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NCrawler

3화. 자신 있어요?

사내 연애 스캔들 — novel.naver.com · All chapters

3화. 자신 있어요?

낙, 낙하산이라니.

첫 출근한 해진에게 태홍은 적나라하게 매정했다. 최대한 발끈한 걸 감추려 애써 보았지만, 본의 아니게 눈빛 싸움이 펼쳐졌다.

“회장님께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나를 전담 마크하신다고.”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묘하게 거슬렸다. 하지만 그대는 아는가. 앞에 기가 막힌 수식어가 빠졌다는걸.

럭비공 전담 마크. 더 정확히 말하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해진은 속사포처럼 받아치려던 말들을 꾹꾹 눌러 담으며 애써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금 약자는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밥줄이었고, 붙잡고 있어야 하는 동아줄이었다. 회사 안에서 그는 팀장이었고, 자신은 대리였다. 계급사회에선 직급이 곧 힘이요, 권력이었다.

거기다 그는 무려 연창 그룹의 후계자가 아닌가.

해진에겐 앞으로 꼬박꼬박 받아야 할 월급이 존재했고, 지금은 마음속 말들을 마음껏 펼쳐서는 안 되었다. 눈치껏 행동해야 할 때였다.

그녀가 어떤 말을 속으로 내뱉고 있는지 알 턱이 없는 태홍은 오히려 해진을 위아래로 쳐다볼 뿐이었다.

시작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상대는 처음부터 호의적이지 않았다. 심지어 눈엣가시 같은 존재임을 팍팍 티 냈다.

상상했던 장면이었고, 끊임없는 정신 수양으로 단단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대놓고 찔러대니 속수무책으로 아프기는 했다.

다른 엘리베이터에 도착 음이 들렸다. 그리고 전략기획팀 직원들이 하나둘씩 내리기 시작했다. 태홍과 해진을 보고 멈칫거리는 직원들을 눈치챈 태홍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라오세요. 정해진 씨.”

인사를 해오는 직원들이 두 사람의 모습을 의아하게 보았다. 태홍은 앞서 걷기 시작했다.

꼴통 아니랄까 봐, 직원들 인사도 안 받아주네.

그의 뒤를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직원들을 훑어보았다. 비슷한 또래부터, 나이 지긋해 보이는 사람까지, 생각보다 전략기획팀의 규모가 컸다.

기죽지 말자 수천 번을 다짐했지만, 태홍을 뒤따르는 걸음에 지독히 달라붙는 시선들에 기가 눌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이미 한 팀인 사람들이니. 한 명씩만 상대해도 1 대 다수가 되는 꼴이었다.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야지. 일단, 시선과 몸짓을 아꼈다. 회사의 분위기도 파악해야 하고,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야 할 사람도 자신이었다.

해진은 고개 숙이지 않기 위해 태홍의 어깨 언저리만 보면서 걸었다. 28층 복도 제일 끝이 팀장실이다. 그의 방까지 걸어가면서 사무실의 규모, 분위기, 책상 배치 등을 빠르게 스캔했다.

시온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커다란 규모였다. 직원들의 책상들도 많았고, 회의실 또한 여럿 있었다.

휴식의 꽃인 탕비실도 눈에 들어왔다. 다년간 직장생활로 파악해 보자면, 자유로운 것 같은데 위계질서가 빡세 보이는 느낌이랄까.

이것저것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팀장실 앞이었다.

팀장실은 문태홍의 첫인상과 비슷했다. 깔끔했지만, 주인 닮은 가구들은 차가웠다. 먼지 하나 없는 책상은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태홍은 루틴처럼 재킷을 벗어 걸고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매 쪽의 커프스를 풀고는 몇 겹 접어 올렸다. 그는 기계적으로 움직이며 소파를 향해 손짓했다.

“앉아요.”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예의인지 손수 찻잔까지 준비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다양한 종류의 차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비아냥을 뺀 그의 목소리는 듣기 좋은 중저음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있던 모습과 다른 모습에 해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꼴통이라며.

순간 자신의 선입견을 반성했다. 낙하산이라 말했지만, 혹시나 제가 먼저 발로 엘리베이터를 막아서 그런 건 아닐까.

아주 잠깐, 잠깐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두 잔을 내려놓고 해진과 마주 앉았다.

“마셔요. 아침에 머리 깨우기에 좋은 차예요.”

태홍이 먼저 찻잔을 입에 대자 해진도 따라 마셨다. 잔을 내려놓은 태홍은 긴 다리를 쭉 뻗어 한쪽으로 꼬았다. 팔은 팔걸이에 올려놓은 채 잔을 홀짝이는 해진을 여유 있게 관망했다.

“회장님과 무슨 사이예요?”

차의 뜨거움이 막 적응되려는 찰나, 말문을 턱 막아버리는 질문에 움직임이 정지되었다. 해진은 질문의 의도를 알지 못해 대답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아아. 곤란한 질문엔 대답하지 않겠다?”

혼자 자문자답하며 사람을 빤히 바라보는 눈빛에도 덤덤하게 있었다.

해진은 알고 있었다. 불리한 순간, 혹은 약점이 될 만한 일이 생길 땐, 입을 다물고 상황을 파악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대답을 안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님을 알 텐데. 뭐, 그래요. 끝까지 대답하지, 말아 봐요.”

침묵을 선택했지만, 그게 곧 최선은 아닐 터다. 불안이 밀려왔지만, 해진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아직 태홍을 파악하기 전이었다.

그는 의자 뒤로 몸을 깊이 맡긴 채, 다리를 꼬며 찻잔을 들었다. 침묵의 줄다리기 끝에 태홍이 먼저 고요함을 깼다.

“혹시 뭐 흥신소 직원, 이런 사람인가? 회장님 때문에 위장 취업하는 거고?”

얘 뭐라니. 혼자 소설을 쓰며 태홍은 해진의 눈빛 속에서 무언가를 캐내려고 연신 노력하는 게 느껴졌다.

“흥신소 직원이 아니라면, 위장 취업은 더더욱 아니고.”

해진은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추측이 끝없이 확장될 것 같아, 오해가 커지기 전에 아닌 건 아니라고 똑바로 알려 줘야 했다.

“회장님과 말 못 할 관계는 아닌 거죠?”

머리에 뭐가 들었길래, 상상의 날개가 이상한 방향으로 사방팔방 펼쳐지는 걸 막아야 했다.

“낙하산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해진의 뜻밖의 고백에, 태홍은 그제야 의심의 시선을 조금씩 내려놓는 느낌이었다.

역시 솔직함이 답인가.

어느 쪽으로 방향을 풀어야 할지 감을 잡은 해진은 술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모종의 거래, 그래요. 거래 같은 게 있긴 했습니다.”

태홍의 얼굴에 의심이 걷히고, 그 자리에 궁금증이 서서히 자리 잡고 있었다. 해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그 거래가 뭔지는 똑똑히 알려줘야지.

“정확히 회장님께서 제게 하신 부탁이십니다.”

귓구멍 크게 열고 들어야 해. 딱 한 번만 말할 거니까.

해진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얼굴은 여리여리했지만, 마음은 다부졌다. 다소곳이 올라가는 입꼬리는 상대를 느슨하게 만들기 충분했지만, 속 안은 여전히 만능대리 정해진이었다.

“우리 회사에 럭비공 하나가 있는데, 해진 양이 전담 마크를 해줬으면 해요.”

해진은 웃음기 하나 없이, 되지도 않는 준태의 성대모사를 흉내 내며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채 말을 전달해줬다.

태홍과 마주한 이 짧은 순간에 그를 하나 파악했다. 거짓과 같잖은 핑계보다 솔직하고 사실적인 이야기가 그에게 먹힌다는 것.

갑자기 청초한 해진의 입에서 준태를 흉내 내는 목소리가 나오자 태홍의 미간은 절로 구겨졌다. 꼬아졌던 다리가 풀리면서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던 상체가 앞으로 마중 나왔다.

“럭비공과 전담 마크라.”

태홍의 팔이 미간에 잡힌 깊은 주름을 매만졌다. 주름을 만진 손끝이 결국 관자놀이까지 꾹꾹 눌렀다.

“회장님이 나를 너무 잘 아시네. 근데, 남자도 아니고, 여자를 전담 마크로 붙인다?”

태홍의 끝이 살짝 올라간 말투가 은근히 거슬렸다. 조롱이 섞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기분 탓인가.

해진은 말을 아꼈다. 상대의 패가 무엇인지, 간파할 시간이 필요했다. 넓게 트인 공간이지만 분위기는 다시 무거워졌다.

다른 점은 한쪽을 향해 상대를 보고 있었다면, 이젠 시선을 마주한 채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상황이 더 불편한데 피할 수 있는 공간도, 자리도 없었다. 해진은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두 손을 마주 잡았다. 긴장감에 땀이 밴 기분마저 들었다.

뜨거운 차 때문인지, 바라보는 시선의 열감 때문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무거운 공기가 누르는 압박감마저 뜨겁게 느껴졌다.

지금으로선 불편한 면담이 빨리 끝나길 바랐다.

“자신 있어요?”

난감했다. 초특급 난감한 질문이었다.

자신이 있을 리가. 생계가 걸렸으니까 하는 거지.

“자신, 있습니다.”

생각과 다르게 오해 살 만큼 목소리는 우렁찼다. 청순가련한 얼굴과 다르게 목소리에는 절도마저 있었다. 생존 앞에서 구석에 몰아붙여진 해진은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했다.

“자신 있다고.”

태홍의 말끝이 흐려졌고, 표정 또한 묘하게 일그러졌다. 이번엔 노골적인 시선이 달라붙었다.

“어디까지 자신 있다는 거지?”

흠흠, 헛기침한 해진이 자세를 바로 앉았다. 이 대답에 자신의 밥줄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바른 자세가 되었다.

대답 잘해야 한다. 정해진. 더 이상 시온 정해진이 아니야. 뒤로 물러설 곳 없고, 이런 금 사과 같은 기회는 없어. 어쩌면 이 길이 가족을 다시 뭉칠 수 있게 만들어 줄지도 몰라.

그러니까 해진아, 제대로 하자.

“저, 사고 수습 잘합니다.”

럭비공과 전담 마크, 그사이에 어울리는 단어가 해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사고는 지금 이 상황이 명백히 사고였다.

회장님도 걱정스러우셨겠지. 수려한 외모에 훤칠한 키, 그리고 무엇보다 연창 그룹을 이어받을 유일한 아들, 외부에서 얼마나 많은 유혹이 뻗어져 나오겠는가.

특히 여자들의 접근이 가장 위험할 수 있었다. 작정하고 달려드는 여자들로 인해 스캔들에 휘말릴 수 있었다. 그런 부분에서 여자 전담 마크가 조금은 유리하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겠는가.

괜한 오해를 살 일이 없을 테니까. 그러니 자신을 붙여서 감시하기 편하게 하기 위함이겠지. 마인드 컨트롤과 함께 밤잠을 설쳐가며 생각해낸 해진의 고용 이유였다.

추가 옵션으로 신입이 아니길 바라면서, 이 자리가 절실하고, 이 바닥의 생태를 잘 알았으면 했던 인물.

수많은 조건의 교집합 속에 해진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태홍의 표정은 또다시 기묘하게 구겨졌다. 노골적인 시선의 결이 틀어졌다.

“사고 수습이라.”

한없이 진지한 해진과 다르게 태홍은 뭐가 웃긴 건지 고개까지 뒤로 젖혀가며 웃어댔다. 한참을 웃던 태홍의 웃음소리가 멈추었다.

이제껏 보지 못한 태홍의 진짜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걸 마주한 해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매섭게 가늘어진 눈매가 그녀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좋아요. 정해진 씨.”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지를 탁탁 털며 일어난 태홍을 따라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구겨진 표정과 함께 바지가 펴졌다.

이대로 인생이 고속도로를 타는 건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그리고 해진은 저도 모르게 마리오네트처럼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매가 몇 겹 접힌 채 드러난 태홍의 손이 해진을 향해 내밀어졌다.

“내 전담 마크 잘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