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다섯 장로]
20화 [다섯 장로]
혈교의 정점은 만마전이 아니었다.
만마전에서 북쪽으로 삼백 리, 구름이 걸린 절벽 안쪽에는 지도에 없는 전각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구천원(九天院). 혈교가 십 년 전 세워진 것도, 후보 열 명이 서열을 다투게 된 것도, 혈교주 자리가 십 년이나 비어 있었던 것도 모두 이곳의 뜻이었다. 혈교는 구천원의 정원에 놓인 화분 하나였다.
그 전각의 한가운데에 서문야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식선루에서 보이던 눈웃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고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십 년 동안 서열 일위로 군림하던 사내가 바닥의 청석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열 명의 후보가 모두 죽었다.”
단상 위 다섯 개의 의자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내렸다. 다섯 개의 의자에는 각기 다른 빛깔의 도포를 입은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푸른색, 붉은색, 노란색, 흰색, 검은색. 얼굴은 주름졌으나 눈동자는 하나같이 젊었다.
"예."
"계획은 열 명이 아니라 한 명만 남기는 것이었다."
“…이하성을 세워 두고 나머지를 쓰다가, 무신이 오면 일제히 부딪쳐 소모시키려…”
"무신이 너무 빨랐다는 변명이냐."
서문야는 대답하지 못했다. 검은 도포의 노인이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천천히 두드렸다. 소리는 느렸고 한 번 울릴 때마다 서문야의 어깨가 움찔했다.
"우리가 직접 간다."
“…장로님들께서요?”
"보름까지 아흐레. 그릇은 열려야 하고, 그릇의 곁에 선 칼은 치워야 한다."
황색 도포의 노인이 천천히 일어났다. 노인의 발치에서 바닥의 먼지가 한 번 가라앉았다.
"무신의 국수를 먹어 본 자가 있다던데."
“…제가.”
"맛은 어떠하더냐."
서문야는 한참 침묵하다가 쉰 목소리로 답했다.
“…삼 년을 먹어도 질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은 먹어 봐야겠군."
다섯 노인이 동시에 웃었다. 그 웃음은 전각의 서까래 위에서 한참 메아리쳤다.
식선루가 문을 닫는 해시 무렵이었다.
정하립은 행주를 짜서 마지막 탁자를 닦고 있었다. 위강은 주방에서 국자를 씻고 있었고, 남궁진은 창가에서 졸고 있었다. 한림은 이 층에서 일지의 조각을 들여다보다가 일찍 잠든 뒤였다. 하루 종일 사람이 들끓은 객잔은 오랜만에 조용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 똑, 똑.
"어, 손님이세요? 죄송해요, 오늘은 장사 끝났는데…"
정하립이 문을 열다 말고 입을 벌렸다. 문 앞에 노인 다섯이 서 있었다. 푸른, 붉은, 노란, 흰, 검은 도포가 달 없는 밤에 이상하게도 또렷했다. 맨 앞의 노란 도포 노인이 부드럽게 웃었다.
"늦은 시각에 미안하오. 주방장께 한 끼 청하고 싶어서 왔소."
"저, 저희가 이제 불을 다 끄려던 참인데…"
"하립."
주방에서 위강의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정하립이 돌아보자 위강이 국자를 쥔 채 주방 입구에 서 있었다. 평소의 무심한 얼굴이었으나 눈동자가 문 앞의 노인 다섯을 한 번 훑었을 때 아주 짧은 순간 가라앉았다.
“…들여라.”
"예?"
"손님이다."
노인 다섯이 문턱을 넘어 홀 안으로 들어왔다. 걸음에 소리가 나지 않았다. 창가에서 졸던 남궁진이 눈을 번쩍 떴다가 손이 허리의 검 손잡이로 갔다. 그러나 다섯 노인은 남궁진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창가 쪽 큰 탁자에 둘러앉았다.
“…검성이 이곳에 계셨군.”
"그대는 누구요."
"지나가는 노인이라 해 두지."
노란 도포의 노인이 손을 들어 보였다. 남궁진은 순간 숨이 막혔다. 노인이 손을 든 것뿐인데 홀 전체의 공기가 한 번 눌렸다. 남궁진은 천천히 검에서 손을 뗐다. 갈비뼈가 나간 몸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이 알려 주었다.
위강은 주방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뭘 드시겠소."
"오미(五味)요."
노란 도포의 노인이 말했다.
"신맛, 쓴맛, 단맛, 매운맛, 짠맛. 한 그릇씩, 다섯 그릇."
“…….”
"우리는 각자 한 가지 맛을 맡고 있소. 주방장의 음식을 먹어 보고 싶소. 먹은 뒤에야 말할 수 있는 일이 있소."
위강은 한참 노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조용히 말했다.
"반 시진 걸린다."
"기다리겠소."
위강이 주방으로 돌아섰다. 정하립이 따라 들어가며 속삭였다.
"사, 사부님. 저 사람들 누구예요? 눈빛이 이상해요. 평범한 노인이 아니에요."
"그래."
"그런데 왜…"
"손님이다."
위강이 불을 올렸다.
"손님에게 음식을 내기 전에 칼을 들지 않는다. 그게 식선루의 법이다."
위강은 다섯 그릇을 만들었다.
신맛은 산초와 매실을 곁들인 새콤한 냉국수였다. 쓴맛은 씀바귀와 쑥으로 무친 나물 한 접시. 단맛은 대추와 밤을 넣고 졸인 약과. 매운맛은 고추기름과 마늘을 얹은 칼국수. 짠맛은 오래 삭힌 장에 담근 조기구이. 다섯 가지 요리가 한 쟁반에 차려져 노인들 앞에 놓였다.
다섯 명이 천천히 젓가락을 들었다.
푸른 도포 노인이 냉국수를 한 입 넘기더니 눈을 감았다. 붉은 도포 노인이 나물을 씹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노란 도포 노인은 약과를 오래 입안에 머금었다. 흰 도포 노인은 칼국수를 한 젓가락 떠올려 한참 바라보았고, 검은 도포 노인은 조기의 가운데 살을 조용히 떼어 입에 넣었다.
식선루에 숟가락 소리만 오갔다.
“…흠.”
노란 도포의 노인이 먼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삼 년 만에 이 경지라니."
“…….”
"한 가지 맛을 요리하는 데도 평생이 걸리는 법인데, 다섯 가지 맛이 한 상에서 서로를 해치지 않고 스며드는 걸 보니 소문이 틀리지 않았구려. 무신이 은거했다는 말은 이 국수를 위해서였나 보오."
"칭찬은 필요 없다."
위강이 팔짱을 꼈다.
"할 말을 하라."
"좋소."
다섯 노인이 동시에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소리가 정확히 하나로 겹쳤다. 위강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다섯은 호흡을 완벽히 맞추고 있었다.
"우리는 구천원 오미로(五味老)요. 그대가 베어 낸 혈교는 우리 정원의 화분이었소."
노란 도포가 말했다.
"나는 감로(甘老). 이쪽은 차례로 산로(酸老), 고로(苦老), 신로(辛老), 함로(鹹老)요."
“…그래서.”
"그릇을 내놓으시오. 한림이라는 이름의 그 아이를. 보름 제단에 올려야 하오."
위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가 쥔 천마검도 돌려주시오. 어차피 그 검은 그릇이 열려야 쓸 수 있는 물건이오. 그대가 가지고 있어 봐야…"
"거절한다."
위강이 말했다. 한 박자의 망설임도 없었다.
"한림은 내 손님이다. 그리고 이 객잔의 손님을 팔지 않는다."
"그럴 줄 알았소."
감로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한 끼를 먹은 것이오. 마지막 만찬이라 생각하고."
다섯 개의 의자가 동시에 뒤로 밀렸다.
위강이 먼저 움직였다.
주방 벽에 기대 둔 천마검이 날아와 그의 손에 잡혔다. 칼집이 벗겨지며 은빛이 홀을 가득 채웠다. 남궁진이 일어나려 했지만 감로가 손가락 하나를 튕기자 남궁진의 몸이 벽에 박혔다.
"앉아 계시오, 검성. 아직 그대의 차례가 아니오."
"크윽!"
"맹주님!"
정하립이 솥뚜껑을 들고 달려들었지만 흑색 도포의 함로가 한 번 쳐다보는 것만으로 몸이 굳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위강의 눈에 핏발이 섰다.
“…손님이 아니었군.”
"그렇소, 주방장. 우리는 손님이 아니라."
감로가 부드럽게 웃었다.
"시식하러 온 사람들이었소."
위강의 천마검이 그의 목을 향해 직선으로 뻗었다.
까앙!
검이 멈췄다. 감로의 오른손이 검 끝을 두 손가락으로 쥐고 있었다. 위강은 눈을 부릅떴다. 서문야의 젓가락과는 차원이 달랐다. 쇠나 힘이 아니라 땅 그 자체에 박힌 듯한 단단함이었다. 천마검이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위강의 좌측 어깨 쪽에서 신 냄새가 확 풍겼다. 푸른 도포 산로가 이미 위강의 옆에 와 있었다. 손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산로의 손바닥이 위강의 어깨에 닿았다. 순간 위강의 팔 근육이 뒤틀렸다. 마치 가지가 뻗어 나가듯 근육 하나하나가 제멋대로 뻗어 나왔다. 천마검을 쥔 손가락이 풀렸다.
"끄윽."
위강이 몸을 비틀어 산로의 손을 떨쳐 냈다. 그러나 이번엔 우측에서 고로가 달려 들었다. 붉은 도포 고로의 손이 위강의 옆구리를 때렸다. 불에 데는 듯한 열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
위강이 천마검을 휘둘러 고로를 베려 했다. 그러나 검이 닿기도 전에 누군가 앞을 막았다. 흰 도포 신로가 위강의 정면에 서 있었다. 손에서 번쩍이는 쇳빛이 천마검 날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쨍!
위강의 검이 튕겨 나갔다. 천마검이 그렇게 튕긴 건 처음이었다. 위강의 손이 저릿하게 울렸다. 곧이어 등 뒤에서 함로의 손이 위강의 척추 아래를 가볍게 짚었다. 아주 가벼운 접촉이었는데 다리에 힘이 쑥 빠졌다. 위강의 무릎이 꺾였다. 천마검이 바닥에 박혔다.
“…허억.”
위강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십 년 만에, 아니 평생 처음으로 위강이 적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감로가 위강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만 포기하시오. 당신은 우리를 이길 수 없소."
위강은 천천히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갈비뼈 하나가 부러져 숨을 쉴 때마다 날카롭게 아팠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정면을 향해 있었다.
"한 가지만 묻겠다."
"말씀하시오."
"내가 포기하면, 한림은 어떻게 되나."
감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노인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다섯 노인이 동시에 눈을 내리깔았다.
“…그건 대답할 수 없소.”
"그렇군."
위강이 천마검을 뽑아 들었다. 칼날이 떨리고 있었다. 위강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럼 포기할 수 없다."
“…주방장.”
"나는 십 년 전에 한 번 포기했다. 그때 포기한 걸 평생 후회하며 살았다."
위강이 낮게 웃었다. 남궁진이 벽에 박힌 채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두 번은 안 한다. 설령 오행이 아니라 오십 행이 와도."
그때였다.
이 층 계단에서 가볍고 느린 발소리가 내려왔다.
“…그만.”
한림이었다. 한림은 얇은 속옷 위에 겉옷 하나만 걸친 채 서 있었다. 얼굴은 백지처럼 하얬고, 가슴에 일지의 조각을 꼭 쥐고 있었다. 오미로 다섯 명의 시선이 동시에 한림에게 쏠렸다. 홀 안의 공기가 한 번 얼어붙었다.
"한림, 올라가라."
"위강. 이미 알고 있었어."
한림은 위강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왔다.
"저분들은 서문야와 달라. 나를 해치러 온 게 아니야. 나를 모시러 온 거야."
“…무슨 소리냐.”
"그릇을 모셔 가는 것이 저분들의 일이니까."
한림이 위강의 옆에 서서 감로를 마주 보았다.
"말씀하세요. 오늘은 초대만 하러 오신 거죠."
감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오늘은 초대장만 전하려 했소. 무신이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이 무력을 썼겠지만.”
그는 소매에서 작은 함 하나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은으로 짠 함에는 달 모양의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아흐레 뒤 보름 밤, 구천원의 제단에서 그릇을 열어 주시오. 와 주신다면 이 객잔은 건드리지 않겠소. 거절하신다면."
"거절하면요?"
"그때는 그대의 제자와 검성, 그리고 이 객잔의 모든 손님을 하나씩 데려갈 것이오."
감로의 눈이 정하립 쪽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정하립이 굳은 채 바닥에서 올려다보았다.
“…저도요? 으에에…"
"한림 선생."
감로가 한림에게 고개를 숙였다. 깊고 공손한 절이었다. 위강은 눈을 크게 떴다. 십 년을 혈교의 쇠사슬에 묶여 있던 한림에게 이들은 한 번도 칼을 겨눈 적이 없다는 사실이 이제야 보였다.
"그대가 스스로 열어 줄 것을 믿겠소."
다섯 노인이 일어섰다. 푸른, 붉은, 노란, 흰, 검은 도포가 한꺼번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문이 저절로 닫히는 소리가 난 뒤 식선루에는 깨진 의자와 쏟아진 국물, 그리고 탁자 위의 은함만 남았다.
남궁진이 벽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정하립이 바닥을 기다시피 달려와 위강을 부축했다.
"사부님! 사부님, 괜찮으세요?"
“…괜찮다.”
"피, 피가!"
"내 피다."
위강이 한림을 돌아보았다. 한림은 탁자 위의 은함을 바라보고 있었다. 위강이 낮게 물었다.
“…저들이 널 모시러 왔다고 했나.”
“…….”
"대답해라."
“…응.”
한림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이 젖어 있었다.
"저분들 중 한 분은, 내가 아는 사람이야."
식선루 처마의 풍경이 한 번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