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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먹은 쉽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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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먹은 쉽지 않아

감독 경력 십수 년.   강 감독에게 가장 까다로운 촬영을 하나만 꼽으라면,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꼬마들 나오는 광고’를 선택할 것이다.   울고, 떼쓰고, 카메라만 들이대면 돌처럼 굳어버리고.   어른 배우 셋 어르는 것보다 애 하나 구슬리는 게 곱절은 고됐다.   지난번 음료 광고 땐 주연 아이가 세 시간을 내리 울어 재껴, 현장 전원이 단체로 넋이 나간 적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오늘의 주연은 일곱 살이라 양반이라고 할 순 있겠지만….   ‘경력도 없는 애를 메인으로?’   아무리 이 바닥이 인맥이라 해도, 광고주가 에이전시의 말만 철석같이 믿고 경력도 없는 어린아이를 집어넣어 버렸다.   아마 술친구라도 되는 모양.   이게 영화나 드라마처럼 자신의 커리어에 흠집이 남을만한 촬영이면 극구 반대했을 강 감독이었으나.   “다들 후딱 찍고 가자고.”   부업에 가까운 서브 광고 촬영이라 군말 없이 가기로 했다.   앉아서 콘티를 살펴보고 있었는데.   “감독님, 감독님!!”   같이 오래 일해온 조연출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왜.”“와, 이번 광고 완전 쉽겠는데요?”“응? 신인이라며?”“네, 근데 애가 일곱 살 답지 않게 말을 잘해요.”“오 그래?”   의젓한 아역 모델만큼 광고 찍기 좋은 게 없지.   “거기다 얘 완전 배우상. 뭔지 알죠. 그 태생이 다른 느낌.”“그래? 그냥 낙하산이 아니었나?”“노노 '이대로만 자라다오'의 표본이라니까요. 카메라 각도도 별로 안 탈 거 같은데요.”“카메라는 자식아. 니가 뭘 알아.”“진짠데, 보시면 놀랄걸요.”   믿을 수 없다는 듯, 강 감독의 한 쪽 눈썹이 비스듬히 치켜 올라갔다.   ‘그 정도 클래스의 아역이면 더 어린 나이에 뜨지 않나?’   마땅한 설명도 없이 다이렉트로 꽂히는 경우는 대개 뭣도 아닌 낙하산인 경우가 많다.   ‘얘는 좀처럼 호들갑 떨지 않는 편인데….’   호기심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안내해 봐. 어딨어.”“네. 이쪽으로.”   멀리 이동할 필요도 없이 여기저기 인사를 하고 이쪽으로 오던 이채원의 가족과 맞닥뜨렸다.   “안녕하세여.”   제 아빠의 손을 꼭 잡고 또랑또랑하게 인사하는 여자아이를 본 순간.“어머.”“오?”“귀엽네.”   현장이 작게 들썩였다.   “호오?”   강 감독 또한 만족스럽게 턱수염을 쓸었다.   인형처럼 동그란 눈, 햇살을 머금은 듯한 낯빛,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목을 집중시키는 분위기.   흔히 말해 사람을 잡아끄는 뭔가가 있었다.   ‘…이거, 물건이네.’   “안녕? 네가 채원이니?”“네에.”“그래그래, 이 아저씨가 감독이란다. 잘 부탁해.”“잘 부탁드림니다.”   예의도 바르고 말도 잘 듣고.   오늘 촬영, 의외로 편하게 가겠는걸?   그는 모처럼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자, 부모님들은 이쪽으로 와서 대기 해주시고. 채원이는 저쪽으로 가볼까?”   가볍게 카메라에 어떻게 나오는지 확인만 해봤을 뿐인데. a56186d5b6d5ce9c022921e9cc74ce1a.jpg ‘지저스—!’   대충 이리저리 들이밀어도 각도마다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오늘 내 인생작을 찍고 가리다!’   오랜만에, 죽어버린 예술혼을 불태우던 강 감독.   슬프게도.   그의 미소가 산산조각 나기까지는 채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자, 마법봉 들고~ ‘반짝반짝, 변신!’하면서 활짝 웃어주면 돼. 알았지?”   광고 제품은 요즘 한창 인기라는 듀얼킹의 마법소녀 변신 세트.   반짝이는 봉을 치켜들고 깜찍하게 한 바퀴 도는, 그 나이대 여자아이라면 누구나 신이 나서 할 법한 동작이었다.   “레디— 액션!”“……반짝반짝. 변신.”“…컷.”   뭐지, 방금.   영혼이 하나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였다.   봉을 치켜든 자세는 어쩐지 전투에 나가는 검투사와 같았고.   활짝 웃으랬더니 입꼬리만 뻣뻣하게 끌어올린 것이 영락없이 억지로 웃는 꼴이다.   그것마저도 귀여워서 그림이 되긴 한다만….   “어, 채원아. 좀 더 신나게! 우와— 변신한다아! 이런 느낌으로, 응?”“…우와. 변신한다아.”“……컷.”   뭐지, 진짜.   무슨 문제가 있는가 싶어. 한쪽 구석, 관계자석을 바라봤는데 어머니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웃음을 참는 듯한 들썩임에, 강 감독은 애써 못 본 척 시선을 거뒀다.   “그럼 이번엔, 폴짝 뛰면서! 우와— 신난다! 어때?”“…우와. 신난다. 폴짝.”“……”   역대급 사기 매물!   강 감독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채원아, 혹시 어디 아파? 잠깐 쉬었다 할까?”“…아니요. 괜차나요.”   ‘가만히만 있어도 그림이 좋은데……’   천상의 미모, 저주받은 연기력?   찍었던 걸 살펴보며 강 감독의 낯이 점점 굳어갔다.   ‘표정 봐라. 누가 보면 사약 가져다준 줄 알겠어.’   아니, 긴장 탓일 수도 있다. 아직 어린애 아닌가!   강 감독은 포기하지 않고 채원에게 다가갔다.   “채원아, 잠시 쉴까? 채원이는 괜찮겠지만, 아저씨가 쉬어야겠어.”“네에.”   촬영장엔 거대한 카메라도 많고 낯선 어른들도 많다.   어린아이들에겐 쉽지 않은 공간.   차분히 대화를 시도했다.   “채원이는 어쩌다가 이 광고 찍기로 했어?”“아, 이게 단가가 제일 쎄서요….”“단가…?”   애들이 쓸만한 단어는 아니지 않나?   서, 설마.   ‘앵벌이…?!’   21세기에 그 무슨 파렴치한.   눈을 부릅뜨고 채원의 부모님에게로 고개를 돌렸는데.   어느새 근처로 다가와 핸드폰을 들이미는 이정환이 보였다.   “씨이, 찍지마아아. 찍으면 나 하루 종일 굶는다.”“아 왜애. 귀엽게 입었는데. 몇 장만 남기자 그대로 있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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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건 아닌가?’   아빠에게 말하는 꼬락서니 보면 앵벌이는 아닌가 보다.   적응하라고 세트장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라고 한 뒤.강 감독은 혼자 고뇌에 빠졌다.   ‘대사는 아예 삭제하고. 그럴듯하게 포즈만 잡게 하자.’   아쉽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써먹을 수는 있을 거 같다.   겨우 이런 걸로 빼버리기엔 압도적인 비주얼 아닌가.   결정을 내리고는 채원을 찾아 두리번거렸고.   세트장 소품들이 모여 있는 곳의 채원을 발견했는데.   “응?”   ‘뭐야, 이 씁쓸함은??’   무언가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채원의 무해하면서도 신비로운 눈빛은 아련함을 마구 피워냈다.   바로 말없이 몇 장을 찍어냈고.   ‘어떻게 아이가 이런 수준의 감정 표현을?!’   채원의 손에 들린 무언가를 줌인 했다.   “…듀얼…킹?”   소품으로 사용된 듀얼킹 카드팩 박스.   저게 뭐기에?   강 감독은 바로 뛰쳐나와 채원에게 다가갔다.   “채원아.”“으에?! 네? 저 안 훔쳐써요.”“응? 아니아니, 그거 좋아해?”“어… 네.”   강 감독은 망설임 없이 박스 하나를 번쩍 들어 보였다.   “이거. 통째로 새걸로 너 줄게.”   채원의 눈이 땡그래지며 입을 앙다물었다.   “대신, 촬영 잘 끝나면. 어때?”“조, 좋아요!”   그리 드라마틱한 변화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태생의 한계란 노력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법.   삐걱대는 배우들을 모아놓고 의지만으로 해결될 수 있었으면 발 연기 논란 따윈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   그저 아이의 순수한 리액션을 조금이나마 더 끌어내기 위한 미끼였을 뿐이다.   그래, 분명….분명 그랬을 터인데.   “반짝반짝, 변신! 우와아— 너무너무 예뻐졌다아!”   마법소녀 세트를 가지고 놀아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꺄르르 순수하게 웃는 저 미소.봉을 휘두르는 깜찍한 손짓.카메라를 정통으로 꿰뚫는 눈웃음까지.   그야말로 완벽했다.   광고주가 여기 있었다면 이 자리에서 전속 모델 계약을 체결하자고 해도 놀라지 않을 거다.   “브라보!! 브라보오오! 컷컷컷! 오케이!! 좋아 한 번만 더 가자! 너무 좋거든 지금? 넌 너의 고점을 뚫을 수 있어! 가보자고오오오! 더 즐겁게 놀아봐!!”   이후로도 채원은 감독의 말대로 진짜 마법 소녀처럼 야무지게 자세를 잡으며 무사히 촬영을 마쳤다.       ***     “에혀.”   내 체감상 세상이 떠나가라 한숨을 내쉬었다.   뭔 짓을 한 거냐, 나.   “채원아, 집에 가자. 오늘 최고로 귀엽더라.”“사기당해써….”“응? 왜 그래? 채원이가 좋아하는 마법 소녀 캐릭터여서 선택한 거 아냐?”“……”   ‘좋아하는 거 아니라고, 그냥 관심 조금 있는 거라고.’   몇백 번 말해도 씨알도 안 먹히니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근데 광고는 내가 선택한 거 아니냐고?   그래, 내가 광고 고른 거 맞다.뭐, 뭐, 뭐, 어쩌라고.   에이전시에서 챙겨준 광고 리스트에 듀얼킹에 나오는 마법소녀가 쓰는 마법봉 장난감이 있길래 호기심이 동했을 뿐이다.   다른 건 자동차 변신 로봇, 시시의 인형 옷장 그리고 드라마 아역 배우가 있었는데.   ‘내가 배우를 어떻게 해.’   그건 다소 본격적인 느낌이라 거부감이 강했다.   ‘난 간단하게 쌀먹하고 싶다고!’   일하는 기분이 들지 않기 위해선 그나마 흥미 있는 듀얼킹 광고가 좋았고.게다가 그게 돈도 제일 많이 준댔다.   ……그리고 겸사겸사 마법봉의 퀄리티가 제대로 뽑혔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무튼, 그런 의식의 흐름을 따라 광고를 찍게 되었던거다.   ‘이거 애들 보는 만화 채널에 다 나온댔는데…! 큰일 났다…!’   내가 춤추는 그 장면들을 유치원 애들이 시청한다고?   “죽으까.”“응? 채원이 죽 먹고 싶어?”“아니….”   와중에도 품에 소중히 안고 있던 듀얼킹 박스를 쳐다봤다.   뼈다귀 드래곤.   ‘그래 이놈이 문제다.’   듀얼킹 스튜디오 아니랄까 봐. 세트장에 이놈 카드 박스가 산처럼 쌓여있더라.   '와, 저거 한 박스에 30팩 들어있던데'하고 침을 질질 흘리다가, 눈이 돌아가 버린 게지.   감독에게 뼈다귀드래곤 한 박스를 받고 나서부터 뭔가 마음속에 리미터가 해체된 기분이었다.   ‘최선을 다해야지!’ 하고 임했고. 정신 차렸더니 마법봉을 가지고 신나게 놀아버린 소녀1이 되어버렸다.   따지고 보면 내 광고비가 이거보다 훨씬 비싼데.   ‘한 박스에 3만 원도 안 하잖아. 왜 그랬던 거지….’   왜기는.   ……이게 다 엄마가 카드 구매 금지해서 그래.바보, 말미잘, 똥개.   말로 하면 꿀밤을 맞을 거 같아서. 운전 중인 엄마의 뒤통수에 원망을 담아 부리부리 쳐다봤다.   좀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이래서 애들이 부모 탓을 하나.   그때 아빠가 뒤돌아서 폰으로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딸~ 아빠가 사진 잔뜩 찍어 놨어. 볼래?”“으아아악 처리 치워어.”“왜애, 이쁜데.”   그렇게 찍지 말라고 으르릉거렸는데도 날 무시하다니.   “…밥 안 먹어.”   아빠는 때려봐야 오히려 좋아해 버리니까, 그리 좋아 죽는 이 몸뚱이를 대신 괴롭혀주마.   “굶으면 네 손해지. 굶어라~”   아빠 대신 운전하던 엄마가 쿨하게 답했다.   “자기야, 우리 오늘 치킨 먹을까?”“좋은데? 채원이는 안 먹어?”“……치킨?”   음, 엄마 말이 맞긴 해.굶으면 내 손해지.내가 굶을 필요가 있나.없어 응응.역시 현명한 건 엄마다.   “순살 먹을래.”“프하핳. 그래그래. 가는 길에 포장해 가자.”     ...     그 후로 대략 3개월이 지나고.   광고가 머릿속에서 흐릿해질 무렵.   드르륵—   “어! 채워나! 와써?”“…너! 너너너! 그거!”   유치원에 등원했더니 김시연이 익숙한 마법봉을 손에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