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헤어지자
1. 헤어지자
3, 2, 1. 땡-!
6시다. 6시가 되자마자 바하는 초조함에 눈동자를 바쁘게 굴리며 연신 볼펜을 똑딱거렸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칼퇴를 해야 했다. 목에 칼이 들어오는 일이 있어도 말이다.
[ 오빠, 오늘 몇 시 도착이야? ]
[ 도착하면 한 8시쯤 될 것 같은데. ]
[ 8시? 알겠어. 이따 봐요. 사랑해♥ ]
[ 이따 보자. ]
8시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빨리 퇴근하고 싶은 마음에 바하는 의자 위에 있던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한시가 급했으니까.
“제발 한 명만 나가라.”
바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누구라도 먼저 스타트를 끊어 준다면 그 순간 바로 들썩거리는 이 엉덩이를 떼고 뛰어나갈 작정이었다.
“선배 오늘 끝나고 뭐 해요?”
옆에 앉아 있는 후배 동료, 두나가 물었다. 그 물음에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눈치 게임 중이라 바하의 귀에는 어떠한 말도 들어오질 않았다.
“자, 퇴근들 합시다!”
박 과장의 말에 너도나도 웃으며 퇴근 준비를 시작했다.
툭.
바하가 똑딱이던 볼펜을 책상 위에 집어 던지듯 내려놓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
대체 뭐가 그렇게도 급한지. 두나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제야 그녀의 시선이 두나에게로 향했다.
“어? 두나 씨 왜?”
“선배, 뭐가 그렇게 급해서 듣지도 못해요? 오늘 저녁 어때요? 지금 나가서 한잔, 콜?”
입꼬리를 한껏 올린 두나가 술잔을 꺾는 듯한 제스처를 하며 물었다.
“미안 미안. 오늘은 빨리 가 봐야 해. 저녁은 다음에 먹자. 나 먼저 가 볼게.”
“서, 선배!”
두나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까. 그 어떤 무엇보다도 더.
“수고하셨습니다! 먼저 퇴근할게요. 내일 봬요!”
발걸음이 너무도 가벼웠다. 바하는 붙잡는 두나를 뒤로하고 활짝 웃으며 회사에서 나왔다.
그녀가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님 연희동이요.”
바하의 말이 끝나자 멈추었던 택시가 느리게 출발했다. 그녀가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돌려 바라본 바깥 풍경은 오늘따라 유독 예뻤다. 매일 보던 하늘, 매일 보던 건물인데도 새삼 다르게만 보였다.
“보고 싶어.”
오늘이었다.
그가 돌아오는 날, 한 달 만이었다.
바하는 해외로 나가 있던 그가 돌아오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처음에는 그와 하는 영상통화만으로도 만족이 되었다. 그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 만족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를 만질 수도 없다는 생각이 한 번 머릿속에 박히자, 그와 저 사이를 막고 있는 화면이라는 하나의 벽이 점점 마음에 안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슬슬 그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을 찰나 드디어 오늘 그가 돌아온다.
“그러니까 빨리 와.”
바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때 점점 익숙한 아파트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의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갔다.
이제 정말 화면이 아닌 그와 마주 볼 생각을 하니 벌써 마음이 일렁거렸다.
집 앞에 다다르자, 택시가 멈추어 섰다. 바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기사님 감사합니다.”
***
삐비비빅.
텅 빈 집 안에 도어 록을 누르는 소리가 빠르게 퍼졌다. 그 소리가 끝나자, 바하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급하다. 급해!”
툭.
가방을 구석에 던져 놓고 앞치마부터 잽싸게 입었다. 오랜만에 그와 함께하는 저녁 식사를 대충 하고 싶지는 않았다.
“흐음, 뭐부터 해야 하지?”
바하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냉장고 앞에 섰다. 메뉴 걱정은 없었다. 그가 한국에 온다는 걸 알았기에 전날부터 장을 바리바리 한 무더기로 봐 왔었다.
“찌개부터 해야 하나? 아님 다른 거?”
냉장고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고는 우선 안에 있는 재료들을 모조리 꺼내기 시작했다.
“……이거 다 내가 산 거 맞지?”
하나하나 펼쳐 놓은 재료들을 보니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제 와 후회하면 뭐 할까. 바하가 입꼬리를 느리게 올리며 피식 웃었다.
“시간 안에 다 할 수 있겠지? 해야지. 할 수 있어.”
계속해서 자기 최면을 했다. 그러고는 성공이라도 한 건지 손에 칼을 움켜쥐었다.
탕, 탕, 탕.
적막한 주방 안에 도마와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그건 그가 제일 좋아하는 계란말이를 하기 위해 칼을 들어 파를 송송 써는 소리였다.
“이게 입으로 들어가겠어?”
그러다가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잡아먹기도 부족할 텐데~”
무슨 변태 같은 상상이라도 한 건지. 바하가 혼자 히죽히죽 웃으며 중얼거리던 입을 다물었다. 온갖 재료를 다듬는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빨리 그를 끌어안고 싶었다.
띠롱. 띠롱.
그러다 맞춰 놓은 핸드폰 알람 소리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가 도착하는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바하는 머릿속에 떠다니던 낯 뜨거운 상상들을 휙휙 집어넣고 하던 요리를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삐비비빅.
한참 요리에 집중하던 그때 현관 쪽에서 누군가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바하가 시선을 돌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활짝 웃으며 들고 있던 칼을 내려놓았다.
오늘 이 집에 올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유일하게 그녀의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단 한 사람.
그걸 깨닫자, 그녀가 현관문 쪽으로 뛰어갔다. 그때 닫혀 있던 문이 느리게 열리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한.
그는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톱배우이다.
모델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의 큰 키와 그에 걸맞은 다리 길이. 주먹만 한 얼굴.
그 안에 다 들어가 있는 눈, 코, 입. 웃기만 하면 그 커다란 눈이 순식간에 반으로 접히며 반달눈이 되었고, 그 모습은 순한 댕댕미로 인기가 치솟았다.
[ 해외 팬이 뽑은 한국의 최고 미남. ‘이한.’ ]
그를 톱스타로 올려 준 한 가지로 역시 외모를 빼놓지 못하듯 매번 그에 관한 기사가 올라왔다.
그러나 껍데기가 다라는 말이 싫었던 그는 잘생긴 얼굴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성실하게 필모를 쌓았다.
그리고 매번 올라오는 그의 미담까지.
이 모든 게 그를 지금의 위치로 올라가게 했고, 이런 그 때문에 바하는 톱스타의 숨겨진 여자가 되었다.
그들이 하는 사랑은 평범한 사랑과는 달랐다. 숨어서 사랑을 나눠야 하는, 세상 밖에 나올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렇기에 오늘도 이한은 해외 스케줄이 끝나자마자 꽁꽁 싸맨 채로 바하의 집으로 온 것이었다.
“오빠! 왔어?”
문 앞에 서 있던 바하는 이한이 보이자마자 반가움에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하……. 오빠 냄새. 너무 오랜만에 맡는다. 그리웠어.”
그의 품에 안기자마자, 옷에 약간 남아 있는 상쾌한 시트러스 향이 바하의 코를 찔렀다. 오랜만에 맡는 그의 냄새에 그녀는 그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행복해.”
겨울 냄새와 섞인 그의 향을 맡으니 정말로 이한이 돌아왔다는 사실이 점점 실감이 되었다.
“근데 오빠 또 이러고 온 거야? 그렇게 가려도 티가 난다니까! 가릴 수가 없어.”
이한을 보자마자 혼자 업이 돼 방방 뛰던 바하는 보이는 것이라곤 두 눈뿐이 없는 그를 이리 살펴보고, 저리 살펴보며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안 되겠어! 다음에 만날 때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든가 해야지!”
숨어서 하는 사랑인 만큼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으니까.
“오빠 밥은 먹었어?”
“…….”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바하는 목석처럼 서 있는 이한의 손을 잡아끌어 의자에 앉혔다.
“밥 먹자. 다 차려 놨어. 조금만 기다려.”
그러고는 그를 위해 만들어 둔 음식을 하나둘 식탁 위로 올리며 혼자 조잘조잘 떠들었다.
“짜잔! 이것 봐. 예쁘지?”
바하가 하트모양으로 부친 맛살 전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스케줄이 끝나자마자 온다던 그가 고마웠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특별함을 안겨 주고 싶었다.
그 마음으로 며칠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보기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들고 있던 음식은 역시나 그에게 보여 주자마자 부끄러움이 몸을 집어삼켰다.
“아깝다고 안 먹지 말고 다 먹어야 해!”
민망함에 바하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또 한 번 마음을 고백하는 것 같았으니까. 얼굴은 점점 붉어졌고, 심장은 터질 듯 더 콩닥거렸다.
봐도 봐도 점점 더 좋아지기만 했다.
“오빠 촬영은 어땠어? 힘들었지?”
바하가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려 화제를 돌렸다.
“오빠는 항상 괜찮다고 말만 하니까 내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집 안에는 계속해서 그녀의 목소리만 둥둥 떠다녔다.
“있잖아. 난 오늘 과장님이…….”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그동안 이한이 피곤할까 전하지 못했던 사소한 일상부터 억눌러 왔던 사랑의 속삭임까지.
말을 뱉어도, 뱉어도 끝이 없었다.
“오빠, 많이 피곤하구나?”
계속되는 조잘거림에도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 그를 보며 바하가 물었다. 그런데도 얼굴에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시차 적응도 힘들었을 와중에도 스케줄이 끝나자마자 찾아와 줬으니까.
그래서 더 괜찮은 척했다.
한마디도 안 하는 그를 보며.
“헤어지자.”
잠시 적막이 감돈 주방에 바하의 목소리가 아닌 낮게 깔린 목소리가 처음으로 주방 안을 울렸다.
“……뭐?”
예상에도 없던 그의 말에 바하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되물었다.
“헤어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