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마음에 드네요.
4화. 마음에 드네요.
쉽게 풀리는 상황이 이상했다. 잠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던 것 같은데.
“아, 일이 뜻대로 잘 풀려서 이상해요?”
머릿속에 들어왔던 것처럼 단번에 해진의 생각을 파악한 태홍이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그래,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리면 참 재미없지. 안 그래요?”
사람 갖고 놀 듯, 정말 마리오네트가 된 듯 이리저리 그의 손아귀에서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언제 갖고 왔는지 그가 손에 들린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폰으로 전환하고는 테이블 위에 던지듯 올려놨다.
시선은 당연히 핸드폰 액정에 뜬 전화 수신자에게 향했다.
회장, 분명 회장이라 적혀 있었다. 태홍이 회장이라 부르는 유일한 사람, 문준태였다.
벙 진 표정이 수습되지 못한 사이 준태가 전화를 받았다. 태홍의 음성이 집무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보내주신 전담 마크 면담 끝났습니다.”
떡하니 주인공이 눈앞에 있는데 태홍은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덩달아 숨 쉬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있어도 없는 척, 해야 했다.
-그래, 쓸 만할 거다.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인자한 미소 속 가려진 준태의 민낯을 보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소모품으로 전락해버리는 순간이었다. 쓸 만한 요소가 있는 지금은 가치가 있는 상태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건 제가 지금부터 판단하죠.”
상대는 말이 없었다. 부자간의 대화라고 하기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불편한 침묵이 몸을 꼿꼿이 세우게 했지만, 태홍의 시선은 해진에게 벗어날 줄 몰랐다.
“쓸만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자르겠습니다.”
누구에게 선전포고하는 것일까. 쓸모 있음의 조건을 달아준 준태일까, 쓸모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자신일까. 덩달아 해진의 가슴이 크게 들썩거렸다.
낙하산이란 선입견을 벗어 던지고, 주어진 전담 마크를 제대로 해야 한다. 그에게 자신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완벽하게 어필해야 했다.
저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스피커 통화가 끊기고, 그는 곧장 인터폰을 연결했다.
“5분 뒤 전략기획 1팀 회의 좀 하죠.”
“네. 팀장님.”
인터폰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가 살랑거렸다. 이곳의 분위기와 꽤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인터폰을 내려놓는 태홍의 눈빛은 여전히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태홍은 정중하게 해진이 입고 온 옷을 가볍게 훑었다. 들썩이는 한쪽 입꼬리를 해진은 보지 못했다.
“업무는 바로 시작하죠.”
‘업무’라는 말에 해진의 눈에 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정확히 5분이 지나고, 태홍이 사무실 문을 열었다. 재빨리 일어난 해진이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고개를 돌리자 바로 뒤에 바짝 붙어 서 있는 해진의 모습에 태홍이 피식, 웃어 보였다.
“신입답네요. 패기 넘치는데?”
결국 모 아니면, 도였다. 체험판이 아닌 실전에 들어섰다.
태홍과의 걸음 속도를 맞추며 간격을 유지했다.
태홍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5명 정도 되는 인원이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태홍과 같이 들어온 해진에게 5명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해진에겐 익숙한 시선이었다. 호기심 가득하고 경계심 가득한 눈빛들 말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익숙하지만, 절대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팀장인 태홍의 시선이 단번에 자신을 낙하산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저들은 다를까.
밥줄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면, 시샘을 사지 말아야겠지. 다음은 환심이었다. 하나둘씩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낙하산이지만 낙하산 같지 않은 낙하산이 되어야만, 안전한 착륙까지 가능하리라.
태홍은 익숙하게 지정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해진을 태홍의 옆에 세웠다. 두 손을 바짝 앞으로 갖고 온 해진은 보이지 않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계획된 회의가 아니라 미안합니다.”
태홍에게서 나온 미안하다는 말에 해진의 고개가 그를 향해 돌아갔다.
미안하다는 말도 할 줄 알아?
그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 생각했는데,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해진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태홍은 다시 말을 이어 했다.
“오늘 모이라고 한 건, 전략기획 1팀에 신입 대리가 들어와서 불렀습니다.”
‘신입 대리’라는 말에 다섯 명의 직원이 힐끔 서로를 보며 눈치를 보았다. 사실상, 팀에서 대리는 막내나 다름없었다.
지난밤, 해진은 나름대로 회사를 검색해 보았다. 특히 구인란에 최근까지 공고가 뜨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다.
알고 보니 연창 그룹의 전략기획팀은 직원을 뽑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태홍이 직접 사람들을 영입했다. 그랬기에 새로운 직원이 온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슬쩍 눈치를 보던 직원들이 해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직원들의 시선이 또다시 해진에게 집중되었다는 걸 안 태홍이 뒤를 돌아보았다.
“정해진 씨. 자기소개 준비해 왔습니까?”
자기소개라. 해진은 문장력이 뛰어났고, 언변도 청산유수였다. 해진은 일주일간 이것저것 다양하게 준비했다. 시온에 입사 전 자소서부터 면접 준비까지 했던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렸었다.
“네.”
야무지고 당당한 대답에 직원들의 시선은 초롱초롱 빛났고, 태홍은 슬쩍 미간을 구겼다.
옆에 있었지만, 그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가는 걸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낙하산이라 내가 날로 먹을 줄 알았겠지만, 절대 내 밥줄을 그냥 끊어 먹을 생각은 없어.
“좋네요. 그럼 해 보세요.”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듯 의자를 한껏 뒤로 물렀다. 그러고는 해진에게 몸을 완전히 틀었다. 해진은 태홍의 가까운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태홍과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 명, 한 명 시선을 맞추었다. 해진은 입가에 사회적 미소를 장착한 채 허리 숙여 인사했다.
이제 시작이었다.
“안녕하세요. 정해진입니다.”
청순하고 야리야리한 외모와 다르게 똑 부러지는 말투는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직원들까지도 해진을 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향해 휘몰아치는 시선에도 해진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명씩 차례차례 응시했다.
“연창 그룹에 입사하게 되어서 너무 큰 영광입니다.”
애사심은 없지만 생계를 위한 간절한 마음을 최대한 끌어 올려 엔진을 가열시키고.
“낙하산이라 오해하시겠지만,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찬물을 끼얹는 거 같지만,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봐.
“하지만, 낙하산이 일 못한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월급 루팡이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게끔, 열심히 여러분들 옆에서 서포트하겠습니다.”
더불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팀장도 잘 챙겨줄게.
“팀장님의 얼굴에 누가 되지 않게, 연창 그룹 전략기획 1팀에 빌런이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허리를 깊게 숙이고, 잠시 멈추었다. 그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조금 지나 머리 위로 태홍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이 기폭제가 되어 회의실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손뼉을 치며 어색하게나마 웃기 시작했다.
해진은 무슨 상황인지 힐끔 눈을 위로 치켜들며 굽힌 허리를 바로 올렸다. 시작을 잘 끊은 건가. 걱정과 기대감이 가득한 마음으로 태홍과 다른 직원들의 얼굴을 살폈다.
“자기소개 잘 들었습니다.”
웃음소리가 가라앉자 태홍이 다리를 쭉 폈다, 다시 꼬았다.
비웃던 표정이 조금 가셨다고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거창하진 않지만, 자신감은 마음에 드네요.”
태홍의 손이 그의 턱을 매만졌다. 다른 직원들은 태홍과 해진을 번갈아 보며,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정해진 씨의 낙하산 조종사가 들었으면 좋아했겠네요.”
짙은 경고성이 배어 있었다.
“연창 그룹에서 제일 자유로운 분위기가 전략기획팀이 아닐까 싶은데.”
자기소개가 너무 딱딱했나? 자유롭다는 분위기에 해진의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해진에게 머물렀던 태홍의 시선이 다시 직원들을 향했다.
“팀장 밑에서 다들 고생하는 건 아는데.”
이번엔 직원들이 적잖이 황당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직원들의 표정 변화를 실시간으로 보고 답변하는 태홍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해진도 앞에서 팀원들을 주의 깊게 살폈다. 태홍의 작은 말 한마디에도 크게 반응하는 모습들이었다.
유독 눈에 띄게 동요하는 직원들이 있는가 하면, 표정에선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철저한 포커페이스도 있었다.
어차피 그들도 자신처럼 월급쟁이일 뿐이니 동병상련이었다. 해진은 어느새 그들과 한마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전략기획팀에 정해진 씨가 들어온 이유는 나를 밀착 전담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좀 막내가 들어와 일거리를 분담하는가 싶었는데, 팀장 전담이라니. 새롭게 밝혀진 사실에 팀원들의 얼굴엔 놀라운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아직도 태홍 옆에 서 있는 해진도 실시간으로 전략기획 1팀의 표정을 간파할 수 있었다. 좋다 말았다, 하는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을 말이다.
부려 먹을 사람 하나 들어왔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다이렉트 전담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만도 할 테지.
다들 아침부터 여러 번 당황스러운 상황을 겪는 듯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자리는 내 사무실 입구 바로 앞으로 잡아 주시고.”
하지만 곧장 깨달았다. 자신이 누굴 동병상련할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도면이 그려졌다. 그러니까, 아까 들어올 때 얼추 훑어보았는데.
응? 그건 아니지. 아까 보니깐 빈 책상 많던데.
전담이지만, 책상 거리까지 가까워질 생각은 아니었단 말이야.
그리고 밀착도 아니지. 자신은 그냥 전담이라고. 전담.
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마구 내뱉었지만, 오늘은 출근 첫날이었다.
해진은 얼굴엔 상냥함을 유지한 채, 최대한 표정으로 티가 나지 않게 감추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지금 태홍과 눈이 마주친다면, 분위기상 당장이라도 그의 집무실 안에 따로 책상을 마련하라고 할 것만 같았다.
회의가 마무리될 무렵이었다. 팀원 중 한 명이 번쩍 손을 들었다. 손이 들린 곳으로 시선이 쏠렸다. 궁금함을 가장한 경계가 가득함을 숨기지 않았다.
“밀착 전담이 구체적으로 무얼 하는 거죠?”
인터폰으로 들었던 목소리다. 그러고 보니 전략기획 1팀에 여자는 해진을 제외하고, 한 명뿐이었다.
해진도 어디까지 밀착 전담해야 하는 걸지 궁금했다. 자신 대신 질문해 준 여자분께 커피 한 잔을 사드려야 하나, 하는 찰나였다.
“말 그대로 내 모든 스케줄을 동행한다는 겁니다.”
태홍은 모든 스케줄에 포인트를 주며 강조했다.
“필요하다면 출근부터 퇴근까지, 야근부터 주말 특근까지.”
오. 마이. 갓.
이게 과연 맞는 걸까.
고용노동법에 근거하여, 머릿속에 부유물처럼 떠돌아다니는 말들을 주워 담을 수 없었다.
구체적인 일정의 등장에 아까보다 더 빠르게 심장이 뛰었다. 이건 아니라고, 벗어나고 싶지만, 이곳이 자신의 밥벌이였다.
태홍은 범위 정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아. 중요한 게 빠졌네.”
태홍의 손가락이 회의실 책상을 툭툭 건드렸다.
“출장, 국내부터 해외까지.”
해진은 떡, 벌어지려는 입술에 힘껏 힘을 주었다.
당황스러운 티를 내면 절대 안 돼, 정해진아.
전담 마크가, 결국 수행비서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