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여섯 살
동그란 눈, 오뚝한 콧날, 웃을 때 매력적인 입꼬리까지. 어디 그뿐이랴. 또래들에 비해 야무진 손끝, 어른 말을 곧잘 알아듣는 영특함.가끔 툭툭 어른 흉내까지 내는 건 천재의 증거다. ‘세상에 우리 딸만큼 사랑스러운 존재가 또 있을까?’ 이정환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딸바보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진지하게. 똑똑— “공주! 일어나야지.” 여섯 살짜리가 벌써 노크를 강요하는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요즘 애들은 성장이 빠르니까. 끼익— 마침, 방문이 빼꼼 열렸다. 부스스한 머리로 한 손을 들어 눈을 비비며 걸어 나오는 작은 그림자. “우리 공주님 일어났어?” 방 안은 정성스레 꾸며놔서 연분홍 벽지에, 산홋빛 커튼, 침대 머리맡엔 솜사탕 같은 구름 모빌이 둥둥 떠다닌다. 공주님이 사는 방이란 응당 이래야지.태어나기 전부터 꾸며놓은 방은 여전히 핑크빛이다. “……” 딸 이채원은 대답 대신 입을 삐죽 내밀었다. 무언가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아빠를 빤히 올려다본다. 그 표정마저 불만이라기보다 애교로 보일 지경. 토라진 얼굴마저 이토록 어여쁜 건 반칙이 아닌가. 중증의 딸바보 증상을 보이던 정환의 잡념을 끊고. 딸이 아주 작지만 또렷하게 중얼거렸다. “공주 아니라고오….” 다른 한 손엔 밤새 끌어안고 잔 곰돌이 인형이 대롱대롱. 설득력 제로의 딸의 행실에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좋으면 좋다고 하면 그만 일 것을.' 한결같이 솔직하지 못하다. “알겠어, 알겠어. 밥 먹으까? 곰돌이도 같이?”“으잇… 이게 왜 내 손에…!” 딸의 표정이 한층 더 일그러졌으나, 그마저도 마냥 예뻤다. *** 처음 눈을 떴을 때, 머릿속은 짙은 안개가 낀 듯 흐릿했다. 낯선 얼굴들이 시야를 가득 메웠고, 손가락 하나 내 뜻대로 움직이질 않더라. ‘놔! 놔, 이거!’ 바둥거리다 보니 두 가지가 차츰 또렷해졌다. 하나, 나는 어쩐 일인지 갓난아기가 되어 있다. 둘, 눈앞에서 헤벌쭉 웃고 있는 남녀가 아무래도 내 부모인 모양이다. ‘잉…?’ 근데 난 왜 이런 걸 다 알고 있지? 조그맣고 말랑한 몸뚱이를 꼬물거리면서도 그 사실이 못내 신기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곰곰이 집중했고.머릿속에 깨진 유리 조각처럼 흩어진 채 떠도는 전생의 기억을 찾을 수 있었다. 비좁은 고시원 방.새벽까지 켜진 모니터 불빛.밤낮 가리지 않고 매달리던 게임… 정확히는 게임 속에서 하던 장사 질. 대형 이벤트로 인해, 하던 게임이 떡상했고. 그 덕에 신나서 며칠 밤을 통째로 갈아 넣었다. ‘그러다 훅 간 것 같은데… 이십 대에 요절이라니.’ 이름조차 가물가물했다. 내가 미친 건가 싶다가도.막 태어난 아기 머릿속에 들어 있어선 안 될 정보들 때문에 환생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 사람들이 내 부모님?’ “꺄르륵— 까꿍!” 함박웃음 지으며 얼굴을 들이미는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보육원에서 자란 탓에 솔직히 부모의 정이란 게 뭔지도 몰랐다. 거기다. 이런 해괴한 기억까지 짊어진 애라니. ‘이를 어찌할꼬.’ 시궁창 인생을 살아온 나와 달리 너무나 해맑아 보이는 부모였다. 그래도…. 그 푸근한 미소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박복하게 살다 간 인생에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 거라면.이번만큼은 다르게 살아봐도 좋지 않을까. ‘그래, 착한 아들로서, 이번 생은 제대로 한번 살아보자.’ 아기답지 않게 제법 듬직한 각오를 다지던 그때였다. “아으, 우리 딸!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쁠까아.”“누굴 닮긴, 나지.” ……잠깐. ‘딸?’ “애가 통 안 우는데 괜찮은 걸까요?”“그럼요. 처음 나왔을 땐 앙— 하고 울었잖아요. 괜찮습니다.”“휴, 우리 딸이 너무 의젓해서 그런가 봐요.” 아니 타임, 난 아들… “아빠가 방 아주 예쁘게 꾸며놨어. 공주님, 고생 많았어요.” 급변한 환경과 허전해진 아랫도리 탓일까. ‘……나, 딸이야?’ “어머나?”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어떻게든 삼켜보려 했는데. “으아아아아앙!”“아이고, 아주 건강한 따님이시네요.”“하하, 울지 마, 뚝뚝—.” 나약한 몸 때문인지 눈물샘이 도무지 말을 듣질 않았다. 야단났네…. ... ……당시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6년간 몹시 잘 지냈다.굳이 문제점을 꼽자면, 날이 갈수록 전생이 흐릿해진다는 거? 제법 능숙해진 손가락으로 리모컨 버튼을 척척 눌렀다. ‘후후, 멍청한 아빠.’ 감히 내게 뽀X로 따위를 틀어주고 자리를 비우다니. 어른들이란 어쩜 이리 허술한지. 갓난쟁이도 아니고, 전자기기 조작쯤이야 내겐 누워서 떡 먹기였다. “오, 흐에.” 채널을 휙휙 넘기다 처음 보는 애니매이션에 잠시 시선이 팔리다가도. 도리도리. 고개를 거세게 내저으며 황급히 다른 화면으로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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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애들 만화, 중독성이 너무 강해.’ 어엿한 어른의 정신을 지닌 내가 고작 만화 한 편을 버텨내지 못하다니. 이거 어쩌면 술 담배 같은 거 보다 더 문제인 거 아니야? ‘애들을 이런 무시무시한 중독에 노출시키다니… 어른들은 정말 돈에 미쳤구나…!’ 세상의 잔혹한 비밀을 하나 깨달아버렸다. 전생에는 구경도 못 해봤던지라 전혀 몰랐다. 치사하게 엄마 아빠가 바쁠 때면 만화를 틀어주고 사라지는데. 뭐지 이게? 하고 보다가, 헉—! 하고 정신을 차리면 순식간에 시간이 삭제되어 있더라. 쥐똥만 한 것들이 나오는데 뭐 그리 재밌는지! 요즘 들어선 아빠가 사 온 만화 캐릭터 인형을 가지고 놀던 나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기도 했다. ‘위험하다. 아주 위험해. 요물이야 만화는.’ 나 정도 되는 어른이 이 정도라면 애들에게는…… 끔찍하군. 마음을 다잡고 채널을 뉴스로 돌렸다. 재미는… 없긴 한데.나에겐 필요한 작업이었다. [네! 다음 소식입니다. 걸그룹 루미너스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5주 연속 음원차트 1위를——] 화면 구석에 박힌 날짜.앵커의 멘트.흘러가는 자막. 모두 옛날의 것이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시점마저 달랐다.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연도를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그 이후로 부모님 몰래몰래 신문이나 뉴스를 보며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칫, 투자 같은 거 관심 좀 가지고 살 걸!’ 미래에서 왔다는 이점이 있으면 뭐 하나. 정작 나는 내 일 말고. 주식이니 부동산이니 하는 데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대충 미래에 살아남은 메신저나 포털사이트 정도는 아니까 다행이라 해야 하나? ‘코인? 뭐 그런 것도 유행했던 거 같은데.’ 초등학교 들어가면 주식 통장 만들어 달라고 해야지. 거기서 사면 되는 거 아닐까. “에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기억은 날이 갈수록 드문드문 구멍이 나있고. 미리 적어두자니 평생 게임으로만 돈을 벌어온 인간이라 마땅히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으이이잇!’ 이럴 줄 알았으면 뉴스라도 좀 보고 살 걸!! 그렇게 혼자 머리를 싸매고 있을 무렵. 잠시 자리를 비웠던 아빠가 등 뒤에 무언가를 숨긴 채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채원아— 짠!” 오늘은 크리스마스. 작년까지만 해도 부모님은 내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머리맡에 선물을 슬쩍 올려두고 산타를 주장했으나. —산타는 없써. 아빠 바부야? 힘들게 내가 잘 때까지 기다리기에 진실을 알려줬다. 그래서 올해는 면전에서 선물을 건네받게 된 건데.막상 이렇게 받으니까 좀 심심하긴 하네… ‘서프라이즈의 맛이 없어졌어.’ 뒤늦게 깨달아 누굴 탓하랴.우리 집의 산타는 내가 죽여버렸는걸. 말똥말똥 선물 포장지를 바라보고 있으니, 아빠가 상자 매듭을 풀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비즈 액세서리 만들기 세트. 가느다란 실에 형형색색 구슬을 꿰어 팔찌나 목걸이를 만드는 키트였다. “우리 공주님 어때? 맘에 들지?”“…시러.” 당연히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아빠랑 같이 한 번 만들어 볼까?” 늘 그랬다. 이놈의 집구석. ‘이익, 나를 뭘로 보고. 이런 여자애들이나 좋아할 법한…!’ 지난 크리스마스 선물인 인형 갈아입히기 세트에선 업그레이드됐어도 여전하다. ‘독립을 해버려야지 원!’ ……그래도 선물 사온 사람의 정성이 있으니 해보긴 할 거다. 내가 진짜 6살 철부지도 아니고. 부모님께 그러면 안 돼.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아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오…… 반짝거리는 게 제법 보석 같잖아?’ 구슬을 하나씩 집어 실에 꿰기 시작했다. 사내답게 검정으로 가야지. 음, 아니다. 어쩐지 너무 칙칙한데?적당히 타협해서 보라색은 어떨까. 나쁘지 않군. 오. 뭐야 이 핑크는 되게 밝네.이거 잘 어울리겠다. 차근차근 엮어나가다 보니 은근 손맛이 붙었다. ‘어른들에게 레고가 인기가 많은 건 이런 이유였나?’ 아빠… 꽤 센스 있는 편일지도…. 한창 몰두해 있는데 옆자리에 슬그머니 아빠가 앉았다. “공주.”“……”“아이구, 되게 좋아하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나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불효자는 안 좋은 거야. “왜애.”“채원아, 그거 하면서 들어 봐?”“응, 듣고이써”“채원이 몇 살?”“여서쌀.” 나이는 왜 묻지? “그치, 근데 보통 그 나이면 동네 애들은 다 유치원을 다니거든.”“멍청이들만.”“헉! 어디서 그런 못된 말을!”“아빠한테 배웠는데.”“어? 아, 아! 아! 여보 아니야. 오해야! 때리지 마— 억!” 귀찮게 하는 아빠를 간단히 담구고 비즈 팔찌 만들기에 집중하려 했다. 그러나. “이채원.”“……”“엄마 봐야지.” 풀네임으로 불리는 건 위험한데. 아빠는 몰라도 엄마한테 저항하긴 어려웠다.왜지? 이유는 모르겠고 본능이었다. 팔짱을 낀 엄마가 입을 열었다. “유치원을 다녀야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친구도 사귀지.”“…친구 피료없는데.”“언제까지고 엄마 아빠랑만 놀 수 없어요. 그리고 엄마도 이제 회사 나가야 해서 아침에 우리 채원이를 혼자 둘 수가 없어.”“혼자도 잘 노라. 그리고 내가 엄마 아빠 노라 주는거였어.” 사소하게 토 달다가 찌릿—하는 엄마의 눈빛에 고개를 숙였다. “그뿐인 줄 알아? 또래 친구들은 죄다 유치원 때부터 친해진대. 초등학교 가서 우리 딸이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엄마는 그게 걱정이란다.”“……” 아, 그런 거였나.멀쩡한 딸내미의 사회성이 떨어질까, 걱정될 수 있겠군. 여섯 해를 굴러본 경험상, 여기서 땡깡을 부리면 이번에도 어물쩍 넘어갈 수 있음을 알지만. ‘앞으로 편하게 움직이려면 내게 문제가 없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어…!’ 효도도 하고, 신뢰도 쌓을 겸. “아라써, 갈게….”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리자. 두 사람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래그래, 잘 생각했어.”“거봐, 우리 공주는 차분히 타이르면 다 알아듣는다니까? 으이, 누굴 닮아 이리 의젓한지 몰라.”“당신 닮은 것 같진 않고.” 별것도 아닌데 참나. 괜스레 어깨가 으쓱 솟았다. 이런 거에 기뻐하면 안 되는데….하루가 다르게 정신연령이 뒷걸음질 치는 기분이었다. ‘아, 그나저나 유치원이라니.’ “에휴, 가서 꼬맹이들이나 노라줘야겠다….”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고. “……너도 꼬맹이거든?” 엄마의 나직한 태클은, 가볍게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