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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회상]

식선검귀 (食仙劍鬼) — novel.naver.com · All chapters

19화 [회상]

촛불이 한 번 흔들렸다.

“…그 천마를 베어야 하나, 지켜야 하나.”

위강이 물은 말에 한림은 끝내 답하지 못했다. 찢어진 일지의 마지막 장 자리에는 가는 종이 조각만 남아 있었다. 한림은 그것을 손가락으로 오래 쓸어 보다가 낮게 말했다.

"내일 얘기하자. 오늘은 머리가 안 돌아가."

"그래."

한림이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컸다. 위강은 침상 가장자리에 앉은 채 천마검을 무릎에 눕혔다. 검이 손바닥 아래에서 맥박처럼 뛰었다. 십 년 전과 똑같은 박동이었다.

위강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십 년 전의 새벽이 거기 서 있었다.

십 년 전.

혈교 본산 뒤편 능선은 시체의 산이었다.

대혈전 사흘째 새벽, 안개 속에서 칼 부딪치는 소리는 이미 끊긴 뒤였다. 정파 쪽 생존자는 서른이 채 안 되었다. 혈교 쪽도 마찬가지였다. 위강은 피로 젖어 원래 색을 알아볼 수 없는 무복을 입은 채 능선을 올랐다. 오른손에는 쇠가 다 닳은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마지막 혈교주의 목을 벤 것은 반 시진 전이었다.

이겼다. 그러나 아무 감흥이 없었다. 위강은 능선 위 작은 바위 쪽으로 걸었다. 거기에 한림이 있었다.

"한림."

한림은 바위에 기대 앉아 있었다. 회색 장삼의 가슴께가 찢어져 있었고, 얼굴은 종잇장처럼 하얬다. 그런데 위강은 가까이 다가가다 걸음을 멈췄다.

한림의 목 아래로 검은 선이 번지고 있었다.

핏줄을 따라 먹물 같은 선이 기어올랐다. 한림의 숨결이 한 번 나올 때마다 주변의 안개가 검게 물들었다. 능선 위에 널려 있던 시체들이 일제히 움찔했다. 죽은 혈교 무사의 손가락이 땅을 긁었다.

“…오지 마.”

한림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이중으로 겹쳐 들렸다. 하나는 한림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땅 밑에서 올라오는 듯 낮고 오래된 소리였다.

"가까이 오면 안 돼, 위강."

"무슨 일이냐."

“…깨어나고 있어.”

한림이 이를 악물었다. 이마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내 안에 있던 게. 혈교주가 죽는 순간 풀려났어. 그 사람이 억누르고 있었던 거야. 이제 막을 사람이 없어."

위강의 등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 안개 속에서 수백 개의 붉은 눈이 떠올랐다. 대혈전에서 살아남은 혈교의 잔당이었다. 그들의 눈이 한림을 향한 채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천마님.”

"천마님이 깨어나신다."

"우리 주인이시여."

위강이 검을 들었다.

"쓸어버린다."

"안 돼. 위강, 내 말을…"

한림의 말이 끝나기 전에 위강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날 능선에서 위강은 사람이 아니었다.

수백의 잔당이 한림을 향해 기어오르려는 순간 위강의 검이 그들을 막아섰다. 검은 부러질 듯이 울었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서너 명이 쓰러졌고, 그렇게 이십 합, 사십 합, 백 합이 지나갔다. 위강의 어깨에 칼이 박혔고 옆구리가 베였으며 허벅지가 꿰뚫렸다. 그래도 그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등 뒤에서 한림의 목소리가 들렸다.

"위강."

"말하지 마라."

"위강, 돌아봐."

"지금 바쁘다."

"돌아보라고!"

그 한 마디가 안개를 갈랐다. 위강의 검이 허공에서 멈췄다. 돌아보자 한림이 바위 위에 서 있었다. 한림의 오른쪽 눈이 완전히 검게 물들어 있었다. 왼쪽 눈만이 원래의 맑은 갈색 그대로였다.

한 사람 안에서 두 사람이 싸우고 있었다.

"이쪽이 아직 나야, 위강."

한림이 한 걸음씩 위강에게 다가왔다. 걸음마다 땅이 검게 번졌다.

"시간이 얼마 없어. 내 말을 잘 들어."

“…….”

"저 안의 것은 죽지 않아. 나를 그릇 삼아서 계속 돌아와. 지금 이 순간 막지 못하면 내가 아니라 저것이 걸어 다니게 돼. 혈교는 그것을 원하고, 그러면 이 전쟁은 끝나지 않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나를 베어."

위강의 손에서 검이 미끄러졌다.

“…뭐.”

"나를 베어. 지금이야. 나는 아직 나로 있을 때 죽어야 해."

위강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한림이 웃었다. 피가 흐르는 입가에 억지로 만든 웃음이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싫다.”

"위강."

"싫다."

"내가 부탁하는 거야. 십 년을 같이 다닌 친구한테."

"싫다고 했다!"

위강이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천하를 피로 물들인 무신이 능선 위에서 소년처럼 목이 쉬어 있었다.

"나는 너를 지키려고 여기까지 왔다! 이 전쟁을 끝내려고 온 게 아니다. 너를, 너 하나를 지키려고!"

"알아."

한림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그래서 당신이어야 하는 거야."

한림이 바위 아래 꽂혀 있는 검을 가리켰다.

혈교주가 쓰러진 자리였다. 흑색 검신에 은빛 선이 흐르는 검이 땅에 박혀 있었다. 천마검. 혈교주의 손에서 떨어진 뒤 주인이 없어진 마검이었다. 근처에 있던 혈교 잔당들이 그 검에 손을 대려다 모두 손이 타서 비명을 질렀다.

"저 검은 아무나 못 뽑아. 천마가 고른 사람만 뽑을 수 있어."

“…….”

"내 안의 천마가 당신을 골랐어. 나를 지킬 사람으로. 그리고 나를 끝낼 사람으로."

“…나는.”

"뽑아, 위강."

위강은 한참 움직이지 못했다. 능선에 불던 바람이 멎었다. 수백의 잔당이 숨을 죽였다. 한림의 오른쪽 눈에서 검은 눈물이 한 줄 흘러내렸다.

"부탁이야."

위강이 한 걸음 내디뎠다. 두 걸음. 세 걸음. 천마검 앞에 서서 손잡이를 쥐었다. 손바닥이 타는 듯이 뜨거웠다. 그러나 검은 쉽게 뽑혔다. 마치 오래 기다린 것처럼.

우웅.

검이 울었다. 능선 전체가 흔들렸다. 잔당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위강은 검을 쥔 채 한림을 향해 돌아섰다.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다른 방법은.”

"없어."

"찾아보면."

"없어, 위강. 나도 사흘 동안 찾았어."

한림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러니까 와. 한 번에."

위강의 손이 떨렸다. 천마검의 끝이 땅을 긁었다. 한림이 그를 향해 걸어왔다. 한 걸음, 두 걸음. 이마를 천마검 끝에 대는 거리까지 와서 멈췄다.

"위강."

“….”

"이름 불러 줘."

“…한림.”

"한 번 더."

"한림."

한림이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검은 선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아주 짧은 순간 한림은 위강이 알던 그대로의 얼굴이 되었다.

"다음 생에는 말이야."

한림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끓여 준 죽 먹고 싶다. 당신 손으로 직접."

“…….”

"짜지 않게."

위강의 손이 앞으로 움직였다.

현재.

위강은 눈을 떴다.

방은 어두웠고 촛불은 다 타서 꺼져 있었다. 무릎 위의 천마검이 천천히 식고 있었다. 십 년 전과 똑같이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위강은 손바닥을 펴서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는데 피가 느껴졌다.

그날 이후 위강은 한림이 죽는 걸 확인했다고 말하고 다녔다. 십 년 동안.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건 위강만 알고 있었다. 확인한 것이 아니었다. 자기 손으로 벤 것이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가장 아끼던 검으로, 한 번에.

위강은 일어나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한림의 방 문 틈새로 아직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위강은 한참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러다 문을 두 번 두드렸다.

“…들어와.”

한림은 침상에 앉아 있었다. 잠들지 못한 얼굴이었다. 손에는 일지의 찢어진 장 자리가 쥐어져 있었다. 위강이 문턱을 넘자 한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잠깐 위강의 눈을 보더니 모든 것을 알아챈 얼굴을 했다.

“…기억났구나.”

“….”

"그날."

"나는."

위강이 입을 열었다. 쉬어 있었다.

"십 년 동안 확인했다고 말하고 다녔다. 남궁진에게도, 하립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확인한 게 아니다. 내가 벴다."

"알아."

"너를 죽였다."

"알아, 위강."

"내가 십 년 동안…"

"위강."

한림이 일어나 위강 앞으로 걸어왔다. 가는 손이 위강의 손을 감쌌다. 십 년 전과 똑같은 체온이었다.

"당신이 죽인 게 아니야. 내가 죽여 달라고 한 거야."

"그래도."

"그래도 십 년을 괴로워했겠지. 알아. 그래서 말을 못 했어. 살아 있다는 것도,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당신이 요리사가 되어 있다는 얘기를 혈교 사람들한테 들었을 때, 나는 한참 울었어."

한림이 웃었다.

"죽 끓이는 사람이 되어 있더라고."

위강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십 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는 얼굴을 숙였다. 한림이 그의 어깨를 한참 두드렸다.

그러다 위강이 낮게 물었다.

“…살아날 줄 알았나.”

한림의 손이 멈췄다.

"그날. 나를 시켜 너를 베게 하면서. 사흘 뒤에 깨어날 줄 알았나."

방 안이 조용해졌다. 한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위강은 그 침묵의 길이를 정확히 쟀다. 한 호흡, 두 호흡, 세 호흡.

“…몰랐어.”

한림이 말했다.

"정말 몰랐어. 알았다면 당신에게 그런 짐을 지우지 않았을 거야."

“…….”

"믿어 줘."

“…믿는다.”

위강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는 붉었지만 목소리는 평소의 낮고 건조한 톤으로 돌아와 있었다.

"믿는다."

그러나 위강은 그 세 호흡의 침묵을 가슴 한구석에 접어 넣었다. 십 년 동안 사람을 베며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가장 믿고 싶은 사람의 거짓말이 가장 오래 남는다는 것이었다.

"내일부터 찾겠다."

위강이 한림의 손을 놓고 돌아섰다.

"천마를 베지 않고 너를 지키는 방법을."

“…그런 건 없을 수도 있어.”

"그럼 만들겠다."

"위강."

"십 년 전에는 약속을 못 지켰다."

문고리를 쥔 위강이 어깨너머로 말했다.

"이번에는 지킨다."

문이 닫혔다. 한림은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침상 가장자리에 앉아 손에 쥔 종이 조각을 펼쳤다. 일지에서 찢겨 나간 마지막 장의 조각이었다. 한림은 처음부터 이 조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 번도 위강에게 보여 주지 않은 채로.

종이 조각에는 서역 문자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릇이 스스로 열어 주지 않으면 천마는 깨어나지 못한다.」

한림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일그러졌다. 웃음 같기도, 울음 같기도 했다.

“…미안해, 위강.”

촛불이 없는 어둠 속에서 속삭임이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