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밤에 찾아온 손님]
6화 [밤에 찾아온 손님]
달빛조차 먹구름에 가려 숨죽인 깊은 밤.
모든 손님이 떠나고 조용해진 식선루의 객잔 홀 한구석에는 홀로 찻물이 끓는 소리만이 나지막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치지직—
위강이 아궁이의 은은한 화후(火候)로 우려낸 찻물을 푸른 자기에 정갈하게 따라냈다.
은은한 우롱차 향이 정적에 싸인 객잔 안으로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위강의 맞은편.
검은 대두건을 깊게 눌러써 얼굴을 가린 사내가 정갈하게 놓인 찻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건 사이로 살짝 드러난 흰 수염과 곧게 펴진 등개비. 차림새는 소박했으나, 사내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개는 무림 전체를 바위처럼 누를 만큼 거대하고 묵직했다.
천하 정파 무림을 호령하는 거두.
현 무림맹주(武林盟主), 검성(劍聖) 남궁진(南宮眞)이었다.
정파의 맹주가 경호원 하나 없이 변방의 작은 객잔에 신분을 숨기고 홀로 찾아왔다는 사실을 강호인들이 알았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터였다.
남궁진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들이켰다.
맑은 찻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그의 얼굴에 깊은 감탄이 스쳐 지나갔다.
“……차 맛이 여전하구려. 무공의 극의를 깨달은 자의 진기가 차 향에 그대로 스며 있소.”
“쓸데없는 소리 말고 차나 마시고 가시오. 문 닫을 시간이니까.”
위강은 찻잔을 느릿하게 돌리며 무심하게 응대했다.
남궁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눈빛에 묵직한 중압감이 실리기 시작했다.
“위강. 자네도 이미 알고 있을 테지. 강호의 북방에서 혈교(血敎)의 봉인이 풀어지고 있다는 것을.”
“…….”
“십 년 전 자네가 홀로 목을 베었던 혈교주의 후예들이 다시금 핏빛 혈전을 준비하고 있소. 이대로 두면 사대문파는 물론이고 강호 전체가 거대한 피바람에 잠기게 될 것이오.”
남궁진이 단정한 자세로 위강을 똑바로 바라보며 포권을 취했다.
“다시 한 번 강호를 위해 검을 들어주시오. 자네의 그 압도적인 무력이 없다면, 다가올 대혈전을 막아낼 수 없소.”
하지만 위강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찻잔을 탁자 위에 가볍게 놓았다.
“싫소.”
“위강!”
“나는 삼 년 전 강호를 떠났고, 내 검은 이미 주방 국자로 바뀌었소. 무림의 존망이든, 혈교의 부활이든 내 객잔의 일과는 상관없는 일이오.”
단칼에 거절하는 위강의 태도에 남궁진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남궁진은 한숨을 크게 쉬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위강을 바라보았다.
“……설마 아직도 ‘그날’의 일 때문에 그러는 것이요?”
위강의 손길이 찰나 동안 멈칫했다.
남궁진은 그것도 모른 채,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그때의 비극은 자네 혼자 짊어질 짐이 아니었소! 수많은 동료들이 목숨을 잃은 건 강호의 운명이었고, 자네는 할 만큼 했소. 그때 내가 다 잊으라고 했지 않—”
그 순간.
스오오오—!
객잔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 십 도 아래로 추락하듯 얼어붙었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던 김이 공중에서 일시 정지하듯 멈춰 섰고, 아궁이 안에서 불타오르던 장작불마저 찰나의 순간 푸른 냉기에 직격당해 픽 꺼져버렸다.
“……그만해라.”
위강의 목소리가 낮게 깔려 나왔다.
그것은 소리가 아니라, 공간 전체를 물리적으로 파쇄하는 무형의 폭력에 가까웠다.
쿵—!
남궁진의 가슴팍으로 태산 전체가 짓눌려 오는 듯한 압도적인 중력이 꽂혔다.
천하를 호령하던 무림맹주 남궁진의 안색이 순식간에 핏기를 잃고 잿빛으로 변했다.
스륵.
위강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 국수를 삶고 차를 우려내던 소탈한 객잔 주인의 눈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곳에는 수천 명의 시체 산 위에 홀로 서서 천하를 내리밟았던, 그 어떤 마교의 악귀보다 서늘하고 잔혹한 ‘절대무신(絕對武神)’의 진정한 안광이 자리하고 있었다.
위강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殺氣)는 실체화되어, 객잔 마룻바닥에 가늘고 촘촘한 균열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이, 이것이 정녕 인간의 살기란 말인가……!’
남궁진은 온몸의 피가 바싹 마르고 뼈마디가 바스러지는 오한을 느꼈다.
자신이 맹주라는 사실도, 강호의 대고수라는 자만도 전부 허상이었다. 눈앞의 도위강이 마음만 먹는다면 찰나의 순간에 자신의 목을 따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것을, 사지(死地)에 직면한 본능이 절규하고 있었다.
위강의 차가운 눈동자가 남궁진의 형형한 눈빛을 쏘아보았다.
“내 앞에서 그 일을 한 번만 더 입에 올리면.”
위강이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은 박살 나지도 않은 채, 살기에 눌려 그대로 가루가 되어 탁자 위로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강호 전체가 피바다로 물들기 전에, 네놈의 목부터 내 식선루 문턱에 걸어둘 줄 알아라.”
“……!”
남궁진은 식은땀을 폭포수처럼 흘리며 차마 숨조차 쉬지 못했다.
거대한 사망의 공포가 그의 전신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위강이 천천히 살기를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짓눌려 있던 객잔의 공기가 풀리며, 꺼졌던 장작불이 다시 솟구쳐 올랐다.
“하악……! 쿨럭! 쿨럭!”
남궁진은 가슴을 쥐어짜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의 이마에서는 비 오듯 땀방울이 떨어져 마룻바닥을 적셨다.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남궁진이 오직 ‘기개’ 하나에 눌려 사경을 헤맨 것이다.
남궁진은 부르르 떨리는 손을 모아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소, 소생이 실언을 했습니다. 도 형. 감히 건드리지 말아야 할 역린을 건드렸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강호의 정점에 선 무림맹주가 한낱 객잔 주인 앞에서 제자처럼 깍듯이 사죄를 올렸다.
위강은 덤덤하게 행주를 들어 가루가 된 찻잔 자리를 쓱 문질러 닦아냈다.
“차 다 마셨으면 가시오. 더 이상 찾아오지 마라.”
“……알겠습니다. 쾌유하시길 바랍니다.”
남궁진은 더 이상 말을 얹지 못하고, 대두건을 눌러쓴 채 허리를 숙이며 조용히 식선루의 문을 열고 밤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식선루.
위강은 어둠이 짙게 내린 창밖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 잊으라고……?”
위강이 자신의 쓸쓸한 오른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과거 수많은 이들의 피로 물들었던 그 손에는, 이제 기름때와 행주 자국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