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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인생이 패스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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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인생이 패스되는 순간

2주간의 긴 휴가가 끝이 났다. 입사 이래로 한 번도 쓰지 않은 연차를 모아 한 번에 몰방했다.

올해 해진은 과장으로 진급할 예정이었다. 중요한 시기에 결정한 여행이었지만, 상부의 결재는 쉽게 떨어졌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태어나, 후계자수업은 따로 없었다.

아버지인 정한성은 자수성가로 기업을 일궜고, 딸인 해진도 그래 주길 바랐다.

처음엔 대학 졸업 후 실습이란 명목 아래 가벼운 마음이었다.

아빠 회사 일을 돕는다는 생각으로 입사했고, 남들과 똑같이 이력서를 쓰고, 면접도 보았다.

정해진이 시온 그룹 정한성의 딸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색안경은 딱, 질색이었다. 배경이 아닌 실력으로 승부 보고 싶었다.

그러니, 이번 휴가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자신에게 마땅한 보상이라 생각했다.

꺼놓았던 핸드폰 액정이 환해지는 걸 확인하며 입국장을 빠져나갔다.

출국 전 부모님께 미리 귀국 날짜와 시간, 항공편을 알려주었다.

해진의 시선이 빠르게 사람들을 훑었지만, 부모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켜진 핸드폰을 보자, 난리가 났다.

뭐지, 하며 핸드폰을 넋 놓고 보았다. 알림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큰일 났어요, 대리님, 부터 대체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냐는 문자까지.

다급하게 공항을 나간 후, 상황을 전해 들었다.

시온은 현금자산을 다 몰방하다시피 신규 라인에 투자했다.

유동자금이 떨어져 담보를 잡혔지만, 최종적으로 결과는 실패했고, 현금은 결국 제대로 돌지 못했다.

결국 회사는 부도가 났고, 한성과 희정이 발 벗고 상황을 해결하고 있다고.

공항에 나오겠다던 부모님은 문자로 마중을 대신했다.

-딸, 미안해. 상황 수습되면 다시 연락하마.

낯선 주소가 적힌 메시지와 함께 부모님은 그렇게 연락 두절됐다.

그 후, 부모님께 온 연락은 없었다. 기존 번호로 연락했지만, 없는 번호라는 음성안내만 들려올 뿐이었다.

지금 이 상황이 좋게 말하면 자취요, 나쁘게 말하면 도피 생활인데.

낯선 주소로 어쩔 수 없이 찾아왔을 때, 그날의 기분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해진은 살면서 처음 온 동네였고, 낯선 세계에 혼자만 뚝, 떨어진 느낌이었다.

한눈에 다 보이는 집안은 해진의 삶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빼고는 처음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이곳이 더 작았다.

신발도 벗지 못한 채 멍했다. 발을 내딛는 순간, 이곳에 인생을 저당 잡힐까 봐.

이 작은 세계 안에서 정해진의 미래는 끝나 버릴까 봐.

해진에게 알뜰살뜰 살아야 하는 자취 생활은 쉽지 않았다.

완벽하게 구색을 갖춘 살림이 아니었다.

손에 익지 않은 살림살이들은 실수투성이였다.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사다 보니, 통장의 잔액은 점점 줄었다.

씀씀이를 아끼고 아껴 보았지만, 원래 갖고 있던 소비 습관을 단번에 줄이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나름 줄인다고 한 게 신용카드 대신 체크카드를 쓰는 일이었다.

기다리면 부모님이 해결하고 연락주겠지, 그것도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함만 커졌다.

마지막으로 체크카드를 결제했을 때, 손님, 잔액이 부족한데요. 라는 말을 들은 해진은 그 순간 가게를 뛰쳐나갔다.

고심 끝에 해진은 마지막 수단을 꺼냈다. 사교계 모임에서 형성된 인맥들에 손을 뻗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일단 살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아버지 회사의 부도는 그들과의 단절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전화 연결은 되지도 않았고, 된다고 한들 바쁘다는 핑계로 피하기 일쑤였다.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경영규모가 곧 그들의 계급이라는 것을.

자신은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자였고, 계급은 박탈당했다.

정해진의 마지막 보험이 강제 해약되는 순간이었다.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내려오는 건 아주 쉬웠다. 그렇다고 이렇게 지낼 순 없었다.

이러면 손가락 빠는 건 시간문제였다.

막다른 골목에, 선택지는 없었다.

양심과 몸을 빼고, 사치스러운 모든 것들을 팔자.

“어떻게 모은 건데.”

갖고 있던 명품 가방들을 하나둘씩 팔았다.

“뭐부터 해야 하지.”

일단 아르바이트를 찾아보기로 했다. 쏟아져 나오는 일자리 속에서 해진의 손가락은 핸드폰 액정만 휘리릭 넘기기 바빴다.

패스, 패스, 이것도 패스. 인생이 패스되는 순간이었다.

**

초인종이 울렸다. 아무도 찾아올 사람이 없는 집이다.

순간 경계 태세를 갖췄다. 재빨리 일어나 현관문에 뚫린 렌즈로 밖을 보았다.

문밖엔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잘 갖춰 입은 양복과 반짝 빛나는 안경테가 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온몸에 부티가 절절 흘러넘쳤다.

“누, 누구세요.”

문밖을 확인하는 눈동자엔 경계심이 가득했다. 또 다른 외부인은 없는지 살폈다.

다행히 중년 남성 이외에는 없었다.

“정해진 양, 있습니까.”

분명 자신의 이름이었다. 안도감보단 의심이 더욱 짙어졌다.

자신이 여기 살고 있다는 걸, 그는 어떻게 아는 걸까.

망설이는 손끝이 여전히 결정하지 못한 채 손잡이에서 맴돌았다.

함부로 문을 열어주기에는 위험부담이 컸다. 문을 사이에 두고 있는 남성의 얼굴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때였다. 마치 자신이 망설이고 있다는 걸 빤히 알고 있다는 듯.

“춘식이 친구입니다.”

해진은 입을 틀어막았다. 극소수만 알고 있다는 아버지 한성의 개명 전 이름이었다.

긴장에 바짝 쥔 손이 살짝 풀렸다. 혹시, 아버지의 소식을 전해주려 온 건 아닐까. 보조키를 채운 채 문을 열었다.

“해진이가 맞네.”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눈빛과 태도에 어색함이 없었다.

“나를 기억 못 하는구먼, 들어가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시간 괜찮은가?”

아버지 친구라고 한들, 섣불리 열어줄 수 없었다. 인자한 미소만으론 무서운 세상이었다.

그러자 남성은 재킷 안쪽에서 명함을 꺼냈다.

연창 그룹 대표 문준태.

명함은 단조로워 보이지만, 위엄이 느껴졌다.

여전히 눈빛을 풀지 않은 해진은 명함 한 번, 준태를 한 번, 번갈아 보았다.

“잠시만요.”

해진은 얼른 핸드폰으로 명함 속 이름을 검색했다.

검색 결과 나오는 이미지 속 인물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정말, 연창 그룹 대표였다.

“들어오세요.”

보조 장치가 풀린 현관문이 활짝 열리고, 준태가 들어왔다.

준태는 집안을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마주 앉아 있었지만, 어색함이 두 사람 사이에 벽을 쳤다.

연창 그룹이라면 국내 내로라하는 굵직한 기업 중 하나였다. 그런 대기업대표가 왜 자신을 찾아왔을까.

그는 자신을 도우러 온 것일까, 아니면 부도난 자금에 투자된 돈이 있어 받으러 온 걸까.

장담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정적인 분위기 속 동적인 작은 행동 하나는 딱딱했던 분위기에 균열을 만들어 냈다.

그 틈을 파고들어 해진은 물었다.

“저를 아세요?”

해진의 질문에 준태는 마시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한 이만할 때였나?”

준태는 옆으로 팔을 반 마디 펼쳤다, 뻗어진 팔이 식탁 높이 어디쯤에서 멈췄다.

팔의 높이를 보면 자신을 아주 어릴 때 보았다는 말인데, 기억날 리가 없지 않은가.

“기억 못 할 만도 하지.”

해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준태의 눈빛은 너그러웠다.

“근데 왜 저를 찾아오셨어요?”

연창 그룹이 자신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앞말을 숨긴 채 본론부터 꺼냈다.

“도와주려고. 아버지에게 빚진 것도 있고.”

빚진 게 있으시면, 아버지 사업 좀 도와주시지.

그가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건지 아직 듣지 못했다.

“수소문 끝에 어렵게 해진 양을 찾았어요. 믿기 어렵겠지만, 아버지가 부탁한 것도 있고.”

“아버지와 연락이 되세요?”

그리움에 가득 담긴 목소리는 재촉에 가까웠다.

“딸에게도 알려주지 않는 연락처를 내가 무슨 수로. 단지 이런 상황이 생긴다면, 꼭 해진 양을 찾아가 달라고 부탁을 한 적이 있었지.”

천륜조차 끊을 정도로 매정하게 숨어버린 부모님이 걱정되었다.

받지 않는 번호로 여러 번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는 번호라는 말뿐.

그럼에도 해진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계속 전화를 걸었다.

어쩌면 오늘은 상황이 좋아져서 연락이 닿지 않을까, 아니면 내일은 달라지지 않을까.

기약 없는 약속을 철석같이 믿으며, 별일 없을 거라 마음을 다잡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부모님에 대한 걱정은 짙어져 갔다.

준태가 안경을 슬쩍 올리며 해진을 살폈다. 렌즈 너머로 다시 둘의 눈이 마주쳤다.

하나라도 알고 싶어 하는 자와 덤덤하게 궁금증을 튕겨버리는 자.

보이지 않는 심리전을 먼저 깬 건 준태였다.

“지금 일자리를 구하지 않아요?”

어떻게 알았지.

준태가 말한 도움을 준다는 게 일자리라면 말이 달라졌다.

눈앞에 있는 자는 다른 곳도 아닌 연창 그룹의 대표였다.

그의 손짓 하나, 눈짓 하나에 없던 일자리가 생길 수도 있었다.

해진은 누구보다 이 세계를 잘 알고 있었다. 권력의 힘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그 한마디에 해진은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렸다.

“일자리 구하기 쉽지 않을 텐데.”

해진의 모든 상황을 미리 알고 있다는 수준급의 판단력, 역시 대기업 대표는 다른 건가.

해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다.

인맥은 끊겼고, 아르바이트는 구해지지 않고, 통장 잔액은 점점 바닥을 향해 달려갔다.

최악의 상태로 달려가는 이 순간, 최고의 방법은 준태가 내민 도움의 손길뿐이었다.

“내가 일자리 줄게요.”

연창 그룹 대표가 일자리를 준다고 말한 건가.

막상 일자리를 주겠다는 호언장담 같은 말에 해진은 살짝 주춤댔다.

살아보니 거저 주는 도움은 없었다. 삶은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한 냉혹한 현실이었다.

재벌의 세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해진이 그 생태계를 모르지 않았다.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상대는 프로장사꾼이자 대기업 대표였다.

그가 제안하는 일자리가 어떤 것인지 아직 듣지 못했다. 아직 마음을 놓기엔 일렀다.

해진이 마른침을 삼켰다. 준태는 해진의 작은 행동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곧장 해진이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판단한 걸까. 흠, 헛기침과 함께 이곳에 온 단 하나의 목적을 꺼냈다.

“우리 회사에 럭비공 하나가 있는데.”

럭비공?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잘못 들은 것처럼 해진의 고개가 사선으로 기울어졌다.

그녀와 다르게 준태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해진 양이 라인맨을 해줬으면 해요.”

슬쩍 준태는 해진의 얼굴을 살폈다. 흔들리는 해진의 눈동자가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말해주고 있었다.

“음, 그러니까.”

준태가 말을 아꼈다. 그것만으로도 해진의 긴장감을 불러오기 충분했다.

적당한 말을 찾는지 조심스러웠다. 생각을 마친 손가락이 식탁 위에서 멈추었다.

“전담 마크.”

사전적 의미만으로도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눈동자가 더욱 흔들렸다.

하지만 준태는 거부할 수 없는 금 사과를 제대로 흔들었다.

“보수는 내 이름을 걸고 보장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