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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싫어

숨겨진 여자 — novel.naver.com · All chapters

2. 싫어

아직 뜨거운 뚝배기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데 그가 바하에게 한 첫마디는 이별이었다.

그녀를 향한 애정 표현도, 그 흔한 인사도 아닌 자신을 본다며 온종일 설레어 있었을 연인에게는 너무도 잔인한 첫마디였다.

그것도 오래된 연인이라면 더욱더.

“대…… 체 무슨 소리야? 머, 먹자. 우선 먹고 얘기해.”

단지 피곤해서만이 아니었다.

이 순간이 설레어 방방 뛰었던 그녀는 그제야 아무 말도 없이 앉아만 있던 그가, 평소와 다른 온도의 그가 보이기 시작했다.

“…….”

“…….”

집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무서웠다. 바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장난으로도, 홧김으로도 헤어짐을 말한 적이 없었던 이한이었기에 그의 눈을 바라보며 그와 말을 섞기가 너무도 두려웠다.

그의 말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분명 눈치챌 테니까.

“한바하, 나 봐.”

“싫…… 어.”

바하는 저를 부르는 그의 단호한 말투에 점점 목이 메어 왔다. 믿을 수 없는 이별 통보였다.

그녀는 이한의 눈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시선 끝에는 식탁 밑에 덜덜 떨고 있는 손이 보였다.

바하는 두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바하야, 나 봐 봐.”

“싫어. 싫, 다고 했잖아!”

“…….”

“난 오빠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어. 그냥 헤어지자고 하면 다야?”

바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등졌다. 자꾸만 눈을 마주치려는 그와 눈을 마주치기 싫었다.

“왜 이러는지 이유도! 설명도! 아무것도 없이 고작 그 ‘헤어지자’ 한마디면 우리가 헤어지는 거야? 그런 거냐고!”

“…….”

“난 헤어, 지기 싫어.”

점점 밀려드는 흥분감에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억누르며 말했다.

“그러니까 오빠가 다시 생각해.”

여전히 그와 등지고 있는 바하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앞에 놓여 있던 키친타월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내일 기사 하나 나갈 거야.”

“기…… 사? 무슨 기사?”

뜬금없이 이별을 말하더니 또 뜬금없이 기사가 나갈 거라며 말하는 이한의 말에 놀라 그녀가 시선을 돌려 바라보았다.

“스캔들.”

이한이 나지막이 말했다. 바하는 결국 넘쳐흐르는 눈물을 한 손으로 닦으며 그를 향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그까짓 게 이유라면 상관없었으니까.

“스캔들? 겨우 그거 가지고? 연예인들 사실도 아닌 스캔들 나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사실이야.”

사실이라고 말하는 그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처음 보는 눈이었다. 그는 애정도, 사랑도, 그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듯한 눈으로 하염없이 울고 있는 바하를 바라보기만 했다.

“거짓말.”

저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주변에 예쁘고 아름다운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어도 오로지 그녀 하나만을 눈에 담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바람이라니.

믿고 싶지 않았다. 아니.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

이한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바라만 보았다. 가녀린 몸을 떨고 있는 바하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오빠, 오빠랑 나 사귄 것만 7년이고, 함께 하기 시작한 날은 샐 수도 없어.”

바하가 한 마디, 한 마디 꾹꾹 눌러 담으며 그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헤어지자는 이유가 겨우 스캔들이라고? 더군다나 그 스캔들이 사실이라고? 내가 오빠를 몰라? 거짓말인 거 다 알아. 더, 그럴싸한 핑계를 대. 그러니까…….”

제발 장난이라고 말해 줘.

사실이라는 그의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한번 터지기 시작한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바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하염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믿기 싫으면 믿지 마. 말했어. 사실이라고.”

“…….”

“내일 기사 나가기 전에 정리하려고 온 거야.”

그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정리? 그 여자가 아닌 나를 정리한다고?”

‘정리’라는 단어에 애써 가다듬은 목소리가 다시 커지며 바하는 그를 향해 울부짖기 시작했다.

“누군데? 대체 누구냐고!”

바하가 그를 매섭게 노려보며 물었다. 이제 그를 보는 눈빛은 사랑이 아니었다. 원망과 분노가 가득했다.

“차히라.”

그녀의 물음에 이한은 덤덤히 답했다.

차히라.

[ ‘300억대 주식 부자’ 뜨고 있는 별. 차히라. ]

KH 그룹의 손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배우이자, 이한과는 이번 작품을 함께한 여주였다.

늘씬한 몸에 귀엽지만 예쁘장한 얼굴. 그 앳됨 속에 감출 수 없는 우아함. 그리고 모든 걸 수긍하게 만드는 든든한 배경까지.

요즘 TV만 틀면 나오는 떠오르는 신예였다.

“우리가 어떻게 헤어져? 우리가 그동안 지내온 시간은? 우리가 그냥 7년이 아니잖아……! 우리가 어떻게 사랑했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바하가 울부짖었다. 어떻게 헤어질 수 있을까. 이한은 그녀의 전부인데.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으니, 그와의 처음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

첩이었다.

평생을 한영호의 첩으로 살아왔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됐다. 바하의 엄마, 성은은 영호의 숨겨진 여자였다.

‘엄마, 왜 아빠라고 부르면 안 돼? 그럼 난 아빠가 없어?’

사랑했다.

성은은 영호를 사랑했다. 자신을 구렁텅이에 빠트리고 있는 남자를 사랑했다. 이 사랑의 대가가 자신이 낳은 아이조차도 숨어지내야 하는 것이었음에도 사랑했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 방법도, 그를 떠날 방법도 모르는 바보 같은 여자였다.

‘당신, 오긴 올 거예요? 그래서 그다음이라는 게 대체……! 언제예요?’

메말라 갔다.

하루하루 영호를 기다리며 창밖만 보고 있던 성은은 점점 메말라갔다. 오지도 않는 그를 기다리다 지쳐갈 때면 그제야 한 번씩 오는 그를 차마 놓을 수 없었다.

그렇게 그만을 기다리다 메말라 버린 성은은 어린 바하만 두고 스스로 가루가 되었다.

한영호.

바하의 아버지이자, 태산그룹을 일으킨 태산의 주인이다. 그는 바하와는 달랐다.

날카로움과 차가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고, 마음먹은 일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 해내고야 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가자.”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은 영호가 엄마를 잃고 하염없이 울고만 있는 어린 바하에게 말했다.

다정한 위로 단 한마디 없이.

그저 무뚝뚝한 말투로.

그렇게 어린 바하는 엄마를 떠나보내고 몇 번 보지도 않은 영호를 따라갔다.

저 멀리 커다란 집이 보였다. 영호의 발걸음이 멈췄다. 마치 제 미래를 예측이라도 한 걸까.

바하는 제 몸집보다 몇 배는 더 큰 저 커다란 문을 보고 멈칫거렸다. 문이 주는 위압감은 대단했으니까.

눈을 질끈 감은 바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태산가의 문턱을 처음 넘어섰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태산가의 문턱을 넘는 그 순간 집 안에 있던 영호의 가족들과 그 집 고용인들의 시선이 바하를 향했다.

그 시선에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이 넓은 집보다는 좁고 후미졌지만, 따뜻했던 성은과 단둘이 살았던 그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쟤예요? 송성은, 그 여자 딸이?”

김미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미간에 한껏 주름을 잡으며 어린 바하를 향해 고개를 까딱이는 여자, 처음 보는 바하에 대한 적대심을 온몸으로 표출하고 있는 여자.

이 집안의 안주인이자 진정한 주인이었다.

바하는 미란의 입에서 나온 성은의 이름에 몸을 움찔거렸다.

“인사해라.”

온통 처음 보는 사람들과 자신을 꺼려하는 게 느껴지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런데도 영호는 바하의 등을 무심히 툭 하고 떠밀었다.

작은 배려도 없었다. 긴장감과 무서움에 작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만, 영호는 그런 바하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제부터 네 엄마다.”

엄마란다.

진짜 엄마인 성은이 죽은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린 바하에게는 김미란이라는 새로운 엄마가 생겼다.

그것도 어린 자식을 무척이나 증오하는 듯한 그런 새로운 엄마가.

“누가 쟤 엄마라는 거예요? 재수 없게. 그 여자랑 똑같이 생겼잖아! 당신 나한테 진짜 너무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 안녕하세요.”

“하?”

아직 초등학생인 어린 바하였지만, 몇 년 안 살아 본 바하였지만, 그 짧은 시간 뼈저리게 느끼고 깨달은 것들이 있었다.

한바하는 첩의 자식이며, 태어나서는 안 되는 존재이자 어쩌다 태어나 세상을 봤지만, 첩이었던 성은이 죽으니 세상 귀찮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바하는 어디서든 밖에서 티를 낼 수 없는 태산가의 숨겨진 딸이 되었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저는 이 기사예요. 여기는 제 아들 한이고요.”

“안, 녕하세요.”

으리으리한 이 집에서 첩의 딸과 그 집 고용인의 자식.

그게 우리의 관계이자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

“사…… 랑해.”

영원할 줄 알았다.

그는 바하의 첫사랑이었다. 태산가에 발을 들인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바하의 모든 시간을 거의 함께했고, 7년을 만났다. 그는 바하에게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떠한 존재보다도 큰 사람이었다.

“사랑한다고!”

그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했다.

그 뜨거웠던 사랑이,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이 그가 고한 일방적인 이별에 끝이 나고 있었다.

“오빠는 나 안 보고 살 수 있어?”

“응. 난 살 수 있어.”

차갑게 식어 버린 그의 말에 바하는 털썩 주저앉았다.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물을 흘리는 것만이 할 수 없었다.

“다…… 시 생각할 수 없는 거야?”

바하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붙잡고 싶었으니까.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을 고쳐 돌아온다면, 아니.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바하는 그가 지금 준 이 상처 따위는 상관없었다.

괜찮았다.

그러니까 돌아와 줘. 제발.

“그럴 일 없어. 갈게.”

이한이 등을 돌리며 말했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바하는 한참을 그 문만 바라보며 눈물을 쏟았다.

얼마나 울었을까.

바하는 울다 지친 눈으로 그와의 행복한 저녁 식사를 꿈꾸며 차렸던 식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손수 차린 밥상을 향해 다가갔다.

“흡.”

손을 뻗어 하나하나 입안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또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그런데도 바하는 음식을 집어삼켰다.

식어 버린 이 음식을 먹다 보면 이한이 활짝 웃는 모습으로 문을 열고 들어와 너무 늦었지? 미안해. 라고 말하며 다시 돌아올 것만 같았다.

돌아와 미안하다고 꼬옥 안아 줄 것만 같았다.

“우욱.”

온종일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그와 함께하는 따뜻한 저녁 식사를, 그와 함께 사랑을 속삭이며 눈빛을 주고받을 저녁 시간을.

“흐윽. 싫어! 난 싫단 말이야!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딨어…….”

그런 행복한 상상에 부풀어 차렸던 식사를 바하는 변기통을 붙잡으며 토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