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정상화 시켜줄게
곧 정상화 시켜줄게
미르네는 정령 친화력이 좋지만 고위 정령과 계약을 맺을 정도의 힘을 갖고 있지 않다. 해서 원래라면 이런 경우엔 최하급 정령부터 차근차근 계약을 맺겠지만. 세계의 사랑을 받고 있는 미르네는 굉장히 특수한 경우로 정령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건 바로 정령이 본인이 가진 힘만 사용하여, 미르네에게 힘을 빌려주는 것. 원래 정령 계약이 발신자 부담 통화를 기본으로 깔고 간다면. 미르네에게만 특수하게 수신자 부담 통화로 바뀐 것이다. 힘을 쓰면 쓸수록 정령 사용자에게 부담이 가는 게 아닌. 정령 자체에 부담이 가는 구조, 이 구조의 장점은 계약을 하지 않아도 정령의 힘을 쓸 수 있다는 것. 계약을 하지 않았다는 건.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아예 모르겠습니다." 지금 상황을 시치미 뗄 수 있단 것이다. 미르네가 아무리 섣부른 행동을 했다고 하지만. 지금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다. '약소 왕국 주제에 제국의 황태자에게 정령을 통해 감시를 하려 했다.' 이는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명백한 선전포고였다. 굳이 전쟁을 하지 않고도, 많은 걸 뺏길 수도 있는 상황. 여기서 미르네가 할 수 있는 건.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하, 그럼 이 정령이 정말 우연히 나에게 온 거란 말인가?" "네, 네... 그렇습니다. 해서 저도 놀라서 이름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영상으로 이어져 있는 것도 아닌데, 비명 소리만 듣고서 진명을 알 정도로, 마세린 왕국의 왕세녀께서 정령 친화력이 있을 줄이야. 이것 참 나라의 경사로군." "가, 감사합니다." 필사적으로 의심을 떨쳐내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치이이이이익. "캬아아아아아악!" "호오, 실제로 계약되지 않았는지... 정령이 고통 받고 있는데, 왕세녀께선 그 어떤 부담도 느끼지 않고 있구려." "제, 제가 왜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실피네르의 고통 소리가 들림에도, 미르네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만약 지금 상황에서 사실 저 정령이 자신의 것이라 말한다? '예측할 수 없는... 지금 황태자의 행보가 어떻게 될 지, 정말 전쟁이라도 일으킬 기세잖아.' 그 후환을 감당할 수 없다. 그렇기에 외면해야 한다. '근데 대체 어떻게... 황태자가 정령을 붙잡을 수 있는 거지? 그럴 수가 있나?' 황태자에게 그런 능력이 존재할 줄이야. 애초에 감시를 하라고 해도 가까이서 하는 게 아닌. 굉장히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보고만 있는 걸 텐데, 대체 어떻게 들킨 걸까.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는 가운데. "하하, 그럼 내가 괜한 의심을 하여 왕세녀에게 연락을 취한 건가? 기분 나쁘다면 미안하게 됐네." "...아,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기분도 나쁘지 않은걸요." 미르네는 뒷목에 식은땀이 나는 걸 느꼈다. 얼굴 하나 보이지 않고, 음성 전달만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실제로 대면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님에도. 생전 처음 미르네는 목에 날카로운 칼날이 들어와 있는 기분을 느꼈다. 주변에서 항상 왜 이렇게 잘해줄까 싶을 정도로 느꼈던 호의 가운데, 낯선 살의가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다. "이 아티팩트의 용도가 참으로 좋구나, 이걸로 2황자랑 그렇게 친근하게 연락을 했다지. 사적이든, 공적이든." "...다 황태자 전하의 은덕이 있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해서 그 은덕의 한도를 정했지, 그냥 남녀끼리 사이 좋은 이야기만 하면 되지 않으니까." "마, 맞습니다. 이제부터 모든 부분은 황태자 전하와 나눠야죠." "그걸 왜 왕세녀와 나누는가, 마세린 왕국 또한 왕이 있을 텐데." "...." 철저한 배제.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지만, 여태 그 누구도 지적하지 않은 부분. "아무튼 진명을 알려줘서 고맙군, 덕분에 계약이 편하게 되겠어." 긴장감 속 담담한 황태자의 말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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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계약을 하시려는 겁니까?!" "당연하지 않은가, 딱 봐도 잠재력이 엄청나 보인 정령이 알아서 굴러 들어왔고... 진명도 알았으니 말이야." "추, 축하드립니다." "하하, 고맙구려. 괜히 쉬고 있는 사람 붙잡고 시간 할애를 했군, 미안하네." "아, 아닙니다. 편하게 연락주소서." "그리 말해주니 기분은 좋군."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끝나나? 싶은 순간. "그러고 보니 우리 2황자가 잘못된 판단으로, 멋대로 우리 백성을 마세린 왕국으로 귀화시켰더군." "...귀화 말씀이십니까?" "그래, 귀화. 그건 그렇게 혼자 멋대로 정할 수 없는 일인데, 독단으로 일을 했으니 참." "아, 아아... 그, 그게 2황자 권한이 아닌지 몰랐습니다." "그렇지, 그렇지. 몰랐던 게지? 몰랐으니, 귀중하게 키운 벨로스 제국의 인재를 그렇게 넙죽 받은 것이겠지." "예, 예... 그, 그렇습니다." 누가 봐도 납작 엎드려야 될 상황에서 황태자의 요구가 튀어나왔다. 벨로스 제국 인재들의 귀화, 굉장히 잘 알고 있는 부분이다. 미르네가 2황자 베딘을 잘 꼬셔서, 정말 핵심 인재들을 귀화시켰으니까. 물론 이 과정을 2황자 베딘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그들은 엄연히 벨로스 제국에서 파견한 귀한 인력들인데, 지원을 받은 나라에서 넙죽 삼키는 게 말이 된다 생각하나? 아니면 2황자의 그릇된 결단으로 인한 실수라고 생각하나?" 황태자는 이를 가볍게 넘길 생각이 없었다. "...당연히 실수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게 맞지. 이야기 진행이 빨라서 좋군. 그럼 귀화는 아예 이야기조차 나오지 않은 것으로 하고, 지원한 인력 그리고 현재 하고 있는 투자까지... 왕세녀와 논의한 부분은 전부 다 2황자고, 2황자는 당분간 제국 정세에 관여하지 않을 테니, 다 무로 돌릴 예정이다." "그, 그걸 어찌 이리도 쉽게...!" "하하, 어려운 일이 뭐가 있겠는가. 이리 쉬운 실수도 일어난 마당에." 쉬운 실수. 표면적으로는 황태자가 정령을 붙잡고 왕세녀에게 바로 연락을 한 거라 볼 수 있지만. 실상은 물증만 없다 뿐, 심증으로 이미 거의 다 까발려진 미르네의 실수를 말함이다. "...황태자 전하께서 그 일이 오해이며, 실수라 하셨으니... 황태자 전하의 뜻대로 처리함이 옳겠지요." "이야기가 빨라서 좋구나. 근데 이런 이야기를 내가 계속 왕세녀와 나눠도 되는가? 현왕과 논의를 해야 함이 옳아 보이는데." "아, 아닙니다. 마세린 왕국의 대소사는 모두 저를 거치고 있으니, 염려마시옵소서." 하여 미르네는 바짝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현왕이 아닌 왕세녀와 이야기를 나눠도 사실은 된단 말인가?" "예, 그, 그렇사옵니다." "하하, 다행이군. 그럼 우리 벨로스 제국의 백성들을 부디 안전하게 보내주길 바라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듣자 하니, 우리 벨로스 제국의 인재들이 마세린에 있는 동안 먹고 자고 하는 모든 걸 벨로스 제국에서 댄 것 같던데... 염치가 있으면, 돌아올 땐 빈손이 아닐 거라 믿네." "무, 물론입니다!" "내가 바쁜 사람 붙잡고, 너무 오래 이야기하고 있었군."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그럼 이만 끊겠네." 뚝. 통화가 끊기자마자 미르네는 침대에 털썩 엎어졌다. 태어나고 지금까지, 꾸꾸까까만 해도 사랑 받던 나날이 영원할 줄 알았건만. 이렇게 날 선 반응을 받아본 게 처음이어서 그럴까. 미르네의 심력은 바닥을 설설 기고 있었다. "...황태자에게 대체 무슨 변화가 일어난 걸까." 그래도 다행인 건 아직 제국이 자신을 완전히 척 진 건 아니라는 것. 하지만 명확한 변수가 생겼으니, 미르네는 앞으로의 행동에 더 신중을 기하기로 했고. "흑, 흐윽...." 눈앞에서 무참히 정령을 쳐낸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이 뒤늦게 몰려와 눈물이 터져나왔다. '미안해, 실피네르....' 그 누구의 실수도 아닌 자신의 미련함으로 일어난 결과. 미르네는 오늘처럼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 통화가 끊기지마자. "키에에에에엑!" "야 너 힘 좋다." 거 되게 팔딱팔딱거리네.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정령의 목에 다시금 불꽃을 쑤셔 넣었다. '역시 예상대로 철저하게 모른 척 하네.' 통화의 내용은 예상대로였다. 계약이 되지 않았으니, 시치미 뗄 수 있는 근거는 충분했을 터. '그래도 바로 본명부터 뱉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덕분에 아주 좋은 카드를 손에 넣었다. '근데 생각보다 황태자, 너무 강한 거 아냐?' 2황자가 맞던 걸 보던 와중. 황궁 너머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을 뿐인데. 정신을 차렸을 땐 반투명한 정령 하나가 손에 잡혀 있었다. 이 정도면 정령 친화력이 아니라 정령 지배력이라 불러도 되는 수준. 실제로 손아귀에 잡혀 있는 정령은 바람의 정령임에도 불구하고. 실체를 꽉 잡혀서 어디 가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실피네르, 선택해라. 이대로 소멸 될 건지 아니면 내 도구가 될 지." 정령 계약? 하면 좋지, 근데 나도 나 싫다는 애랑 굳이 친해지려 노력하지 않는다. 애초에 황태자 쯤 되는 위치면 정령이야 얼마든지 계약할 수 있을 터. '놓아준다는 선택지는 없다.' 손아귀에 있는 정령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두 개 뿐인 건 이놈이 주인공의 파트너로 활약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갖든가 아니면 부수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놓아준다는 선택지? 그런 건 없다. 풀어주면 어디로 갈 지 뻔히 아는데 그런 멍청한 선택을 할 리가 있나. "크에에에에엑!" 그나저나. "솔 벨로스... 이거 대체 뭐야, 왜 정령한테 실질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거지? 그것도 소멸시킬 정도의 힘을...." 솔 벨로스, 이 힘 자체는 굉장히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건국 신화에서 위대한 선지자가 하늘에 태양이 둘인 걸 보고, 하나를 삼켰다고 하던데. 그게 어쩌면 단순히 선지자의 위업을 칭송하기 위해 만든 신화적 허용이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비명 말고 다른 말을 뱉어야 의사소통이 되는데, 계속 아프다고만 하면... 이대로 죽는단 거지?" 손에 잡힌 정령을 이대로 죽일까 싶어 힘을 끓어올리려는 그때. "사, 살려줘... 살려줘어...!"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이게 정령의 언어인가. 살려달라고 말하는 정령, 실피네르는 목이 잡혀 버둥거리고 있는 와중에도. 그 작은 손을 열심히 비비며 목숨 구걸을 시작하다. 스르르륵. 이내 천천히 손목 쪽으로 몸을 붙이더니 그대로 손아귀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도망치는 건 불가능. 그렇다면 방금 실피네르가 내린 행동의 의미는. "계약이 됐군, 복잡한 과정 없이 알아서." 진짜 죽을 위기가 가까워지자 알아서 모든 절차를 생략하고 계약을 한 거였다. 원작 주인공의 곁에 있는 정령이면 아무리 못해도 정령왕 정도는 될 텐데. 이런 질 좋은 정령을 아무런 노력 없이 취하게 돼서 정말 기분 좋았다. '이런 식으로 쓰면 주인공도 참 써먹을 곳이 많은데 말이지.' 로맨스 판타지에서 중요한 건 등장인물들과의 감정선이었다. 다양한 남자 주인공들과 여자 주인공의 감정선. 그리고 그중에서 한 명을 고르고 맺어지며, '세계는 평화를 맞이했습니다'로 끝나는. 그 감정선 살리기가 진정한 로판의 재미이자 꽃인 것이다. 해서. '그 관계가 정리되지 않는 한 주인공 자체를 어떻게 할 순 없었는데 말이지.' 주인공을 건드리는 것부터 시작해, 마세린 왕국에 직접적인 압박을 넣는 게 힘들다 예상했는데. 알아서 척척 이렇게 정령을 갖다 바칠 줄이야. '바람의 정령이면, 불의 힘을 사용하는 솔 벨로스와도 궁합이 좋다.' 앞으로 이렇게 멍청한 짓 몇 번만 더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사, 삼촌! 제발, 제발 그만...!" "음, 그래야겠군." "내 말을 들어주는 거야?" "황태자 전하께서 1시간 만 두드리라 하셨는데, 그 시간이 다 되었다. 내일도 다시 할 테니, 이 시간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대장군이 2황자 패는 걸 멈추고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는 걸 확인했다. 아직은 왜 맞아야 하는지 잘 모르는 눈치인데, 억울한 기색도 보이고. '크게 상관 없지.' 어차피 맞다 보면 다 알게 되어있는 게 참된 훈육 아니겠는가. +++++ 귀화 문제부터 시작해서 인재 회수 그리고 보답까지. 이 모든 걸 한 큐에 해결해서 개운한 마음으로 일어난 이튿날 아침. 툭툭, 툭툭. "음?"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허." 어제는 옆 나라에서 감시하러 정령을 파견하더니. 오늘은 아예 창문까지 두드려? 대체 누구야? 그런 생각을 하며 실피네르를 시켜 창문을 열었고. 구구구구구구. 끼이이이, 끼이이이. 새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뭐야.' 전서구 같은 건가? 하얀 새와 파란 새. 실제로 그 새 두 마리의 다리엔 각각 편지가 붙어 있었다. 황태자 방을 정확히 기억해서 전서구를 날릴 수 있는 위치가 누가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면서 편지를 꺼냈고, 전서구들은 내가 편지를 꺼내자마자 곧바로 다시 날아갔다. 먼 거리를 왔을 걸로 추정되는데, 휴식을 취하지 않고 돌아가다니. '엄청 훈련을 받은 것도 있고, 보통 새들은 아니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편지를 여는 순간. "하." 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래, 그러고 보니 분명 로맨스 판타지 속이면 남주가 많아야 되는데. 다들 어디 있길래 이렇게 존재감을 안 드러내고 있나 싶었거늘. "왜 2황자 족치는 걸로 빠르게 멸망 가능성이 안 내려가나 했더니." 하나는 북부대공. 다른 하나는 동부대공. 마세린 왕국 좀 건드렸다고, 대공의 직위를 받은 것들이 다이렉트로 나한테 연락을 한 거였다. 심지어 전서구 내용도 똑같았다. 앞에 붙은 예의와 격식을 차린 미사여구를 싹 다 쳐내면. [ 마세린 왕국에 최근 좀 모질게 굴고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런지 알 수 있을까요? 눈치 ] 이런 식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냥 딱 감이 왔다. 이것들이 '주퍼배'의 남주들이라는 걸. '아니, 그러면 제국에만 주퍼배 남주가 셋이나 있는 거야?' 제국을 크게 세 갈래로 나누면 중앙, 북부, 동부였으니. 이 세 군데서 그럼 마세린 왕국 하나를 지원하고 있었던 거라고? '이러니까 나라가 망하지.' 그래도 참 다행이었다. 먼저 이렇게 나서서 자기가 남자 주인공이라는 걸 티를 내주다니. '니들도 딱 기다려라.' 곧 정상화 시켜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