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화산파 늙은이]
2화 [화산파 늙은이]
슥, 슥.
부러진 문짝 조각을 치우는 흑살방 낭인들의 손길에는 피가 바싹 마르는 절박함이 깃들어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먼지 한 톨까지 소매로 싹싹 문질러 닦은 두목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식탁 위에 은전 세 냥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바, 바닥 청소도 마쳤고…… 기물 배상금도 올렸습니다."
"수고했소. 갈 길 가시오."
주방 안쪽에서 건성으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낭인들은 구세주라도 만난 듯 식선루를 향해 넙죽 절을 하고는 튀어나가듯 달아났다.
조용해진 객잔.
위강은 아궁이의 불길을 살짝 낮추며 다시 웍을 쥐었다. 산적 놈들 때문에 흐름이 끊기긴 했으나, 음식의 화후(火候)는 찰나의 방심도 용납하지 않는 법이다.
바로 그때, 객잔 문턱으로 웬 늙은 사내 하나가 터덜터덜 걸어 들어왔다.
다 헤진 삼베 도포에 때가 찌든 허리띠. 얼핏 보면 저자거리의 노숙자나 다름없는 허름한 차림새였다. 하지만 위강의 눈은 사내의 발걸음이 내딛는 궤적을 놓치지 않았다.
'답설무흔(踏雪無痕).'
눈밭을 걸어도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는 경지. 사내가 딛는 마룻바닥에는 삐걱거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늙은 사내는 허름한 차림과 달리 매우 부라부라한 눈빛으로 객잔 내부를 둘러보더니, 낭인들이 난리법석을 떨고 간 직후의 은은한 잔향을 맡고는 흠칫했다.
'방금 전까지 정교한 검기(劍氣)의 격동이 있었군. 그것도 지극히 응축된 무형의 검이…….'
늙은 사내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는 구석진 자리에 털썩 앉더니, 주방을 향해 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주인장! 밖에서부터 아주 고소하고 알싸한 냄새가 진동을 하던데, 뭐 만드는 거 있소?"
"홍유면이오."
"허허, 그거 한 그릇 내와 보시오. 국물은 넉넉하게 부어주고."
위강은 대답 대신 목재 쟁반에 따끈한 국수 한 그릇을 담아 늙은 손님의 식탁으로 가져갔다.
붉은 고추기름이 붉게 떠 있는 육수, 그 위로 정갈하게 올려진 돼지고기 고명과 푸른 파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수에서는 기분 좋은 매콤함과 깊은 고기 향이 번져 나왔다.
늙은 사내는 젓가락을 들기 전, 면발 위로 표태를 취하듯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이, 이건……!'
사내의 눈에는 보였다.
국물 깊은 곳에서 미세하게 순환하는 진기의 파동이.
불과 물, 육수의 기름이 한데 엉켜 태극의 이치를 이루고 있었다. 단순한 요리가 아니었다. 무공의 극의에 달한 자만이 의념만으로 불조절을 해낼 수 있는 '입화(入火)'의 경지였다.
"이게…… 정녕 사람이 끓여낸 국수란 말인가?"
사내는 홀린 듯 젓가락으로 면발을 집어 입에 넣었다.
쫄깃하면서도 부드럽게 씹히는 면발, 그리고 입안 가득 쇄도하는 짙은 풍미. 이어서 따뜻하고 알싸한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
쿠구구구—!
늙은 사내의 단전 내부에서 기이한 변화가 일어났다.
삼십 년 전 혈사에서 얻었던 치명적인 구음내상(九陰內傷). 명의를 찾아 헤매도 고치지 못해 사경을 헤매게 만들던 그 묵은 칠혈의 혈맥이, 홍유면의 진기 어린 따스한 국물 기운을 타고 뻥 뚫려 나가는 것이 아닌가!
"컥……! 컬럭!"
사내가 입을 털어내며 붉은 피 한 뿜을 탁자 위 찻잔에 토해냈다.
핏덩이는 검게 굳어 있던 썩은 피였다. 사내의 막혔던 기혈이 뚫리며 숨통이 트이자, 그의 온몸에서 우화등선할 것 같은 쾌감과 함께 맑은 강호의 진기가 폭발적으로 피어올랐다.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정파 무림맹의 은퇴한 절대고수이자 현 화산파의 대장로, 청운검객(靑雲劍客) 백현이었다.
백현은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국물까지 싹싹 비워냈다.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기혈이 단번에 순환하며 십 년은 젊어진 듯한 기운이 솟구쳤다.
"이, 이럴 수가…… 내 평생을 괴롭히던 지독한 내상이…… 고작 국수 한 그릇에 완치되다니!"
백현이 헉헉거리며 주방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하게 도마를 닦고 있는 도위강이 서 있었다.
백현은 미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갔다. 백현 같은 천하의 대고수가 사대문파의 장로조차 아닌 한낱 객잔 주인 앞에서 깍듯이 포권을 취했다.
"선배님! 소생, 화산파의 백현이라 합니다! 감히 선배님의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대체 어떤 미류의 검법을 익히셨기에 요리 하나에 이런 신통한 진기를 들이부으실 수 있는 건지……!"
위강은 도마를 닦던 손을 멈추고 늙은 손님을 덤덤하게 건너다보았다.
"화산파?"
"예! 선배님!"
"화산파건 어디건 간에."
위강이 주방 턱에 턱하니 국자를 걸쳐놓으며 말했다.
"음식에 침 튀기지 말고 자리로 돌아가시오. 그리고 방금 기혈 뚫렸다고 소리 지르는 바람에 다른 손님들 놀랐으니, 국수 값은 동전 다섯 닢에 찻잔 닦는 값 한 닢 더해서 여섯 닢 받겠소."
"……예?"
백현은 멍하니 위강을 바라보았다.
천하를 호령하던 화산파 대장로가 무릎을 꿇고 제자로 삼아달라 비는 것이 맞아 마땅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사내는 자신을 그저 '음식에 침 튀기는 민폐 손님' 취급을 하고 있었다.
위강의 눈동자 깊은 곳에는 강호의 그 어떤 거물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절대적인 고요함이 깔려 있었다.
백현은 소름이 쫙 돋았다.
이 사내는 신분을 숨긴 은형의 무신이다. 자신 따위가 감히 정체를 파헤치려 들다간 목이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강호에서 영영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라는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소, 소생이 실례를 범했습니다. 국수 값은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백현은 품 안에서 최고급 품계의 은전 뭉치를 꺼내놓으려다, 위강의 서늘한 눈빛을 보고는 부랴부랴 엽전 여섯 닢을 딱 맞춰 탁자에 놓았다.
"정말 잘 먹었습니다, 선배님.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백현은 깍듯이 숙인 뒤, 마치 신선을 뵙고 나오는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갔다.
객잔 밖으로 나온 백현은 맑아진 자신의 단전을 보며 소름 어린 탄성을 내질렀다.
"천하제일의 절대자가…… 변방의 작은 객잔에서 국수를 삶고 계셨구나. 강호에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한편, 객잔 안.
위강은 백현이 남기고 간 엽전 여섯 닢을 챙겨 돈통에 털어 넣으며 나지막이 혀를 찼다.
"화산파 늙은이가 굳은 피를 왜 여기서 토하고 난리야. 청소하기 귀찮게."
위강은 다시 덤덤하게 행주를 들었다.
강호의 바람이 식선루의 문턱을 넘나들기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