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버는 승리?
존버는 승리?
김시연이 내 앞에서 마법봉을 마구 휘둘렀다. “너, 너너 그거 어디서 났어?”“헤헤, 이쁘지? 아빠가 사줘 써.” 3개월이 지나 잠시 잊고 있던 광고에 대한 것들이 새록새록. 저 무시무시한 도구의 정확한 명칭은 ‘마법 소녀 루시의 매직 완드(Wand)’다. 내가 소지한 몇 안 되는 반짝이 듀얼킹 카드 중 하나인 루시의 무기. 장난감은 그래 뭐.우린 7살이고.듀얼킹은 한창 유행인 데다.마법소녀 루시는 귀여우니까. ‘살 수 있지 응응….’하고 넘어가기엔 타이밍이 공교롭다. 설마, 어제부터가 광고 나오는 날이었나? 아니나 다를까. “히, 채워니 너무 이쁘더라. 아빠한테 부탁해서 녹화도 해나써.”“뭐? 그걸 왜!”“응? 이뿌길래! 가끔 보려고.”“…어?” 얘는 가끔 보면 날 너무 좋아한단 말이지.맨날 붙어먹으려 들고. ‘원래 여자애들은 이러나?’ 음.불편한 건 아니라 상관없긴 한데. 녹화까지 할 정성이라니. 처음엔 날 놀리려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저 순진한 얼굴에 그런 의심을 쏘아내긴 어려웠다. “양 갈래머리도 좋더라! 루시랑 똑같아.”“그래?”“아니다, 루시보다 채워니가 더 이뻐.”“크흠흠. 그런가…? 어울렸어?”“응응응. 완전! 평소에도 하고 다니지.”“…힣.” 부끄럽네에.순수한 칭찬 세례에 머쓱해서 머리만 긁적였다. 딱 시연이까지만이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야 폭력배. 너 왜 나 따라서 배우 하려고 하냐! 너는 그래봐야 겨우 광고지만! 하하.”“…니가 찍은 건 2초 나오는 소품 대역급이고 난 광고 주연인데.”“그게 무슨 마리야? 너 말 좀 쉽게 해. 바보야?”“이런 씨….”“아무튼 난 드라마고, 넌 짧은 광고일 뿐이자나! 다음엔 더 노력해 봐! 하하하.”“그래서 너 얼마 받았는데? 야! 어디가 야야! 대답하고 가. 야 이새끼야!” 말 안 통하는 우동사리가 열받게 하지를 않나. “여기 이렇게 버튼을 누르면!”“와아아 예뻐졌다아아!”“아냐아냐, 좀 더 폴짝폴짝 뛰어야지. 채원이는 더 높이 뛰었어.”“그건 쟤가 점프를 잘하는 건데.” 내 광고를 따라 하며 노는 애들도 있고. “박수우우. 우리 채원이가 티비에 나왔어요. 다 같이 볼까?”““네에에에!”” 끼야아아아악——!! 아이의 멘탈을 보호해 줘야 할 선생님이 나서서 내 흑역사 고로시에 동참했다. 나는 내 광고 보기 싫어서. 좋아하던 만화 채널도 피하고 있는데! 3개월간 TV의 여러 애니메이션 채널에 주기적으로 나온다더라. 촬영장에서 이미 완성본을 봤어서.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하지도 않았거늘. 유치원에서 강제로 보게 되었다. 『친구들의 마음을 지키는 한 줄기 빛! 마법 소녀, 루시!』 핑크빛 드레스를 차려입고, 별이 콕콕 박힌 마법봉을 두 손에 꼭 쥔 채.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활짝 웃고 있는 여자아이. 아이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채워니 귀엽다!!”“대장 안 같아….”“그니까… 음.”“나도 갖고 싶다 저거.”“와 티비에 대장 나와!” 『가까운 문구점에서 만나요! 루시의— 매직 완드!』 물론, 나는 15초밖에 안 되는 광고임에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제대로 못 봤고. 나약한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끄라고오오오.” 이후 다른 유치원 반 애들에게도 ‘쟤야 재 마법 소녀.’ 따위로 불리는 수모를 겪어야 했는데. 뼈다귀 드래곤을 얻은 대가치고는 다소….파괴적이었다……. ... 두 달 정도 흐르고 나니까.내 삶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 슈퍼스타의 삶을 말이다. 놀이터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는데 대뜸 초등학생 무리가 내게 손가락질했으며. 동네 아주머니는 내게 과자를 주셨고. 경비 아저씨가 예의 바르다며 사탕을 나눠줬다. 엄마는 도대체 그게 네 광고랑 무슨 상관이냐며 그거 연예인 병이라고 하셨지만. ‘두, 두렵다. 모두가 날 알아!’ 엄마는 쥐뿔도 모른다. 그전에는 이 정도 아니었다니까?세상이 친절해졌다고! 다들 광고를 보고 날 알아본 게 틀림없다. 얼굴을 가리기 위해 아빠 선글라스라도 뺏어서 써보려 했으나 사이즈 이슈로 실패한 뒤, 최대한 은밀히 다니려 노력 중이다. 샤샤샥— 샤샥— 엄마와 아빠의 덩치를 이용한 닌자 전술. “꼴값이다. 꼴값이야.”“귀엽잖아. 내버려두자. 크흡.” 노골적인 비웃음에.애들한테 하던 것처럼 중지를 치켜올리려다가 ‘아 부모님이지.’ 하고 멈췄다. ‘내가 참아야지. 응.’ 오늘은 엄마 아빠를 데리고 증권사에 가는 길. “내가 원하는 거 살 거야! 분명히 말했다?”“어이구, 그럼요. 공주님 여부가 있겠습니까.”“…주식 같은 걸 어떻게 안 거지? 오빠, 애 앞에서 돈 이야기 하지 말랬지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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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니야. 우리 채원이가 똘똘한 거라니까?” 엄마는 여전히 툴툴거리며 은행에 넣어두는 게 최고라며 주장했지만. ‘내가 번 내 돈이야! 카드도 못 사게 하면서! 주식이라도 사줘!’ 라는 무적 논리로 우겨서 이겨냈다. 내 광고비는 이것저것 뗀 뒤. 대략 100만 원 정도 되었다. 짜다 짜. 광고가 3개월짜리인 데다 아역은 원래 많이 안 준다더라.신인치고는 말도 안 되게 많이 받은 거라고 하긴 하던데. 몰라. 몰라.정신적 데미지는 그 이상이라고. 대신, 광고 방영하고 1개월쯤인가? 완구사에서 전속 계약을 해주면 금액을 몇 배로 올려주겠다며 제안해 왔지만. ‘응, 안 해.’ 원하던 뼈다귀 드래곤은 손에 넣었는데.돈을 벌었다고 해서 엄마가 카드 구매 금지를 풀어주는 일은 없었다. 내 지갑으로 돈이 들어오면 모를까.만지지도 못하는 통장에 쌓이는 건 의욕이 안 생기더라. ‘촬영 귀찮기도 하고… 일 열심히 해서 버는 느낌이라 영 안 끌려.’ 그런 종합적인 이유로 광고 건은 일단 거절했었다. 날로 먹고 싶단 말이야.그래, 주식. 이것처럼. 증권사에 도착하자마자 쌀먹 본능이 꿈틀거렸다. “나도 채원이 따라서 몇 주만 사볼까…?”“죽는다. 안돼.”“넵.”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주식으로 집안을 말아먹을 뻔한 적이 있어서 주식이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켰었다. 내 주식 계좌를 만들어 주는 건 소액이기도 하고. “잃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겠지.” 인생 공부의 일환으로서 허락해 준 거다. ‘하지만, 난 잃을 리가 없지롱.’ 수익률은 장담 못 한다. 전생의 기억은 상당히 흐릿한 데다가.당시 주식 자체에도 관심이 없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살아남은 기업을 사는 것뿐이니까. ‘적어도 잃진 않잖아?’ 직원의 안내를 받아 계좌를 만들었다. “공주 어떤 거 살래? 아빠가 추천해 줄까?”“돼써.” 내가 아는 거 살 거야. 훠이훠이.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보고 있는데 옆에서 아빠가 계속 떠들었다. “요거 좋은데. 요새 학생들 사이에서 미니홈피? 그런 거 꾸미는 게 유행이래 이름이… 미니월드! 세계적으로 성장할 거라는 말도 있고. 대기업이 붙어 있어서 망할 리도 없거든.”“……” 그거 개 같이 망하는데. “아니면, 그래! MP3! 이음리버! 캬. 이게 엄청나. 다들 하나씩 가지고 있잖아.” MP3도 귀신같이 망했고. 신나서 떠드는 거 보면 아빠도 평상시에, 주식에 관심이 꽤 있었나 본대. ‘와, 우리 아빠는 주식 하면 안 되겠다. 하나같이 파멸적인 거만 고르네.’ 엄마가 역시 현명해. 아빠는 철저히 무시하고 미래에 전 국민이 쓰게 될 코코아톡과 오성전자를 골랐다. 어떤 게 얼마나 오를지는 몰라도. ‘살아남았다는 건 강하다는 거니까!’ 성인 될 때까지 존버 가즈아. 100만 원 중 90만 원 치를 구매하고 10만 원이 남았다. ‘돈이 애매하게 남았네… 으음… 아!’ 코인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열심히 뒤적여 봤지만, 코인이라는 주식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약자인가?’ 증권사에 일하는 직원이면 잘 알겠지 싶어 직접 물어봤는데. “저기요! 코인이라는 주식도 있나요?”“코…인이요? 잠시만요. 어… 그런 건 처음 듣는데요. 고객님.”“그래여? 넹. 감사합니다아.” 뭐지? 주식아닌가?나중에 기회되면 검색해 봐야겠네. 집에 컴퓨터가 없으니 영 불편하다.이런 것조차 맘대로 검색을 못 하니. 게임은 어차피 내가 하던 게 없을거라 상관없는데.컴퓨터를 끼고 살던 사람으로서 그냥 인터넷 자체가 그립더라. “공주, 남는 10만 원은 아빠가 골라줄까?” 고민하는 사이 또 아빠가 수작을 걸어왔다. “음….” 절대 안 되지.아빠한테 맡기면 내 돈 날아갈 거 같아. 추천 받지 않아도 인터넷 하니까 떠오른 게 하나 있다. “나, 이걸로 할래.”“이게 뭐야? 링크?”“응.” 인터넷방송 플랫폼 링크(Link), 게임에서 장사하다가 좀 특이한 사람이다 싶으면 저기서 방송하는 스트리머곤 했다. ‘나도 채널 있었는데.’ 장사의 달인이라고 유치한 이름으로 노마이크 CCTV 몇 번 해보다가 접었었지…. 아무튼. 지금은 초창기라 유명하지 않아도.미래에는 스트리머라는 직업까지 생기니까. ‘주식 무조건 오르지 않을까?’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구매했다. “흐음, 아빠가 아는 사람한테 들은 기업들 많은데, 진짜 안 들어?”“채원이가 원하는 대로 사게 둬. 다 인생 공부야. 그리고 오빠…. 주식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지 몰랐네?”“어? 아니아니, 그냥 뭐 주워듣기로 하하하.” 이글거리는 엄마의 눈빛 덕에 귀찮은 아빠의 영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이채원이 8살이 되던 해.2월이 찾아왔다. 영원히 유치원생일 줄 알았던 아이들은 어느새 졸업식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어흑흑, 우리 딸 멋지다. 씩씩한 거 봐.”“채원이도 안 우는데 당신이 왜 울어….” 이정환은 맨 앞줄에서 덤덤하게 졸업 노래를 부르던 채원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제 한 달 뒤인 3월엔 초등학생이다. 유치원 보내는 게 걱정돼서 안절부절못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초등학교라니.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채원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채원이가 인기가 많아.”“아무렴, 누구 딸인데.” 졸업 기념으로 맛있는 걸 사주기로 약속했기에 채원을 데리러 가던 길. 아이들의 대화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도착하니…. “대장도 은하초등학교야?”“내가 대장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확 그냥.”“잉…. 대장을 대장이라 하지 뭐라 해.” 저 사슴 같은 눈망울과 해맑은 미소는 분명 천사가 따로 없거늘. 동네 대장 노릇을 하는 딸을 보니 다른 의미로 초등학교 생활이 걱정되는 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