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거짓말
3. 거짓말
꿈이길 바랐다.
매일 울리던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고, 눈을 떠 나와 본 거실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어제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되돌릴 수 있어.”
눈으로 또 한 번 확인한 이별에 심장이 찢기는 것만 같았다. 눈을 질끈 감은 바하는 이 사실을 외면한 채 오늘도 출근을 했다.
그래도 일상은 돌아갔다.
바하의 세상이 끝났다고 해서, 바하가 힘들다고 해서, 세상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정까지 봐주는 건 아니었으니까.
“꼴이 정말 말도 아니네.”
어제의 충격에서 아직 전부 빠져나오지 못한 바하가 엘리베이터 안에 비친 얼굴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어떻게 출근 준비를 끝냈고, 어떻게 회사까지 들어온 걸까. 텅 빈 눈으로 바라본 제 얼굴은 하루 만에 많이 상해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어제 일이 결코 꿈이 아니었음을 또 한 번 깨달았다.
“울지마. 한바하.”
자꾸만 울컥하는 마음이 고개를 내밀었다. 바하는 숨을 깊게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바하는 곧장 사무실로 직행했다. 그곳에는 벌써 출근을 마친 두나가 보였다. 웃자. 바하가 힘겹게 입꼬리를 올리며 두나에게로 다가갔다.
“안녕. 두나 씨.”
“안녕하…… 선배!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눈이 완전 퉁퉁 부었잖아요!”
화장으로 감추려 했지만 처참히 실패했다. 바하의 퉁퉁 부은 눈을 보며 두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니까.
“없었어. 어젯밤에 라면 먹으면서 새드 로맨스 영화를 봤더니, 금세 퉁퉁 부었네. 창피하게.”
바하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저 걱정스러운 눈빛을 계속 바라보았다가는 힘들게 다잡았던 마음이 또다시 울컥 차오를 것 같았다.
원래 괜찮아진 것 같다가도 옆에서 ‘무슨 일 있었어? 혹시 운 거야?’라는 말을 들으면 더 금방 눈물이 차오르며 우는 것이 국룰인 것처럼.
“에휴……. 어쩐지, 정말 얼굴 붓는 건 다 하고 주무셨네요. 그래도 아무 일 없었다니까 다행이에요.”
“고마워. 두나 씨.”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감춘 채 바하는 두나와 인사가 끝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일만 했다.
잠시도 시선을 모니터에서 떼지 않았다. 다른 생각을 조금도 하기 싫어 미친 듯이 일만 했다. 그 작은 틈새 사이로 또다시 그의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와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선배 점심 안 먹어요?”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서류 속에 파묻혀 컴퓨터 앞에 앉아만 있느라 시간이 그렇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두나의 말에 바하는 그제야 시간을 확인했다.
“응? 난 괜찮아. 생각이 없네.”
“선배! 큰일 날 소리! 누가 밥을 생각으로 먹어요! 빨리 와요!”
하루 종일 굳은 표정의 바하가 걱정이라도 된 건지 두나가 그녀를 억지로 식당에 밀어 넣었다.
“맛있게 드세요.”
그렇게 생각도 없었던 점심을 받은 바하는 팀원들과 도란도란 앉아 들어가지도 않는 밥을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
“민서 씨 그거 봤어?”
“뭐요? 무슨 재미있는 거라도 있어요?”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조 대리가 재미있는 사건이라도 있는 듯 묻자, 팀원인 민서가 되물었다.
“아직 안 봤어? 이한! 차히라랑 사귄다고 인정했잖아!”
역시나 점심시간에 빠질 수 없는 이야기는 연예계 가십거리였다. 조 대리는 신이 난 듯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진짜요? 차히라는 좋겠다~ 이한 같은 남자도 만나고~ 부럽다! 부러워. 아닌가? 이한이 좋은 건가? 뭐가 됐든 잘 어울린…….”
민서는 숟가락질을 멈춘 채 조 대리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정말 인정했다고?
귀에 들리는 이한의 이야기에 바하가 멈칫거렸다. 그러고는 굳은 얼굴로 숟가락을 내려놓고 바로 핸드폰으로 기사를 확인했다.
[ ‘너를 향한 시간’이 맺어 준 사랑! 이한 ♥ 차히라, 초고속 열애 인정! 톱스타들의 당당한 사랑! ]
손이 떨려 왔고, 숨이 턱 막혀 왔다. 저 기사가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이제 정말 끝이라고.
“…….”
당당한 사랑.
누구와는 시작부터 다른 사랑이었다. 숨어다니기 급급했던 사랑과는 달리 처음부터 세상 밖으로 나와 축복을 받는 사랑.
인정해야 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사랑이었음을, 그와의 사랑이 끝이 났음을.
“바하 씨 왜 그래? 바하 씨도 이한 팬이었어?”
굳어 버린 표정을 보기라도 한 듯 같은 테이블에 있던 조 대리가 물었다.
“아니에요. 저 연예인에 관심 없는 거 아시잖아요. 먼저 들어가 볼게요. 식사들 맛있게 하세요.”
힘겹게 웃는 얼굴로 대충 대답을 한 바하가 다 먹지도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식당에서 빠져나와 옥상으로 향했다.
“하…….”
옥상 문을 열자마자 부는 차가운 바람이 바하의 얼굴을 때렸다. 옥상은 답답할 때면 올라와 한참을 앉았다가 가는 곳이었다.
그녀는 그녀만의 아지트, 옥상의 가장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오빠, 오빠는 왜 배우가 되고 싶어? 오빠는 공부도 잘하잖아.’
‘그게 이 지긋지긋한 태산에서 내가 널 완전히 데리고 나갈 수 있는 제일 빠른 방법이니까.’
정적이 감도는 옥상에서 드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이한.
그의 생각이 또 한 번 바하의 머릿속을 집어삼켰다.
‘오빠……?’
‘좋아해. 바하야.’
그렇게 21살 봄.
분홍색 벚꽃잎이 살랑살랑 떨어지던 계절에 오랫동안 꿈꿔 왔던 그와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내 인생의 여주는 너 하나야. 사랑해 바하야.’
사랑한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사랑했고, 우리의 사랑에는 끝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끝이 날 거라고 그때는 알지 못했다.
“거짓말.”
눈물이 흘렀다.
바하는 그와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이제 더는 그의 인생에 자신은 조연일 뿐이라는 사실이 바하를 아프게 했다.
그냥 지나가는 전 여자 친구역 조연 한바하.
바하는 울고 또 울며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고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은 채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오빠 제발 받…… 아! 받으란 말이야!”
받지 않을 전화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바하는 받지 않는 전화에 또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다 전화 너머 그의 목소리가 아닌 전자 안내음이 들릴 때마다 그녀는 핸드폰만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이한이 너무 미워 아이같이 소리 내서 펑펑 울었다.
***
한국이다.
태운은 미국지사 일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입국장 게이트 문이 열리자마자 저기 보이는 낯간지러운 상황에 태운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부회장니임!”
저 멀리서 플래카드를 격렬하게 흔들며 반기는 비서, 우준이 보였다. 그 모습에 태운은 고개를 절레 저었다.
“여기요! 여기!”
누가 보면 견우와 직녀가 칠석날이 되어 오랜만에 만나는 줄 알 것만 같은 호들갑이었다.
태운은 한국 땅을 밟은 지 얼마 안 돼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찰나지만 잠깐, 아주 잠깐 고민했다.
그러다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태운은 우준의 눈을 피하며 모르는 사람인 양 지나쳐 버렸다.
“부회장님! 못 보신 거예요? 아니면 못 본 척하신 거예요?”
“장 실장, 우리 저번 주에도 보지 않았어? 왜 이렇게 호들갑이지?”
태운을 창피하게 할 작전이었다면 우준의 성공이었다. 우준의 호들갑 때문일까. 입국장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의 유난스러운 재회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태운은 이 많은 시선의 이유가 당연히 우준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이 시선들의 이유에는 태운도 한몫했다.
우태운.
대한그룹의 부회장이며 이들 세계에선 핫하다면 핫한 인물 중 한 명이다. 188의 큰 키, 넓은 어깨, 자기주장이 강한 눈, 코, 입.
그가 풍기는 외적인 섹시함 또한 유명했다. 머리면 머리, 기럭지면 기럭지, 외모면 외모.
이 3박자가 잘 어우러져 있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신은 모든 걸 주시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그에게 굳이 흠을 꼽자면 자신의 곁을 내주지는 않지만,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붙잡는 정도? 진지한 것보다는 가벼운 걸 좋아해 찌라시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으로도 유명한 남자였다.
“그러니까 지금 못 본 척하신 거네요? 한국 아예 들어오시는 거잖아요! 너무하세요. 저는 저거 준비한다고 밤새웠단 말입니다.”
우준은 그가 자신의 정성을 알아주지 않자 흥이 팍 식어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태운은 그런 우준의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알겠으니까 그만 툴툴거리고, 장 실장 바로 회사로 갑시다.”
“네? 바로 회사로 가시는 겁니까? 안 피곤하세요?”
우준이 쫄쫄 쫓아오며 물었다. 그 물음에 태운은 넓디넓은 공항을 걸으며 답했다.
“괜찮아요. 들를 곳이 있어. 바로 갑시다.”
***
“하, 이거지.”
태운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집무실에는 들르지도 않은 채 곧바로 옥상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자마자 자신을 반기는 차가운 바람이 그의 몸을 감쌌다.
같은 하늘, 같은 바람이라도 여기서 맞는 바람은 왠지 느낌이 달랐다.
태운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훅 들어오는 바람 냄새에 만족을 느꼈다. 이 시원하면서도 차가운 바람이 장시간 비행으로 답답했던 마음을 씻겨 주는 것만 같았다.
“받…… 으란 말…… 이야. 흐윽.”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태운은 갑자기 들리는 희한한 소리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작고 희미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슬며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이 멈춘 곳은 사람 한 명 지나다니지 않는 옥상 한편 구석진 곳이었다. 그곳엔 한껏 웅크린 채로 아이같이 울고 있는 한 여자가 있었다.
“뭐야. 누구지? 왜 저렇게 우는 건데?”
태운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치지도 않는지 하염없이 울고만 있었다.
그 모습에 왠지 눈을 뗄 수 없었다.
핸드폰을 손에 꽉 쥔 채로 울고만 있는 그녀에게 눈을 뗄 수 없었고, 한참을 울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을 땐 태운은 순간 멈칫했다.
“흐윽.”
긴 생머리에 새하얀 얼굴, 너무 울어서 붉어진 코끝과 눈가, 눈을 살며시 감으니 넘쳐흐르는 눈물.
태운은 왜 이렇게까지 숨죽여 보는지 모르겠지만,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저 자신도 모르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숨죽여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배부르다. 배불러도 한~숨. 배고파도 한~숨. 인생 참.”
“하하. 김 대리님이 참이네요. 참.”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사원들이 하나둘 바람을 쐬러 오는 듯했다. 태운은 점점 가까워져 오는 말소리에 반사적으로 다시 그녀를 바라보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울고 있는 그녀에게로.
“그만 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