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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

쌀먹러가 너무 예쁨 — novelpia.com · All chapters

일곱 살

“듀얼킹 카드 왜 안 사주는데!”“안 돼. 저번에도 사줬잖아.”“아아아아. 왜애애애 나 좋자고 이래? 앙? 나 좋자고 이러냐고오.”“…얘가 어디서 또 이상한 영상을 보고 왔나. 무슨 말투래.”   팔다리를 있는 힘껏 휘저어 봤으나 엄마는 요지부동이었다.   ‘뼈다귀 드래곤 한 장만 나오면 되는데!!’   어린이날, 생일, 무슨무슨 기념일까지 죄다 끌어다 썼는데도 끝내 그 카드를 손에 넣지 못했다.   ‘저건 진짜 비싸게 생겼단 말이야. 십 년만 묵혀두면 우리 집 평수가 달라질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엄마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나 같아도 7살짜리 딸내미가 ‘이 인형 묵혀두면 백 배 뛴다!’ 하면 콧방귀를 뀔 거다.   ‘갖고 싶어서 말 지어낸다고 하겠지?’   그래서 그냥 체면을 내던진 채 솔직하게 갖고 싶다고 졸랐고.   초반에, 특히 아빠가 좋아라 사다 줬으나….   “이채원. 너 맨날 카드만 끼고 살 거야? 지금 집에 쌓인 것만 해도 차고 넘쳐. 카드 구매 오늘부로 금지야.”“느에에에엑?! 그, 그게 무슨 소리요…! 그대가 내게 어찌 그럴 수 있단 마리오!”“…너 텔레비전 보는 것도 금지당하고 싶어? 진지한 얘기할 때 사극 따라 하지 말랬지.”“넵, 엄마. 근데 카드는… 봐죠. 히.”   회심의 필살기로 양손을 쥐었다 폈다 잼잼거려도 봤건만, 엄마는 강경했다.   “절대 안 돼. 저기 산더미처럼 쌓인 거 봐라. 중독이야, 중독. 그리고 아빠한테 몰래 애교 부려봐야 헛수고다. 엄마가 용돈 죄다 압수했거든.”“이, 이럴 수가! 아바마마께 대체 무슨 짓을 한 게야!”“쓰읍—”“아아, 리모컨 가져가지 마아. 아아, 미아내.”   유치원에 다니는 내내, 부지런히 카드 게임을 포교해 왔다.   선생님과 학부모들에겐 “숫자 공부가 절로 됩니다”라며 그럴싸하게 설득했고.   애들은 듀얼과 수집의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넘어왔다.   당연히 이 바닥의 듀얼킹은 나였으며, 아빠의 전폭적인 지원 덕에 제일 다양한 카드를 보유했던 것 또한 나였다.   그러나 어젯밤, 수북이 쌓인 카드 보관함이 그만 엄마 손에 발각되고 말았고. 주기적으로 카드를 공급하던 아빠가 안방에서 무참히 도륙(?)당했다.   문방구에 막 입고된 새 박스의 메인 모델 ‘뼈다귀 드래곤’은 아직 우리 유치원에서 아무도 뽑지 못한 상태.   ‘제일 먼저 손에 넣고 싶었는데!!’   든든한 우군이던 아빠의 보급이 끊긴 나.   이젠 카드 팩 뽑기 하나 못해서 시연이나 애들에게 빌붙어서 구경만 해야 하는 건가.   ‘이런 제길. 유치원 애들이 날 얼마나 조빱으로 볼까!’   명색이 듀얼킹인데!   새삼 돈이라는 것의 위대함을 뼈저리게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엄마는 나중에 카드 팔아서 돈 벌면 뽀찌 하나도 안 줄 테다.’   아빠와 아련한 눈빛을 주고받을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다음 날 울적하게 유치원에 등원했다.   “안녀엉.”“채워나 와써!”“넌 잠도 없니. 어떻게 맨날 먼저 와 있어.”   김시연과 짤막한 인사를 나누고, 내 지정석인 창가 자리로 꼬물꼬물 기어갔다.   “채워나 뭐 해?”“…광합성.”“또 어려운 말 쓰네. 나랑 놀래?”“뭐 하고.”“쨔잔! 이거 새로 산 그림책이다~ 듀얼킹 캐릭터 모음! 색칠노리하자.”   ‘얘는 물리지도 않나. 그림을 어쩜 이리 좋아할까.’   아침부터 애들 놀이나 시키려 들기에 거부하려 했다.   “유치해. 별로야.”“응? 너 말만 그러고 네가 제일 열시미 하자나.”“윽. 그, 그건 나도 모르게… 내 의지가 아닌.”“채워니가 좋아하는 듀얼킹에 나온 마법소녀 캐릭터도 이써.”“…좋아하는 거 아니거든.”“닳는다고 잘 꺼내지도 아느면서?”“…….”   오해다. 이 카드가 제일 귀해 보여서 잘 보관하고 있을 뿐이다.정말이다.   다들 안 좋다고 하던데 내가 보기엔 핑크색도 연하게 고급스럽고.입고 있는 의상도 하늘하늘하니 코스프레하기도 좋아 보이고.   ‘이뿐데. 무조건 애가 제일 비쌈.’   절대 개인적인 취향이 아니라. 뭔가 딱 꽂혀서 그런 거야 진짜로.   “이게 안목이라는 거야. 투자라고 아라? 내가 이 마법소녀를 애지중지하는 건 냉정한 판단으로서 미래의 가치를—”“혀가 기네.”“뭐?! 너 어디서 그런 나쁜 말 배워써!”“채워니.”“윽.”   무튼, 내가 저런 블링블링한 걸 좋아할 리가 없잖아.캐릭터가 아니라 카드가 너무 잘빠져서 그런 라니까?   그래! 오히려 그림책 쪽의 캐릭터는 영 시원찮을지도 몰라!   ……그러니. 딱히 관심은 없지만 확인만 해볼까?   “…보자, 그림책.”“히히, 그럴 줄 알았어. 여기, 색연필도!”“….”   받아 들긴 했는데. 어째 내가 거부할 거라는 생각 자체를 안 한 거 같아 기분이 복잡 미묘했다.   “뭐… 할 것도 없으니.”   색칠하는 것 자체는 재미가 없을 수 없잖아.그렇지 않나? 시간도 잘 가고. 응응.   바닥에 그림책을 펼쳐두고 나란히 엎드려 각자의 작품에 몰두했다.   ‘엥, 이런 분홍색이 아닌데. 좀 더 연한 거 없나. 덧칠을 해야하남.’   “왕, 채원이 잘한다. 나도 여러 가지 섞어서 쓸까?”“흠흠. 별거 아냐. 너도 해봐.”   ‘이 정도쯤이야.’   뿌듯하게 코끝을 쓱쓱 문질렀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려는데.   “헹! 이게 뭐냐! 계집애들이나 하는 놀이!”   어느샌가 나타난 하진수가 요란하게 들이닥쳤다.   ‘주로 여자애들 하는 놀이긴 하지.’   얼추 동의하는 바라 그닥 긁히지 않았——   “그런 재미도 없는 걸 왜 하냐?”   ……아니, 재미는 있지 않나?   단순 색칠을 넘어, 그 위에 꾸미는 맛도 쏠쏠하다고.땀내 나게 안 뛰어다녀도 되고?고상하게 누워서 할 수도 있고?   허, 참. 지는 뭐 얼마나 재밌게 논다고.   '곱씹을수록 짜증 나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또 맞꼬 싶어서 안달 났지?”   하진수가 움찔했다.   이 나이대엔 남자가 여자보다 힘이 세고 자시고 하는 게 없다.   선생님이 잘 몰라서 그렇지 주기적으로 티 안 나게 때렸었다.   ‘시연이랑 자주 놀아서 그런가? 거슬리게 주변에서 알짱거리잖아.’   이쯤 으름장을 놓으면 알아서 설설 기는 게 보통인데.   “사, 사내 대장부는 그런 유치한 거 안 해!”   어쩐 일인지 하진수는 악을 썼다.   ‘이놈 자식이 옆에 시연이가 보고 있다고 폼 잡는 건가?’   오냐, 아무래도 오늘 짜증 났는데 너 잘 걸렸다.반 죽여놔야지.   아쉽게도 놈의 객기는 오래가지 않았고.잽싸게 줄행랑을 치더라.   저만치 달아나고 나서야 뒤를 홱 돌아보더니.   “이 폭력배야! 그리고 나 이제 배우님이라서 함부로 대하면 안 되거든! 너, 내가 유명해지면 두고 봐!”   멋대가리 없게 도망가는 주제에 말만 많네.   “쟤 왜 저런 데냐.”“아, 진수가 아역? 그런 거 한대. 어제부터 자기 배우라고 막 자랑하고 다니던데….”“…그거, 잘생긴 애들만 하는 거 아냐?”“세, 세상에 머찐 배우만 있는 건 아니니까….”   시연의 잔인하리만치 솔직한 한마디를 끝으로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아역 배우?   그러고 보니, 예전에 쟤네 엄마가 우리 엄마한테 그런 거 추천했댔는데….   내게 관심 있냐 물어보기에 단칼에 거절했었다.   일단, 내가 흥미도 없을 뿐 더러, 흐릿한 전생의 경험에 따르면 얼굴 팔리는 행위는 양날의 검이다.   관심을 잔뜩 받는 만큼 욕도 바가지로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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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끌벅적한 연예인보다 조용한 부자가 최고야.’   애초에 잘 된다는 보장 자체도 없고 말이지.   “....”   ……그래서 원래라면 추호도 마음이 없었는데.   ‘근데 쟤, 저거 하면 얼마나 받으려나?’   듀얼킹 카드 보급이 끊기고 나니, 돈이 절실했다.   물론 일을 해도 엄마가 관리를 하겠지만. 대신 떳떳하게 내 몫을 요구할 명분이 생기는 거다.   “아아— 아—”   목소리 상태 오케이. 전부터 느꼈는데 맑고 부드러워서 내 목소리임에도 듣기 좋다.   화장실에서 거울 속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봐도 영락없이 예쁘장하다.   객관성이 박살 난 평가라 굳이 입 밖으로 떠들고 다니진 않았으나.적어도 내 눈엔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등을 떠민 건 역시.   ‘쟤도 하는데 내가 왜 못 해.’   엄마한테 물어봐야지. 광고비 쌀먹 간다.   마음을 굳히기 무섭게 벌떡 일어났다.   “대장, 카드 놀이 할래?”“듀얼이야 짜식아, 듀얼.”“그래, 뜌얼 할래?”“아니. 대장님은 돈 벌러 가실 거야.”“…응?”   다가온 듀얼 신청자를 제쳐두고 곧장 원장실 전화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너 어제 카드 못 사게 한다고 해서 그러는 거지.”[아, 아닌뎁. 나, 나도 집에 보탬이 되고 싶달까나. 엄마 아빠만 일하는 것보다, 셋이 버는 게 좋은 거지….]“…얘가 엄마 아빠 잡혀갈 소리를 하네. 끊어. 집에 가서 얘기해.”[눼.]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데, 말은 어쩜 이리 청산유수인지. 전화를 내려놓은 박은정은 웃음을 흘렸다.   ‘우리 딸, 혹시 천재…?’   누굴 닮아 저리 능글맞은지는 남편을 보면 알겠다만.   “흐음.”   ‘광고 그런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건가?’   이채원을 보는 사람마다 입을 모아 곱다, 이쁘다, 칭찬하고. 박은정의 눈에도 제 딸만큼 사랑스러운 아이가 없다 자부하긴 해도.   ‘아역 배우든 광고든. 그런 거 하는 애들은 다른 거 아니야?’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온 채원의 가족에게는 더없이 아득하고 낯선 세계였다.     퇴근 후. 박은정은 딸을 데리고 귀가해 단출한 삼자대면을 가졌는데.   채원에게 불순한 꿍꿍이가 있음을 알면서도, 본인이 하고 싶다니 못 이기는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래, 그러면 엄마가 연락 한 번 해볼게.”   ‘이게 뭐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잖아?’   그렇지 않…….   “세상에, 애가 어쩜 이리 청초할까요??”   않….   “어유, 앙증맞은 것 좀 봐. 말도 어쩜 이리 야무지게 잘하니.”   아…?   “까꿍! 채원아, 여기 보고 한번 웃어볼래? 아으으, 이뻐라.”   지난번에 받아 둔 에이전시 주소로 잠시 구경하러 간다던 게.   “어머님! 근래 제가 본 마스크 중에 채원이가 단연 최곱니다. 시키는 대로 척척 소화하는 능력도 환상적이고요.”“그, 그런가요?”“네!!! 저한테!! 맡겨만 주신다면! 제가 책임지고 좋은 건으로 한번 물어와 보겠습니다!”   ‘…….’   뭐지. 간단하네.   모녀는 나란히 눈만 끔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