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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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어머, 너어무 귀엽다!! 어머님을 닮았나? 채원이는 인기 많겠어요~”“오호호호. 그런가요? 별말씀을 다~” 엄마와 선생님은 어쩜 저리 죽이 척척 맞는지. 둘이 이야기 하는 동안, 원장실 의자에 앉아 허공에 두 발만 까딱거렸다. ‘따분해.’ 립서비스에 놀아나다니 실망인데 엄마. 이러다 홀려서 오후 영어 놀이반까지 결제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들어오면서 시간표에 있는 거 봐버렸단 말이야. “엄마.” 제발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엄마의 치맛자락을 꾹꾹 당겼다. “응? 왜?”“아고, 채원이가 낯설어서 어머니 곁에 있고 싶은가 봐요.”“그런 거 아닌데….”“선생님께 ‘아닌데’는 반말이지.”“아닌데요.” 절대 내가 귀찮아서가 아니라 우리 집의 돈을 지키기 위해서다. ‘아깝잖아. 영어 그거 배워서 뭐 하는데.’ 다행히 나한테 어그로가 끌려서인지 영어 놀이반 이야기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오늘 가정 경제를 지켜낸 일등 공신은 나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엄마 이제 갈게? 울면 안 돼?”“내가 왜 우러. 어서 가.”“아이고, 씩씩하기도 해라! 재밌게 놀아~” 흥, 애 취급은. “빨리 가.”“엄마 치마부터 놔줘야 가지요?”“헛, 뭐지. 나도 모르게 내 손이.”“으휴, 귀엽긴.” 머쓱하게 옷자락을 놓아주자 엄마가 배웅을 받으며 일어섰다. “간다~” 어, 진짜 가네. 엄마가 문밖으로 사라진 뒤의 그 공허함이란. 나 6년 동안 부모님이 옆에 없는 게 처음이구나….새삼 깨달았다. 치, 뭐. 인간은 원래 혼자고?전생에선 가족도 없었고? 까짓거 몇 시간 된다고. …아, 뭐야.왜 눈가가 시큰거리지. “채원아, 이제 친구들이랑 인사할까?”“…눼.” 옆에서 선생님이 말 걸지 않았으면 눈물이 찔끔 났을지도 모른다. 놀림감이 될까 봐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버텼다. ‘여자가 되면서 감수성이 풍부해진 게 틀림없어. 이런 거에 눈물을 글썽이다니.’ “여기 친구들도 다들 착해서 금세 친해질 거야.”“네에.”“애들이 우리 채원이 너무 좋아하면 어째, 오히려 그게 더 걱정이네~ 아유 어찌 이리 이쁠까.” 선생님 손에 이끌려 터덜터덜 걷다 보니 ‘햇님반’이라 적힌 문 앞에서 멈췄다. 드르륵— “얘들아, 오늘 새 친구가 들어왔어요~” 선생님의 한마디에,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아이들의 눈길이 일제히 내게 박혔다. 흠칫. ‘어우, 좀 부담스러운데.’ 흡사 ‘얘들아, 채원이가 할 말 있대—!’ 하고 등 떠밀린 기분이랄까. “간단하게 소개만 해볼까?” 전생까지 통틀어 살면서 이만큼 주목받은 적이 있었나? 뭐, 그래봤자 코흘리개들. 나는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딸꾹—! 내, ㄴ, 내 이름은 이채원… 이야요.” “자, 다들 박수~~” 짝, 짝, 짝. ‘씽… 하필 말을 더듬냐.’ 귓불까지 발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 ……낯섦이 빚어낸 사고였을 뿐. 나는 눈 깜짝할 새 평정을 되찾았다. “채원아, 나랑 색칠노리할래?”“재미없는데….”“앗, 그, 그래…? 미안….”“…가지고 와. 같이 하자.” 조그만 게 입꼬리를 축 늘어뜨리니 도무지 내칠 수가 없었다. 에휴, 거봐 엄마. 내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애들 놀아줘야 하잖아. “히히. 나는 김시연이야.”“응. 반가워.” 까짓거 그냥 쉭쉭 칠하면 되는 건가? 그림책과 색연필 한 통을 건네받고 우선 밑그림부터 살폈다. 어린애도 쉽게 칠하라고 윤곽이 굵고 시커멓게 둘러쳐져 있었다. ‘이 안쪽을 메우면 되는 모양이군.’ 사과는 빨강. 바나나는 노랑. 구름은 파랑인데 흰색을 좀 섞자. 음, 토마토는 사과랑 겹치니 좀 더 옅은 다홍으로. ‘선 밖으로 삐져나가지 않게, 조심조심…… 엥? 나 뭐하냐.’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혀까지 내밀고 종이에 코를 박고 있더라. 색연필을 툭 내려놓고 옆에서 함께 칠하던 시연의 그림을 쳐다봤다. “초콜릿을 거믄색으로 칠하면 그게 숯이지. 갈색으로 해.”“숫? 숫치 뭐야?”“숯. 몰라, 숯?”“응.”“….” 맞다, 얘는 진짜배기 어린애지. ‘나 뭐 하고 있냐. 왜 열과 성을 다해서 하는데.’ 퍼뜩 둘러보니 어느새 그림책 스무 장은 거뜬히 격파한 뒤였다. …조오금은 재밌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야. “나 흥미가 떨어져써….” 팍식었어… “남은 거 마저 해놔… 검사 할 거야.”“어…? 숙제 주는거야?”“응.” 홀로 구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컴퓨터 없나….’ 집에 있으면 엄마 아빠 놀아주면서 시간 보내면 되는데.혼자 놀라니까 영 시원찮네…. 멍하니 고독을 즐기려 해도 어슬렁어슬렁 내 곁을 맴도는 아이들이 불어났다. “아, 안녕 채원아?”“엉, 안녕.”“너 머리 이뿌다.”“고마어.” 전부 여자아이들이었다. 다들 얌전하고 소심해 보이는 게 선생님 말대로 착한 애들뿐이더라. ‘나 옛날에는 뭐 하고 놀았지?’ 지금 말고 남자였을 때. 기억이 흐릿하다만 바깥에서 우당탕 뛰놀았던 듯싶다. 변변한 장난감 하나 없던 보육원이었으니, 기껏해야 나뭇가지나 휘두르며 놀았겠지. ‘그러고 보니 여기 남자애들은 뭐 하고 놀까.’ 처음 교실에 들어섰을 땐 미처 몰랐는데, 누가 금이라도 그어놓은 양 여자애들과 남자애들이 제각기 뭉쳐있었다. 그러니 저 건너편에 옹기종기 뭉친 무리가 곧 사내애들이렷다. 내가 들어온 이래로 흘끔대는 눈길이 끊이질 않는 걸 보면, 나를 꺼려서 떨어져 있는 건 아닌 듯하고. ‘규칙인가?’ 궁금해서 옆에 아이에게 쟤네는 뭐하냐고 물어봤다. “몰라? 관심업서.”“신경쓰지마. 나쁜놈들이야.”“채원아 쳐다보지마 바보 옮아.” 한 명한테 물어봤을 뿐인데 반응이 우수수 쏟아졌다. ‘아하, 사이가 안 좋구나.’ “다들 얌전해 보이는데.”“오늘 대장 원숭이가 안 와서 그래.”“대장?”“응! 하진수라고 있어. 걔가 시연이 막 괴롭혔어.”“맞아맞아. 나쁜 놈!” 어딜 가나 있지. 무리에서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애들. 그런 녀석이 있다는 건 둘째치고. ‘심심해.’ 여자애들보단 더 재밌게 놀지 않을까. 칼싸움이라든지. 뭐 그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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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디가 채원아.” 그림책을 손에 쥔 시연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자애들이 모여있던 곳으로 향했다. 얘는 무서우면 저기 앉아 있지 왜 또 따라온대? “야 너네 뭐해?”“어?!”“뭐, 뭐야.” 신입이 난데없이 불문율을 깨고 들이닥치자 남자애들이 화들짝 놀랐다. ‘거 되게 놀라네.’ 사사로운 반응은 무시하고.둥글게 앉아서 뭘 하나 봤더니. 카드? 인가? ‘…어?!’ 더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설마 저거…! 포켓몹!!! 듀얼킹!!! “너, 너희 이거 어디서 나써!”“어? 무, 문방구...?”“아빠가 사좄는데.”“이, 이게 얼마나 귀한 건데! 이걸 딱지 치듯이 다뤄!” 카드놀이가 유행할 때였구나! 이 허접해 보이는 종이 쪼가리들은 시간 지나면 몇 배로 가격이 뛰어오른다고! 정확히 어떤 카드인지는 몰라도. 게임에서 장사하던 녀석이 자랑스럽게 떠들던 걸 똑똑히 기억한다. 허풍인 줄 알고 인터넷에 확인까지 해봤다니까. “너도 듀얼킹 조아해?”“야야 여자애들은 인형이나 좋아하지, 관심 없어.” 관심 많거든. 정확히는 저 카드의 ‘값어치’에. “짱 좋아해.”“오오, 진짜?”“거짓말! 무슨 캐릭터 아는데.”“나 그거, 어… 용.”“치, 뭔지도 모르자나.” 이 순진한 녀석들.그 카드들은 평범한 장난감이 아니란다. ‘이게 내 주식이고 부동산이야!’ “야 너 나와 거슬리게. 팍씨.”“윽. 무슨 여자애가… 힝….” 쓸데없이 시비 거는 한 녀석을 밀어내고 중앙으로 다가갔다. 형형색색 펼쳐진 카드의 향연. ‘오, 영롱한 미래의 자산들이여.’ 앞으로는 아빠한테 선물은 전부 듀얼킹이나, 포켓몹 같은 카드로 달라고 해야지.나만 믿어 엄마! 아빠! 딸내미 돈 벌어 간다! 일단, 뭐가 뭔지 파악해 보기로 했다. “야, 초록이. 저 중에 뭐가 비싼… 아니 조은 카드야?”“나?”“그래. 너밖에 더 있냐. 초록 옷 이븐 게.”“…저거 하얀 용. 공격력 높은 거.” 카드 주인의 허락을 맡고 요리조리 자세히 살펴봤다. ‘얘는 딱 봐도 돈 냄새가 난다. 이름 기억 해놔야지.’ “채, 채원아아. 내가 다른 그림책 줄게… 돌아가자아….”“괜찮아. 난 지금 카드 놀이가 더 재미써.”“잉….” 꾸역꾸역 따라온 김시연은 금방이라도 떠날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옆자리를 지켰다. 그렇게 한참을 관찰한 끝에 깨달은 사실. ‘얘네 듀얼 할 줄도 모르잖아.’ 숫자 계산이 안 되니 그저 ‘이 카드가 더 이쁘니’, ‘저 카드가 더 세 보이니’ 따위로 옥신각신하며 노는 게 전부였다. ‘흠, 얘네한테는 값진 물건이 아닐지도?’ 턱을 괴고 골똘히 고민하다가 손목에 차고 있던 비즈 팔찌를 빼 들었다. “선착순! 내 맘에 드는 카드 가져오면 이 팔찌 주께!”“선차수가 뭐야?”“이름 같은데….”“카드 주면 팔찌 준다고?” 어려운 말을 썼다가 아차 싶었지만, 다행히 뜻은 얼추 통했다. “이거 내가 직접 만든 거야. 내가 아끼는 거!” 정작 카드 주인들이 머뭇대는 사이, 엉뚱하게 김시연이 가장 먼저 달려왔다. “나! 나나! 채원아 나 주라!”“너도 카드 이써? 듀얼킹이나 포켓몹만 받을거야.”“어, 없는데… 내일 사올게!”“그럼 내일 오시고.”“히잉.” 아까 그림 놀이 할 때도 느꼈다만. 이 녀석, 미련 뚝뚝 묻어나는 표정 하나만큼은 가히 일품이었다. 쑥덕쑥덕— “팔찌….”“엄청 귀한 건가 봐.”“그러게, 시연이가 저렇게 매달리잖아….”“내 거 주께! 나랑 바꿔!” 시연의 열연(?) 덕에 한번 물꼬가 터지자, 너도나도 제 카드를 가져가라고 외쳤고. ‘흐흐흐.’ 나는 제일 마음에 드는 카드를 들고 온 녀석에게 팔찌를 넘겼다. 이게 바로 장사의 맛이지!게임에서 아이템 팔던 시절이 떠오르는걸. 어차피 팔찌는 아빠가 사준 비즈 세트로 만들면 그만이지롱. “힣 고마어—!” 뜻밖의 수확에 활짝 웃고 있었는데. “나, 나는 그냥 줄게…!”“채원아, 내 것도 줄까?” 웬걸, 아무런 대가도 없이 카드를 안기는 녀석들마저 있었다. ‘뭐징?’ “고마어!”“별거 아냐!”“응응, 우린 카드 많아.” 으흐흫. 나는 부자다!! *** 채원의 아빠 이정환과 엄마 박은정은 딸 걱정에 여념이 없었다. “걱정이네. 우리 채원이, 잘 적응하려나?”“잘하겠지. 누구 딸인데.” 주변에서는 말렸지만, 두 사람은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는 딸의 응석을 받아준 적이 있었다. 솔직히 집에서 딸과 더 붙어있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 워낙 영특한 아이라 굳이 안 보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그러나, 우연히 보게 된 TV의 유아 전문가 왈.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은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또래 친구들과 부모 아닌 어른을 마주하며 양보와 규칙 같은 사회성, 그리고 독립심을 처음으로 익히는 작은 사회입니다. 결국, 부랴부랴 유치원을 보내긴 했으나. “채원이가 착하긴 한데… 규칙을 잘 따를까?”“음, 그건….” 매사 낙천적이던 정환마저 어정쩡하게 말끝을 흐렸다. ‘흥, 시른데?’ 불퉁하게 입을 놀리는 딸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제 주관이 또렷한 아이였다. 생떼를 부리는 법은 없으니, 부모로선 기특하다만. ‘애들끼리 옳고 그름이 어디 있겠어.’ 감정싸움으로 치달으면 답도 없다. “그래도 머리 좋은 아이니까. 별일 없을 거야.”“응.” 한 아름 걱정을 끌어안고 유치원에 들어서니. “오셨어요?”“네, 채원이 잘 있었나요?”“어후, 그럼요. 채원아, 엄마 아빠 오셨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멀리서 어여쁜 딸이 뿅 하고 튀어나왔다. “엄마아아—”“우리 딸 잘 놀았어?”“응! 열심히 일했어!”“일…?”“내가 우리 집안을 일으킬 거야.”“그래그래, 우리 딸. 이제 집에 가자.”무슨 놀이를 했는지는 몰라도 재밌게 보낸 듯하여 마음이 놓였다. ... ...그리고 이튿날. [다름이 아니라요. 어머님… 채원이가 남자애랑 다퉈서요. 아무래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 연락드렸어요.]“네에에?! 우, 우리 채원이 괜찮나요? 이이이, 무슨!”[아뇨아뇨 어머님, 그 진정을 하시고….]“어떻게 진정 해요! 유치원 보낸 지 이틀 만에 애가 맞았다는데…!”[네? 어… 그게 아니라 어머님, 오해가 약간 있으신 것 같아요….] 쩔쩔매던 원장이 조심스레 한마디를 보탰다. [채원이가… 그 남자애를 때린 거예요.]“느에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