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3세는 멸망에서 귀환한다
재벌 3세는 멸망에서 귀환한다
“야, 금수저.”“뭡니까, 틀딱.”“새끼가… 이제 막 나가기로 했구나?”“먼저 선빵 날려놓고는 할 소리입니까?”“하. 끝까지 입만 산 새끼…”“…”“…”“…나머지 애들은?”“…저만 남았습니다.”“그러냐. …역시 여기까지인가.”“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없습니까. 들어드리겠습니다.”“유언 남겨서 뭐 해? 너 말고 들을 사람이 누가 있다고.”“…”“그러니까 유언 대신에, 너한테 한마디 남기마.”“말씀하십시오.”“…고맙다.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함께 싸워줘서. 듣던 것보다… 너는 훨씬 괜찮은 녀석이었다.”“…!”“하. 진짜로 갈 때 다됐나 보네. 갑자기 하지 않던 소리나 지껄이는 걸 보니.”“정말로 그런가 봅니다.”“새끼가… 하여튼 주둥이… 나불거리는 건 S랭크 1위에요… 그냥.”“…”“…”“그럼, 저도 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저도 협회장님과 함께 싸울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그러나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조금만 빨리 말할 걸 그랬나.새하얗게 샌 백발, 덥수룩한 수염, 노인의 것이라기엔 거대하고 다부진 체격.헌터 협회장 박강철은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빛을 잃은 그의 눈을 덮어주고, 그의 시체를 들어 나란히 놓여있는 다른 동료들의 시체 옆에 조심스럽게 눕혔다.모두가 마지막까지 함께 싸운 헌터의 시신들이었다.대부분이 상처투성이였고 몇몇은 신체의 일부, 혹은 대부분이 묘사하기 괴로울 정도로 훼손되었지만, 어떻게든 파편을 긁어모아 사람의 형태를 맞추는 데 성공했다.마지막으로 총 일곱 구의 시체, 그 면면들을 확인했다.협회장, S랭크 2위 한지연, 3위와 4위 쌍둥이 형제 김도훈, 김도겸, 12위 박정혁, 14위 밀레이나 리, 그리고 17위 차윤하.문득 왼손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시선을 빼앗는다.[시간의 고리 - F랭크]빛을 잃고 모든 위력을 상실한 반지. 지금은 그저 흔한 은반지일 뿐이다.감정해봐도 아무런 효과가 없는 그냥 반지.-오다 주웠어. 사냥하다가 떨어졌는데, 팔아봤자 돈도 안되고 그래서 네가 대신 처리해.-내가 쓰레기통이냐?언젠가 차윤하가 툭 두고간 것이다.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이제 이 반지가, 내게 남은 동료의 유일한 유품이 되었다.“…”그 반지를 잠시 쓰다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도 따라가야지.”이제 삶을 끝낼 시간이다.마나 하트에서 마나를 끌어올려, 허공에 마나로 거대한 삽의 형태를 빚어낸다.그 삽으로 부서진 콘크리트 바닥 사이로 드러난 흙바닥에 커다란 구덩이를 판 다음, 시신들을 그 안에 눕히고, 파낸 흙을 다시 덮는 것으로 마무리.묘비는 굳이 만들지 않았다.묘비에 적힌 글귀는 묻힌 자가 아닌 남은 자들을 위한 것이며-지금 이 세상에, 나 말고 남은 자는 없을 테니까.주변을 둘러보았다.무너진 빌딩, 박살 난 도로, 콘크리트와 시멘트 잔해들 사이에 드문드문 박혀있는 시체들.완전히 죽어버린 도시.대한민국 어딜 가도, 아니 세계 어딜 가도 이와 똑같은 풍경이 펼쳐지겠지.쿵… 쿵…그렇게 멸망한 세상에 멍하니 서있던 와중에, 저 멀리서 희미한 울림이 들려온다.나는 이 소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이 세계에 멸망을 불러온 존재.외계인, 신, 악마. 인류가 알던 그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한 존재들.다만 그것들에 대해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하나는 인류가 탑을 기한 내에 클리어하지 못한 그 순간, 저것들이 지구에 강림했다는 것.또 하나는, 저것들은 지금껏 헌터들이 상대했던 그 어떤 몬스터들보다도 강력했다는 것.탑이 붕괴한 후 전 세계가 멸망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8년.괴물들은 탑이 소속된 국가를 초토화시킨 다음에는 옆나라로 진군을 계속했다.그 결과 그때까지 탑을 성공적으로 관리하던 국가들조차 다른 국가에서 온 괴물들을 버티지 못하고 소멸.그 소멸된 국가의 탑이 다시 붕괴하고, 더 많은 괴물들이 합류하여 아직 멸망하지 않은 국가로 진출한다.도미노처럼 차례차례 쓰러지는 국가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중국, 북한 순으로 붕괴하는 탑.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괴물들은 다음 타겟을 한반도로 잡았다.대한민국도 마찬가지.헌터들은 계속해서 저항했으나 남쪽으로, 남쪽으로 밀려났고…
d3kza0VLSVdxajZ6L09aWC8xUnR2QzhtU3RoOVdJUWgzUVF5dHl1TWZKMDAxckZTSEpNbnpUMlhveG5rTHBZQQ
그것들과의 최초의 전투로부터 8년, 최후의 저항선이던 부산마저 완전히 붕괴되고 만 것이다.“결국 마지막에는 나만 살아남았네.”S랭크 최하위, 백도현.운명의 장난인지 모르겠지만 S랭크 중 가장 늦게 각성했기에 가장 약했던 내가, 가장 오래 살아남게 된 것이다.하지만 행운도 여기까지.쿠궁- 쿠궁-진동이 점점 다가온다. 나의 최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기왕 이렇게 된 거, 마지막으로 발악은 해봐야지.”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끌어올려 전신의 회로를 순환시킨다.그리고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엉망이 된 6차선 도로 위를 따라 걷는다.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예전의 기억들이 떠오른다.망나니처럼 되는 대로 살며 20대를 낭비했다.그리고 31세, 미국이 탑 공략에 실패했다는 뉴스와 함께 시작된 세계의 멸망.나는 그 과정에서 우연히 각성했고, 뒤늦게 헌터 저항군에 합류했다.최후의 최후까지,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싸웠다.나 또한 마찬가지였고.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 둘 사라졌다.누군가는 도망가다가 죽었고, 누군가는 동료를 위해 희생하다 죽었다.전해들었던, 그리고 직접 지켜보았던 모든 죽음들은 지금도 하나도 빠짐없이 내 심장에 박혀있다.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지금 이 상황을 막을 방법은 없었던 걸까?끝없이 생각하고 후회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그렇게 상념에 빠져 계속 걷던 와중에, 저 멀리서 마침내 ‘그것’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언제 봐도, 몇 번을 봐도 기괴한 것들.어떤 것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살덩이로 된 거대한 고리에 수많은 눈알이 박힌 형태.어떤 것은 빌딩만큼 거대한 거인의 몸에 정체불명의 검은 문양이 새겨진 형태.어떤 것은 사람의 형태. 다만 여덟 개의 팔과 열 개의 다리를 달고 등에 거대한 검은 날개가 돋아난.하나하나가 겹치는 모습 없이 유별났고, 하나같이 소름 끼치는 생김새였다.그런 기괴한 것들이 수십, 어쩌면 수백. 길게 횡으로 늘어선 채 도시를 천천히 쓸어버리며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까드득.다다다-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그것들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저 엿같은 것들에게 마지막으로, 한방 먹이지 않으면 분이 안 풀릴 것 같으니까…!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모두 오른손으로 모았다.우웅-그러자 거대한 푸른빛이 돋아나 대검의 형상으로 화했다.마침내 놈들과의 거리가 삼십여 미터도 남지 않은 시점.선두에 떠있던 살덩이 고리가 나를 눈치채고 모든 눈알을 이쪽으로 향했다.-키기긱.기괴한 소리를 내며, 고리 한가운데가 빛났지만-탓- 서걱!내 쪽이 한발 더 빨랐다.전력으로 도약해, 있는 힘껏 마나 소드를 놈을 향해 내리쳤다.그러나 내 검은 살덩이 고리를 반도 가르지 못하고 중간에 박히고 말았다.우우웅-놈의 중앙에서 모이던 빛은 사라지지 않았고-“아, 씹.”점점 커지던 푸른빛에서 거대한 광선이 나를 향해 쏘아졌다.결국 나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다만, 강렬한 푸른빛에 휩싸이며 의식이 희미해지던 그때, 시야 한구석에서 무언가 희미하게 빛난 듯한 느낌은 들었다-***[시간의 고리에 동력이 공급됩니다.][시간의 고리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습니다!][착용자 백도현의 인과를 되짚습니다.][인과의 분기점을 확인. 착용자가 원하는 미래로 현실을 개변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했습니다.][시간을 되감습니다.]***…이상하다.분명히 전신을 태울 듯이 괴롭던 작열감이 사라졌다.완전히 죽은 건가? 그렇다기엔 의식은 너무 생생한데.화악-그때 갑자기 시야가 환하게 밝아졌다.“윽…”너무도 눈부셔서 눈을 찌푸렸다가, 서서히 시야를 되찾았다.무슨 상황인지 확인하려던 그때.촤악!“으억!?”얼굴을 차가운 무언가가 덮쳤다.…물? 지금 누가 내 얼굴에 물 뿌린 거야?눈을 연신 비비고 간신히 눈을 뜨자-“버러지 같은 놈.”분노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손에 물컵을 쥐고 있는 중년의 남성이 가장 먼저 보였다.깔끔하게 빗어 넘긴 반백발과 단정한 검은색 정장, 깐깐한 얼굴, 각진 안경.나는 그를 알고 있다. 모를래야 모를 수가.고급 원목 책상 위의 명패에 새겨진 그의 이름은 백태석.내 부친이자 대한민국 재벌 순위 3위, 백명그룹의 회장이다.“어…?”영문을 몰라 멍하니 아버지를 쳐다보고 있자니-휘잉-“!?”얼굴로 빈 물컵이 날아와, 간신히 고개를 숙여 피했다.물컵은 그대로 벽에 쳐박혀, 쨍그랑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이 정신 나간 놈. 넌 우리 가문의 수치야!”“…?”“아니, 사고를 쳐도 그럴 듯 한걸 쳐야지. 뭐? 게임에서 시비가 붙어? 그래서 그 현피인지 뭔지 뜨겠다고 직접 찾아가? 사내놈의 새끼가, 비겁하게 경호원까지 대동하고?”“…”무언가, 익숙한 광경이다. 아니,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이미 한 번 겪어봤다.“이, 이…!”분에 겨워 씩씩거리던 아버지가 책상 위의 신문을 내게 던졌다.“읽어봐라. 기사가 어떻게 났는지 두 눈으로 직접 읽어보라고!”대한민국의 유명 일간지. 1면 헤드라인의 제목은 이랬다.[게임 시비에 경호원 대동… 재벌 3세, B랭크 헌터 찾아갔다 ‘망신’]멍하니 시선을 신문 상단으로 올렸다.적힌 날짜는 2030년 2월 12일.정확하게 15년 전의 날짜. 이때의 나는 24살.“…어?”아무래도 나는 돌아온 모양이다.대한민국 3위 재벌, 백명그룹의 망나니로 악명을 떨치던 그 시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