없으니까 잠이 잘 안 오네." 황태자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 "대체 새벽에 무슨 일이었던 거요?" "황태자 전하의 뜻이 그렇다는데, 무슨 일인지 아는 게 중요한가? 태자 전하가 허 하신 일이란 게 중요하지." "그니까 갑자기 이러시니까, 처음 있는 일이라 당황했다 이 말 아니오." "온화하신 황태자 전하께서 갑자기 변하시긴 했지, 엊그제부턴가...." "허, 근데 국무 회의에서 이렇게 다들 모이는 건 거의 처음 아니오?" "여태 그렇게 명하신 적이 없었으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모으시는 건지." 소란스러운 원탁 회의실. 귀족들은 새벽에 갑자기 기사들이 들이닥친 것과 아침부터 강제 참석한 점. 이 두 가지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게다가 모이라고 한 시간을 넘겼음에도. 황태자는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자. "아니, 우리는 오라고 해놓고 당사자는 대체...." "새벽에 사람을 깨울 땐 언제고, 참." 그렇게 서서히 귀족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을 무렵. 쿵! 원탁 회의실 문이 거세게 열리더니. 척척척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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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이 하나둘씩 원탁 회의실 내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기사들이 어찌 원탁 회의실에 무장을 하고 들어온단 말인가!" "어찌 이런 무장으로 황궁에 발을 들일 수 있단 말인가!" 귀족들은 모두 처음 겪는 일에 놀라며 기사들의 입장을 말로 제지하려 했지만. 기사들은 귀족 쪽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원탁 회의실에 들어왔으며. 척척척. 처음부터 정해진 자리였던 것처럼. 원탁 회의실에 앉은 귀족들의 뒤에 섰다. "이, 이건 명백한 위협 아니오!" "대체 이게 무슨! 누가 꾸민 일이오?! 황태자 전하께서 이러실 리 없...!" 그렇게 계속 귀족들의 반발이 터져나오고 있는 가운데. "정숙, 황태자 전하께서 오십니다." 기사들이 들어가고 마지막 꼬리. 대장군이 나타나 기세를 드러내며 분위기를 순식간에 죽였고. 회의실이 조용해졌음을 알자마자 대장군은 한 걸음 옆으로 빠졌으며. 그 빈 자리를. 스윽. 황태자가 채웠고, 이내 천천히 원탁 회의실 상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붙는 대장군. 항상 웃고 다니는 황태자의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얼굴. 모든 상황이 낯설기만한 귀족들이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탁. 황태자는 오늘 아침에 확인한 마세린 왕국 투자 관련 자료를 회의실 탁자에 뿌리며. "다들 이른 아침부터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자리에 앉았다. "그럼 지금부터 국무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쿵! 원탁 회의실 문이 굳게 닫혔다. "...."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는 몇몇 귀족들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죽어가고 있는 걸 확인하며. "마세린 왕국에 대한 투자, 누가 관리했습니까?" 황태자, 벨론은 본격적으로 청소 시간의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