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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럭비공과 전담 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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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럭비공과 전담 마크

보장된 보수. 자극적이며 해진의 마음을 충분히 동요시킬 수 있는 단어였다.

“전담 마크라고 해서 비서는 아니고, 같은 팀에서 일해 주면 돼요. 간간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놈을 사고만 안 치게 옆에서 챙겨주기만 하면 되는 정도?”

같이 일하면서 감시하는 거. 그게 비서예요. 회장님.

누구보다 알 만한 사람이 태연하게 말하니 머리가 얼얼했다.

“출근은 다음 주부터. 부서는 전략기획부. 직급은 원래 대리였으니 그대로 하지.”

그는 다 알고 있었다. 자신이 시온 기업에서 일했다는 사실과 직급이 대리라는 것까지.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그보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확인은 필요했다. 아무리 급해도 돌다리는 두들겨 봐야 하지 않겠는가.

“제가, 회장님을 뭘 믿고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죠?”

준태는 말없이 집안을 둘러보았다. 이보다 확실한 대답이 있을까. 이 집에서 벗어날 기회는 이뿐이라는 것을.

해진이 다시 돌아서는 준태를 다급하게 잡았다. 준태를 돌려세운 건 곧 허락이란 답이었다. 선택지 없는 답안을 선택했으니, 이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대체 럭비공이 누구인지.

“럭비공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요?”

구체적으로 물어본 이유는 간단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 하지 않았는가. 전담 마크하더라도 그가 누구인지 미리 알면, 조금 수월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아아, 준태는 가장 중요한 걸 빼먹었다는 듯 손가락으로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고는 재킷 안에서 핸드폰을 꺼낸 채 액정을 몇 번 터치했다.

화면 속 꽉 찬 얼굴은 처음 보는 남자였다. 노려보듯 쳐다보는데 막상 몸은 액정 앞으로 기울어졌다. 남자의 첫인상을 표현하자면, 잘생겼다. 꽤 눈이 높은 자신이 보아도 분명히 기준치 이상이었다.

대표가 직접 움직여서 구하는 걸 보면, 꽤 가까운 사이거나, 중요한 관계인 게 분명한데.

여전히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준태의 신상 소개로 끝났다.

“이름 문태홍. 나이 30살. 전략기획팀 책임자.”

머릿속으로 남자의 정보를 차곡차곡 채워갔다. 그러다 준태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침묵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그제야 핸드폰에서 준태에게 시선이 옮겨졌다.

딱,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또 다른 정보가 해진에게 인식되었다.

“가족 관계, 내 아들.”

“맙소사.”

놀란 마음에 그만 속마음이 터져 나왔다. 입을 다물고 싶었지만, 다물어지지 않았다.

소개를 마친 준태가 태연하게 해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자기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렸다. 다시 액정 속 남자를 보았을 땐 등허리가 경직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깐 정리하자면 말이다. 연창 그룹 대표의 아들, 문태홍을 맡으라는 건데. 해진은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얹었다.

생각해 보면 깊은 사이도 아닌데 증명사진도 아니고, 일상적인 사진을 들고 다니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의심했어야 했는데, 보장된 보수에 눈이 멀어버렸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겠다고 마음먹지 말았어야 했나. 백전백승 운운했던 섣부른 행동이 후회되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못 하겠다고 할까. 다시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전전긍긍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는 건 잘 알지 않는가.

설사 아르바이트가 구해졌다고 한들, 연창 그룹 대표가 제시한 지금의 제안보다 보수가 보장될 수 있을까.

역시나 보장된 보수가 발목을 잡았다.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첫 이곳에 왔을 때 절망감을 맛보며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저, 회장님.”

이제 정말 나가려는 준태를 해진이 마지막으로 붙잡았다.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잡은 마음으로 빠르게 핸드폰을 갖고 왔다.

“사진을 제가 찍어 놔도 될까요?”

잠시 해진의 말뜻을 고민하던 준태는 주저 없이 아들, 문태홍의 사진을 다시 켰다. 망설이지 않고 빠르게 초점을 맞췄다. 찰칵, 태홍의 사진이 해진의 핸드폰에 저장되었다.

용건을 마친 준태가 집 밖으로 나가는 순간, 헉, 한숨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쾅, 닫힌 소리와 함께 집안엔 정적이 감돌았다. 망부석처럼 서 있는 해진의 두 다리는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단 몇십 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뭐가 홀린 듯 그러겠노라 했지만, 결국 이럴 수밖에 없었을 테지.

지금 자신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냐고 묻는다면, 없다.

다른 좋은 방법이 떠오르냐고 묻는다면, 그 또한 없다.

즉, 해진에게 최고의 방법은 결국 이것뿐이라는 건데.

막대한 보수 앞에서, 영혼을 팔아버리는 순간이었다.

**

출근 준비는 어렵지 않았다. 명품 가방은 팔았지만, 오피스룩은 팔지 않았다. 돈을 벌려면 일해야 했기에 옷까지는 팔 수 없었다.

누구보다 잘나갔던 정해진이었다. 하지만 그건 시온 그룹의 정해진이었을 때였다. 지금 그녀는 연창 그룹 럭비공 라인맨으로 출근하는 것이다.

어젯밤 잠을 설쳤다. 오랜만에 출근한다는 설렘은 아니었다. 예전 같으면 자아실현이다, 능력 개발이다, 했겠지만, 지금은 오로지 생계유지를 위해서였다.

살아야 했고, 먹어야 했고, 기본적인 삶을 유지해야 했다. 그러려면 벌어야 하고, 일해야 했다. 그게 어젯밤 뒤척인 이유였다. 실수하면 안 된다. 잘리면 안 된다. 제대로 마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출근길, 해진은 마음을 다잡았다. 선택지는 단순했고, 답은 간단했다.

출근하고, 일하고, 막대한 월급 받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그것만이 정해진을 움직였다.

연창 로비의 첫인상은 시온과 비교되지 않았다. 초입부터 위화감을 느끼게 하는 높은 층고로 해진의 어깨가 슬쩍 말려들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위풍당당, 명품 가방을 팔지언정 자존심은 팔지 않는 정해진 아닌가.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로비를 가로질렀다. 외모에 딱 떨어지는 옷매무새는 지나가는 남자들이 힐끔거릴 만큼, 눈길을 끌 요소였다.

이미 준태에게 받은 임시 방문증을 야무지게 챙기고는 출입문을 자연스럽게 통과했다. 해진의 눈에 여러 대의 엘리베이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중 막 닫히려는 엘리베이터로 뛰어갔다. 분명 활짝 열려 있던 엘리베이터였는데, 안에 탄 사람은 해진이 달려오는 걸 뻔히 보고서도 ‘닫힘’ 버튼에 손가락을 빠르게 눌러댔다.

내가 다 봤어.

해진은 재빨리 위로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딱 문이 닫히려는 찰나, 한발 빨랐던 해진의 발로 엘리베이터 문은 다시 열렸다.

‘닫힘’ 버튼을 계속 누르고 서 있는 남자와 한 발 쭉 뻗은 채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

두 사람의 눈이 기묘하게 맞물렸다. 서로를 향해 촘촘하게 맞물린 시선에 주변은 서서히 굴곡을 이루며 빨려들었다.

그리고 빠르게 스치는 사진 한 장, 잘생긴 얼굴과 다르게 매서운 눈매. 정면임에도 눈에 띈 날렵한 코와 무표정 속 의결하게 다물어진 입술. 무엇보다 화면보다 실물이 조금 더 나은 얼굴.

태홍의 대놓고 찌푸리는 눈살이 정해진의 얄궂은 동공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연창 그룹 최대 공격수, 문태홍. 해진이 전담 마크해야 하는 그와 마주하고 말았다.

출근까지 주어진 일주일 동안 해진은 딱 한 가지, 정신 수양에만 집중했다. 돈이 없지, 자존감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니 돈이 아닌 상황에선 절대 비굴해지지 말고, 당당해지자.

해진은 최면을 부리듯 끊임없이 자신에게 주입했다. 그래서였을까. 출근하면서부터 해진은 스스로 마음을 통제했다.

그 결과, 닫히던 엘리베이터에 한쪽 발을 턱, 걸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닫히려던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엘리베이터에 불쑥 들어온 해진의 발끝을 내려 보던 태홍이 고개를 들었다.

이미 열린 문으로 쏙 들어온 해진이였기에 더는 태홍 혼자만의 엘리베이터가 될 순 없었다.

“타도 되죠?”

해진의 유려한 목소리에 태홍은 반 발짝 뒤로 물러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해진은 성큼 한 발짝 크게 내디디며 탑승했다. 더 이상 엘리베이터 앞을 지나가는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태홍이 먼저 누른 층수에 불이 켜져 있었다. 해진이 층수가 눌러진 버튼을 보고, 빠르게 올라가는 숫자를 향해 고개를 올렸다.

“몇 층 가세요?”

핸드폰만 보고 있던 태홍이 여전히 액정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목소리뿐이었지만, 태홍의 음성에 엘리베이터가 묵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같은 층이요.”

해진은 슬쩍 반 발짝 뒤에 있는 태홍을 향해 고개를 휙, 돌리며 대답하고는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태홍은 그제야 시선을 해진에게 옮겼다.

연창 그룹 28층, 그곳은 태홍이 팀장으로 있는 전략기획팀만 존재하는 층이었다.

“같은 층이라.”

은은한 저음으로 해진의 마지막 말을 똑같이 따라 하는 태홍이었다. 보이지 않아도, 뒤에 서 있던 태홍의 음성 때문인지 뒤통수부터 발목까지 오소소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뒤를 돌아볼 순 없었다.

해진은 그를 알지만, 그는 아직 자신을 모르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지 같은 층을 올라가는 낯선 얼굴에 그는 경계심과 호기심, 그 어중간한 사이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전략기획팀 오셨어요?”

“네.”

직접 눈을 마주치는 대신 해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정면에 있는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태홍의 눈빛과 마주쳤다.

사진보다 더 매서워서 멈칫했다. 피하지 못한 눈동자는 거울을 보듯 앞만 보며 대화하게 했다.

“실례지만, 누구 만나러 오셨죠?”

말투 속에서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해진을 전략기획팀에 방문한 거래처 중 한 명쯤으로 보는 것 같았다. 경계심과 호기심 중, 느슨한 호기심에 가까웠다.

“문태홍 팀장님 만나러 왔습니다.”

태홍의 경계심이 발열되기 전, 띵, 28층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 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꽉 찬 듯 답답했던 공간에 숨통이 트이듯 문이 열렸다. 문을 통해 서로를 보았던 두 사람의 시선이 흩어졌다. 누구도 먼저 발을 떼지 않았다.

다시 문이 닫힐 즈음, 해진이 심호흡을 한 번 내뱉고는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가기 위해 발을 막 바닥에서 떼려던 순간이었다. 그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간 태홍이 몸을 휙 돌렸다.

막 나오려던 해진의 앞을 가로막은 태홍이 그대로 서 버렸다.

“혹시 정해진 씨?”

깊이감 있는 눈매가 해진을 빨아들이려는 듯 해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여전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태홍임을 알기에 해진은 바닥에 닿은 다리에 힘을 주고, 자신 있게 고개를 들었다.

“네. 제가 정해진입니다.”

그러곤 슬쩍 태홍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문태홍 팀장님이신가요?”

하지만 되묻는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태홍의 완벽한 낙인이었다.

“아, 낙하산 정해진 씨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