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결여제 (2)
빙결여제 (2)
“우선 차윤하 씨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정리해 볼까요?”서현이 정리해 준, 차윤하에 대한 프로필이 담긴 태블릿에 띄웠다.“이미 알고 있는 건 대충 넘어가죠. S랭크 5위, 이명 빙결여제, 최근 유세화와 라이벌 관계로 엮임…”쭉 스크롤을 아래로 내리다, 어느 지점에서 손가락을 멈췄다.[소속 길드: 블랙소드]“블랙소드 소속.”블랙소드. 백명과 마찬가지로 국내 굴지의 재벌, 세강그룹 산하의 헌터 길드.몬스터가 드랍하는 각종 소재와 신자원, 그리고 지구에 존재하지 않던 신기술로 제작된 아티팩트.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탑과 게이트는 지구에 없는 새로운 물질과 신기술의 보고임이 밝혀졌다.자연스레 기업들은 탑과 게이트, 그리고 이 두 곳에서 자원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헌터 육성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처음에는 헌터 개개인을 지원하거나 계약을 맺는데서 시작해, 나중에는 아예 기업 차원에서 직접 길드를 차려 운영하기까지.따라서 현재 한국 헌터들의 소속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뉠 수 있다.20% 정도의 정부 소속 헌터, 5% 정도의 프리랜서, 그리고 75%의 과반수는 길드 소속.숫자뿐만 아니라 헌터의 질 또한 길드 소속이 더 좋다.기업이 운영하기에 자금이 풍족한 길드 쪽이 지원을 잘해주므로, 헌터 입장에서는 길드 소속으로 활동하는게 더 낫다.따라서 고랭크의 헌터들은 자연스레 대우가 좋은 대기업 산하 길드 쪽으로 모이게 되었다.그 결과, 현재 헌터 업계는 대기업의 지원 하에 있는 거대 길드 몇몇이 좌지우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블랙소드 또한 재계 서열 6위, 세강그룹 산하의 거대 길드 중 하나.탑과 게이트가 출몰하기 시작한 거의 직후부터 현재까지, 10년 가까이 존속한 유서 깊은 길드.“그리고 차윤하 씨는 8년 전, 각성한 직후 블랙소드 산하의 아카데미를 수료한 다음 곧바로 블랙소드와 계약, 현재까지 소속을 바꾸지 않은 성골 중의 성골이죠.”고개를 드니, 서현이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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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정리해 보니, 더더욱 윤하 씨가 저희 쪽으로 올 것 같지는 않은데요.”“해보지도 않고 단정 지으면 안 되죠. 제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됐나요?”“…잠시만요.”서현이 들고 있던 태블릿을 조작하자, 내쪽으로 한통의 메일이 도착했다.“보냈습니다. 확인해 주시죠.”메일을 열자 첨부된 각종 문서와 영상의 목록이 쭉 나열된다.“부탁하신 차윤하 씨의 최근 스케줄과 협회 측에서 보관하고 있던, 게이트 공략 과정에서 드론캠으로 촬영한 그녀의 전투 장면입니다.”“고마워요.”“아시겠지만… 둘 다 일반적인 루트로는 구하기 어려운 자료입니다.”헌터계의 거물인 차윤하이니만큼 블랙소드 측에서도 그녀의 행적이 외부에 새어나가는 것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그녀의 전투 장면은 말할 것도 없다.언론에 공개한 일부를 제외하면, 협회와 길드 측만 보유하고 있는 희귀 자료.이걸 어떻게 얻었냐면…간단하다. 돈의 힘이다.블랙소드, 그리고 협회의 직원에게 각각 거금을 쥐여주고 빼냈지, 뭐.돈이 최고다.“그럼, 한번 볼까요.”내가 전생의 차윤하로부터 들은 정보는 두 가지.-이 빙결계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 그래서, 이걸 극복하기 위해 정말 오랜 시간이 필요했어…-극복하기 전까지, 나는 점점 다른 헌터들에게 밀려나기 시작했어. 그러자 블랙소드도 점차 나를 홀대하기 시작했고. 하지만 나는, 시작부터 블랙소드와 함께 했기에 다른 길드로 옮길 생각을 한참동안 하지 못했어…그녀는 어느 순간 능력에 한계가 찾아왔고, 그걸 극복하기 전까지는 상대적으로 다른 헌터들과의 경쟁력을 잃어갔다.그 과정에서 블랙소드는 그녀를 홀대했고, 그녀는 거기에 불만을 품었다.그러나 그 정확한 시기, 구체적인 과정은 모른다.지금의 차윤하가 정확하게 능력의 어떤 부분에서 부족함을 느꼈는지, 그리고 블랙소드와의 갈등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는지.따라서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선 좀 더 정확하게 그녀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우선 차윤하의 스케줄표를 확인했다.“S랭크답게 아주 바쁘게 사는군…”쉬는 날이 거의 없이 탑, 게이트 공략, 그리고 외부 일정으로 빡빡하게 채워진 그녀의 스케줄.특별한 일은 아니다. 고랭크 헌터라면 대부분 이렇게 바쁘게 사니까. 또 그에 걸맞은 리턴이 따라오고.“…응?”스케줄을 쭉 훑던 와중,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아하. 어쩐지. 서현 씨, 이거 어떻게 생각하세요?”“어떤 거 말씀이시죠?”내 생각을 서현에게 들려주자,“…확실히. 말씀하신 것처럼, 좀 이상하긴 하네요.”“그렇죠?”서현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트레이닝에 투자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네요.”원래 윤하의 스케줄은 탑과 게이트 공략, 훈련, 외부활동이 4:4:2로 균형 있게 배분되어 있었다.그런데 최근에는 훈련의 비중이 줄어들고, 대신에 공략과 외부활동이 늘었다.성장이 멈춘다는 건 곧 헌터로서의 역량도 멈춘다는 것.따라서 정신이 제대로 박힌 헌터라면 절대로 훈련을 필요 이상으로 줄이지 않는다.“그런데 블랙소드 측에서는 계속해서 차윤하에게 훈련보다는 다른 활동을 종용했다, 이거죠.”차윤하 입장에서는, 필수적인 훈련을 줄이려는 블랙소드의 방침에 불만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이건 차윤하를 이쪽으로 끌어들이는 데 써먹을 수 있는 요소겠군.“좋아, 하나 건졌고.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 볼까…”이번에는 차윤하의 전투 장면을 재생했다.가장 오래된 것부터, 가장 최근인 며칠 전 촬영된 자이언트 리자드와의 전투까지.빨리 감기로 쭉 넘기다가 중요한 부분에서 원속, 그리고 일시정지.빠르게 그녀의 전투 장면을 시간순으로 쭉 훑었다. 이건 정답을 알고 있으니 간단했다.“화력의 한계.”빙결계 각성자의 전투법은 크게 두 가지다.하나는 직접 좌표를 지정해 그 공간을 얼리는 직접 빙결, 다른 하나는 얼음을 소환해 간접적으로 타격하는 방법.직접 빙결은 확실하지만 마나 소모가 심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적에겐 안 통하는 경우가 대부분.따라서 고랭크의 빙결계 헌터일수록 간접 타격 방식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하지만 그런 식으로 빙결계 능력을 운영하게 된다면, 의문이 생기게 된다.그렇게 되면 그냥 무기를 휘두르는 것이랑 다른 게 뭔가? 라는.그 결과 10년 동안 무결점으로 각광받던 빙결계는 점차 메타에서 밀려났다.그 후 지금으로부터 6년 뒤, 차윤하가 피나는 노력 끝에 다시 S랭크에 화려하게 복귀하기 전까지는.최상급 빙결계 각성자인 차윤하는, 지금 아마 남들보다 먼저 그 한계를 희미하게나마 깨닫고 있으리라.“흠. 오케이.”“다 보셨나요?”“네. 그녀를 어떻게 설득할 지도요.”블랙소드의 잘못된 스캐쥴 배분, 그리고 현재 그녀가 가진 자신의 능력에 대한 불안함.이 두 가지를 이용해서 그녀를 설득해, 블랙소드에서 이 길드인 레버넌트로 데려온다.“음…”하지만, 다 정했다고 생각한 순간, 문득 계획에서 위화감을 느꼈다.“왜 그러시나요, 길드장님?”“잠시만요…”골똘히 생각한 끝에, 얼마 지나지 않아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는다.이렇게 스케줄표를 훑는 것만으로도 간단하게 그녀의 스케줄 배분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국내 탑급 길드인 블랙 소드에서 그 사실을 모를까?의도적으로, 벌써부터 차윤하를 홀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왜? 아직, 차윤하는 탑랭커 중 한 명인데.…아무래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조사할 필요가 있겠군. 블랙소드가 그러는, 다른 의도가 있을 지도.“아뇨. 좀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 생겨서요.”어차피 지금부터 돌아다녀야 하니, 겸사겸사 함께 조사하면 되겠지.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겨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외부 일정인가요? 그렇다면 저도 같이…”“아, 괜찮습니다. 서현 씨는 남아서 길드 업무 마저 처리해 주세요. 결재권자가 자리를 비우니, 서현 씨가 대신 그 역할을 맡아줘야죠.”“…알겠습니다.”서현을 남겨두고 길드장실을 나왔다.그럼 지금부터, 차윤하와의 접점을 만들어볼까.차를 몰아 도착한 곳은, 서초구에 출몰한 어느 게이트.게이트 주변은 이미 헌터 협회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통제 담당자에게 사전에 받은 출입 허가증을 제시하고 근처 적당한 공터에 차를 세운 다음 게이트 쪽을 향해 걷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온다.“반갑습니다, 백도현 길드장님. 이번 공략의 지휘를 맡고 있는 김철민 실장입니다.”머리가 벗겨질락 말락 한, 중년의 헌터 협회 직원이 악수를 건넨다.“이번 게이트 공략을 참관하겠다고 신청하셨죠?”“네. 아무래도 신생 길드이니만큼, 길드장인 저부터 현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아주 훌륭한 마음가짐입니다! 거기다가 이번 공략에 참관을 신청하신건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왜죠? 이번 공략에 뭐 있나요?”실장은 마치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이쪽으로 숙이고 목소리를 낮췄다.“다름이 아니라 바로 그, 차윤하 양이 이번 공략에 참여하거든요.”“세상에, 정말로요?”“놀라실 줄 알았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헌터 중 한 명의 공략을 직접 보게 되시다니, 운이 좋으시군요. 하하!”“정말 그렇네요. 빙결여제를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수 있다니, 정말 기쁩니다.”물론 그녀가 이 게이트의 공략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알고 정확하게 이번 공략을 지정해서 참관 신청을 한 거다.게이트 공략을 참관하는 건 협회 측에서 승인한 소수의 관계자만 가능한 일. 거기다가 공략에 누가 참여하는지는, 철저하게 비밀이다.내가 그 비밀 정보를 어떻게 알아냈냐면… 알잖아, 돈.“본부는 이쪽입니다. 가시죠.”그의 뒤를 따라 걷다 보니, 거대한 텐트에 도착했다.“지금 이미 작전 브리핑이 진행 중이기에, 조용히 입장해 주시길…”텐트의 입구를 걷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자, 실장의 말대로 안에서는 거대한 스크린 옆에 선 직원이 작전 개요를 한창 설명하는 중이었다.그 앞의 의자에 줄을 맞춰 앉은, 이번 공략에 참가하는 16명의 헌터들.그들의 뒤쪽으로 들어왔지만, 뒷모습만으로 이내 맨 앞줄에 앉은 차윤하를 구별해 낼 수 있었다.특유의 푸른 바디슈트와 검은 장발. 뒷모습만으로도 차윤하는, 다른 헌터들은 범접하기 어려운 오러를 발산하고 있었다.그렇게 실장의 뒤를 따라 텐트 구석 자리를 향하는 동안, 입구 쪽에서 소리가 난 걸 듣고 몇몇 인원이 뒤를 돌아본다.몇몇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몇몇은 나를 알아보고 좀 더 쳐다보다 고개를 돌린다.-저기, 백도현이다.-진짜 왔어? 그래도 꼴에 길드장이라고 일은 하려나 본데?입을 가리고 수군대는, 텐트 벽 근처에 서있는 협회 직원들.너넨 뒷담의 정의부터 다시 공부하고 와라, 좀. 다 들리게 까는 게 무슨 뒷담이냐.아무튼 나를 향한 그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서, 내 대외적인 이미지가 어떤지 새삼 깨닫는다.물론 신경 쓰지 않는다. 지금부터 바꿔나가면 그만이니까.그렇게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구석에 자리 잡은 다음, 나도 브리핑을 들으려는데……유독, 한 명의 시선이 따갑다.일어서 있는 협회 직원이나 길드 관계자가 아닌, 앉아있는 헌터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시선.“아, 이런… 쟤가 왜 지금 여기 있냐.”곧바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람이 누군지 깨닫는다.갈색 단발. 가벼운 트레이닝 복 차림의 전형적인 운동계 여성.윤솔은 아직 나를 알아보지 못한 건지, 고개를 돌린 채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그러다가 마침내 누군지 깨달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벌떡 일어났다-“어어! 너는, 그때 그!”그녀가 그렇게 외치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지,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차윤하를 포함해서.“…나, 참.”내가 관종끼가 있긴 하지만, 벌써부터 어그로를 끌 생각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