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국자를 내려놓다]
8화 [국자를 내려놓다]
밤안개가 적막에 싸인 식선루의 기와지붕을 낮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달빛조차 먹구름 뒤로 숨어버린 어둠 속, 주방에서 기구들을 정돈하던 도위강의 손길이 툭 멈추었다.
스으으—
바람도 일으키지 않는 은밀하고 자극적인 살기. 소림이나 화산의 정순한 진기와는 근본부터 다른, 칠흑처럼 짙고 비릿한 혈향(血香)이 문틈을 타고 밀려들고 있었다.
삐걱—
식선루의 목재 문이 손 하나 대지 않았음에도 스르륵 열렸다. 어둠을 찢고 걸어 나온 사내는 핏빛 비단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사내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은 강호의 어둠을 지배하는 혈교(血敎)에서도 단 셋뿐인 정점, 서열 3위 혈영법왕(血影法王) 염라의 것이었다.
"……십 년 만이로군, 무신."
염라의 나지막한 음성이 정적을 깨뜨렸다. 위강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행주로 도마의 물기를 닦아내며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발걸음이 더럽다. 핏자국 남기기 전에 나가라."
"허허, 칠사(七殺)의 혈전을 끝맺고 조용히 국수나 삶고 계시다니…… 강호가 들으면 통곡할 노릇이오."
염라가 비정한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위강의 어깨가 서늘하게 들썩이려는 그 찰나, 염라가 품 안에서 붉은 비단에 싸인 물건 하나를 꺼내며 나지막이 한마디를 던졌다.
"김한림(金翰林)이 살아있소."
탁—!
도위강의 손에서 행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언제나 깊은 연못처럼 정갈하고 무심하던 위강의 눈동자가 기괴할 정도로 크게 흔들렸다. 삼 년 전 검을 버리고 식선루의 주방에 들어선 이후,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노골적인 당혹감.
'김한림…….'
도위강이라는 존재의 가슴 가장 깊은 곳, 감히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던 묵은 흉터를 단번에 후벼파는 이름이었다.
염라는 위강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비단 뭉치를 풀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비단 안에서 빛바랜 은옥 노리개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 계곡 아래로 떨어진 그를 거둔 것은 우리 혈교였소.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지하 감옥에 갇혀 죽지 못해 숨만 쉬고 있지. 그를 산 채로 되찾고 싶다면, 혈교가 다시금 강호에 핏빛 기치를 올릴 때 오직 침묵하시오."
그러나 도위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은옥 노리개를 바라보며 지독한 침묵 속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바로 그 순간—
"혈교의 사도 놈이 감히 어디라고 발을 디디느냐!"
콰아앙—!
식선루의 문턱을 깨부수며 번개 같은 검기가 어둠을 뚫고 쏟아져 들어왔다. 밤안개를 헤치고 나타난 사내는 이상한 마기(魔氣)를 감지하고 부랴부랴 달려온 무림맹주 검성 남궁진이었다.
"혈영법왕 염라……! 네놈이 감히 이곳까지 찾아오다니!"
"쯧, 눈치 빠른 늙은 뱀 놈이 하필 이 타이밍에 등장할 줄이야."
정파의 맹주와 혈교의 서열 3위. 두 절대고수의 기운이 팽팽하게 맞부딪히며 식선루의 공기가 폭발 직전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그 충돌은 성립조차 되지 않았다.
"……시끄럽다."
지옥의 바닥에서 끌어 올려진 듯한 나지막한 음성.
쿠구구구구—!
도위강의 단전에서 삼 년간 봉인되어 있던 초극상의 진기가 해일처럼 터져 나왔다. 어떠한 동작도, 화려한 이펙트도 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내뿜은 무형의 내공 파동 하나가 공간 전체를 물리적으로 왜곡시켰다.
"가, 갑자기 무슨…… 컥?!"
"크아악?!"
팽팽하게 맞서던 남궁진의 정순한 검기와 염라의 비릿한 혈마기가 위강의 내공에 직격당해 포말처럼 산산조각 났다.
콰아아앙—!
천하를 호령하던 정파의 맹주와 혈교의 3위 고수가, 단 한 번의 진기 격동에 그대로 밀려나 객잔 바닥을 쓸며 문밖으로 사정없이 날아갔다.
"쿨럭! 쿨럭! 이, 이 정도의 진기라니……!"
"크윽…… 말도 안 되는……!"
객잔 밖 마당에 처박힌 두 사람은 피를 토하며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객잔 안을 바라보았다. 손가락 하나 튕기지 않고 내공의 격동만으로 천하의 거물 둘을 한꺼번에 날려 버린 것이다.
위강은 마당에 나뒹구는 둘을 뒤로한 채, 탁자 위에 놓인 은옥 노리개를 천천히 품 안에 집어넣었다.
"하립아."
위강이 주방 안쪽을 향해 나지막하게 불렀다. 주방 구석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던 묵직한 체구의 청년, 정하립이 걸어 나왔다. 위강이 객잔을 열 때부터 함께하며 주방 일을 도왔던 수제자이자 미더운 사내였다.
"예, 사장님."
"내 잠시 멀리 다녀올 테니, 내가 올 때까지 식선루를 맡아라."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주방 불 조심하고. 행패 부리는 놈들 오면 젓가락 날리는 것 잊지 마라."
위강은 대답 대신 무심하게 허리에 매여 있던 주방 앞치마를 풀었다.
그 동작 하나에 소탈했던 객잔 주인의 기운이 완벽히 허물어졌다. 삼 년 동안 봉인되어 있던 천하제일 '무신'의 차갑고 서늘한 아우라가 그의 온몸을 덮쳐 왔다.
위강의 신형이 기이하게 흔들리더니, 잔영만을 남긴 채 찰나의 순간 밤안개 속으로 녹아들듯 사라졌다.
깊은 밤, 북방의 험준한 산맥 한복판.
혈교(血敎)의 본산이 자리한 십리혈곡(十里血谷)은 가혹할 정도로 삼엄한 경계가 깔려 있었다. 백여 명의 혈살수들이 사방에 은복해 있었고, 만독의 진법이 곡구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삼엄한 경계망 한가운데로, 칠흑 같은 도포를 걸친 한 명의 사내가 유령처럼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답설무흔(踏雪無痕).
낙엽 하나 흔들리지 않는 경지.
혈교의 초소와 진법들이 사내의 발걸음 앞에서는 단 한 번도 작동하지 않았다. 마치 공기 자체가 그를 피해 가는 듯한 초자연적인 신법(身法).
도위강이 서늘한 눈빛으로 혈교의 웅장한 지하 대전 입구를 내려다보았다.
"김한림."
위강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네놈이 진정 살아있다면, 오늘 이 혈교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어서라도 끌고 나올 것이다."
십 년 전 강호를 피로 물들였던 절대자의 검기가, 마침내 혈교의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