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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만 울어요

숨겨진 여자 — novel.naver.com · All chapters

4. 그만 울어요

태운이 울고 있는 바하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그러자 울음소리가 가득했던 옥상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갑자기 어디선가 툭 튀어나온 손수건에 놀란 듯했다.

“…….”

사람도 잘 안 다니는 곳이라 마음 놓고 울었는데.

울고 있는 이 모습을 누군가가 지켜봤을 거라고 생각하니 너무 민망하고 창피해 바하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숙이고만 있었다.

“이 회사에서 누가 괴롭힙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그 대답에 태운은 바하와 시선을 맞추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이러는 걸까.

바하는 그가 그러면 그럴수록 민망함에 무릎을 세우고 한껏 웅크리며 고개를 더욱더 파묻어 얼굴을 꽁꽁 감췄다.

“그러면 뭐 때문에 이렇게 웁니까?”

“…….”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혹시 이한 아세요? 오늘 스캔들을 인정한 그 남자가 사실은 제 남자 친구였어요. 그 사람이랑 7년을 만났어요. 아직도 그 남자를 사랑해요.

아니,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름도 모르는 남자에게 주절주절 떠들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말해 봤자 이한의 극성팬으로 보일 거라는 것쯤은 바하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지금은 저 남자가 자신을 못 본 척 그냥 지나가 줬으면 했다.

“받아요.”

태운은 아무 말도 없는 바하의 팔을 콕콕 찔러 받지 않은 손수건을 다시 바하에게 건넸다. 그러자 더는 거절 못 하겠다는 듯 그녀는 고개를 그대로 파묻은 채로 손만 내밀어 손수건을 받았다.

“나 때문에 못 일어나는 것 같으니까 내가 갈게요. 그만 울어요.”

빼꼼 손만 내미는 바하의 모습에 태운은 어이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귀여워 점점 궁금해졌다.

그런데 어쩌겠나.

저렇게 겁먹은 토끼처럼 꽁꽁 숨었으니.

그가 바하를 보고 피식 웃으며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

“손수건! 고, 마워요.”

뒤에서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운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만 울고 갑시다. 이제 점심시간 끝나가요. 먼저 갑니다.”

태운이 나지막이 말하며 옥상을 떠났다. 또다시 옥상은 고요해졌다. 바하는 고개를 들어 그가 주고 간 잘 다려진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왜! 왜 또 생각나는 건데! 왜!”

바하는 이름도 모르는 남자가 준 손수건을 보고도 머릿속은 또다시 이한으로 가득 찼다. 순식간에 자신을 집어삼켜 버린 그의 생각에 울컥한 바하는 태운이 준 손수건을 꼬옥 움켜쥐었다.

생가하고 싶지 않았고, 다르다고 생각하려 했다.

그 커다란 집에서 자신이 울고 있을 때마다 찾아와 건네주던 꼬깃꼬깃한 휴지 조각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려 했다.

***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어린 바하는 태산가에 들어온 순간부터 5년을 하루하루 매일 숨죽여 살아갔다. 20살, 성인이 되기까지 단 2년뿐이 남지 않았다.

18살이었던 바하는 하루빨리 성인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때가 되면 이 거지 같은 집에서 무조건 나가리라. 태산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숨겨진 딸이 아닌 그냥 한바하로 살아갈 테다.

그렇게 다짐하며 버텨 왔다.

짜악-!

“너 이게 어디라고!”

“오빠, 이거 오빠가 그런 거잖아! 이걸 왜 버려! 왜! 우리 엄마 유품인 거 알고 일부러 버린 거지? 그런 거 맞잖아!”

“그 입조심해. 누가 네 오빠야? 뭐? 유품? 네 엄마?”

“…….”

“제발 꼴 같지 않은 소리 좀 하지 마! 이 집에서 그 여자 흔적은 있을 수 없어! 너 하나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거 같으니까. 그 입 다물어.”

“야……! 한도준!”

한도준.

태산그룹의 장남이자 바하의 이복오빠이다. 어찌나 효자인지 바하가 이 집에 들어온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바하의 존재가 미란에게 어떠한 의미인지 뻔히 알고 있다는 핑계로 보기만 하면 괴롭혔다.

“죽어. 그냥 너도.”

도준이 말했다. 얼마나 보기 싫을지 바하도 알고 있었다.

아마 미란은 자신을 볼 때마다 자존심이 무너지고 있을 것이었고, 영호가 등 뒤에 숨겨 놓은 그 여자와 똑같이 자라고 있는 바하를 볼 때마다 악몽을 꾸고 있을 것이었다.

“흡. 엄마 보, 고 싶어. 나도 데려가지.”

자존심에 대놓고 울지도 못했다. 바하는 숨어서 눈물을 흘렸다. 도준의 말대로 죽어 버릴까 하는 날들이 많았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고, 이 망할 현실에 혼자 두고 떠난 엄마가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제일 힘든 건 아직은 어떠한 힘도 가지고 있지 않아 사람 취급도 안 하는 이 집구석이었다.

어쩔 수 없이 붙어 있어야 한다는 그 사실이 바하를 힘들게 했다.

“또 여기서 우는 거야?”

울고 있는 바하의 옆에서 누군가가 꼬깃꼬깃한 휴지를 쑤욱 내밀었다.

이한이었다.

바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더욱더 눈물을 터트렸다. 마치 억울하고 서러운 아이가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보자마자 팡 터트리듯이 울었다.

더욱더 서럽게.

“흐아앙! 오빠!”

“얼굴이 왜 또 이래?”

이한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나 저렇게 된 이유를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한도준이겠지.

입술은 터져 피가 맺혀 있었고, 뺨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이한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 조그맣고 가녀린 애를 대체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허구한 날 때리는지.

이한은 차가운 손바닥으로 바하의 뺨을 감쌌다. 그녀는 그런 그의 손길에 더 서러워져 훌쩍거렸다.

“한, 도준이, 흐윽.”

“……미안하다.”

착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며 항상 미안해하던 그였다. 너무나 안쓰럽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 집에 얹혀사는 고용인의 자식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는 이 집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남자가 이한이었다.

그의 존재는 바하의 안에서 너무나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

거긴 사람들이 오지도 않는 곳인데 당분간 얼씬도 하지 말아야겠어.

바하는 옥상에서 내려와 괜히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이 손수건은 또 어떻게 돌려줘야 할까.

창피함에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던 탓에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러니 당연하게 그의 이름도, 그 어떤 것도 몰랐다.

그 사람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한바하! 한 대리 어딨어?”

박 과장은 얼굴을 꾸긴 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사무실을 두리번거리며 바하를 찾았다.

“서, 선배?”

두나가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바하는 대답이 없었다.

머리로는 태운의 생각을 하고, 손은 또 그가 건네준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느라 귀까지는 열지 못한 탓에 박 과장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한바하!”

박 과장의 목소리가 또 한 번 온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옆에 있던 두나가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선배! 지금 과장님이 선배 찾고 있잖아요!”

보다 못한 두나가 마지못해 바하를 팔꿈치로 툭툭 치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두나의 손길에 정신이 번뜩 든 바하는 이제야 귀에 그가 노발대발하고 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네? 저 여기 있는데요?”

바하가 허겁지겁 벌떡 일어나 말했다.

“당장 들어와!”

평소 감정 기복이 없고, 점잖기로 유명한 박 과장이 붉어진 얼굴로 저 정도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는 걸 보니 하나는 확신했다.

분명 좋은 일은 아니었다.

바하는 사무실에 있는 팀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꽂힌 걸 느끼자 박 과장과는 다른 의미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가 박 과장의 집무실 문 앞에 섰다.

똑똑똑.

“과장님, 저 찾으셨어요?”

“들어와!”

바하가 문을 열고 빼꼼 얼굴을 내보이자 박 과장은 서류 파일 하나를 책상 위에 내던졌다. 아직도 그의 얼굴은 식지 않아 붉었고, 세상 무서운 얼굴을 하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괜히 움츠러든 바하가 눈을 피했다.

“한바하, 너 어제부터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니는 거야?”

“죄송합니다.”

“어제는 그렇게 혼자서 방방 뛰더니, 오늘은 다 죽어 가는 얼굴을 하고 말이야!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박 과장의 말에 뜨끔해서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어제는 칼퇴를 하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일을 마무리했다.

변명조차 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그렇기에 당연히 놓친 게 있을 수도 있었다.

뭐, 오늘은 말할 것도 없고.

“바하야, 한바하. 내가 제일 잘했다고 생각하는 게 널 우리 부서로 데리고 온 거야.”

“알죠. 감사해요.”

“다시 정신 차리자. 응? 네가 회사를 하루 이틀 다니는 것도 아니고.”

“네. 죄송합니다.”

정말 한심 그 자체였다.

뭐 좋은 꼴을 보겠다고 어제 온종일 헤벌쭉해져서는 그러고 다녔던 건지.

사적인 일로 정신이 팔려 일에 지장이나 주며 자신을 믿어 준 상사에게까지 피해를 끼친 저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고, 싫었다.

“퇴근해. 반차 쓰고 머리 좀 식히고 와.”

“아니에요. 과장님 죄송해요. 정신 차릴게요. 할 수 있습니다.”

“너……! 말 좀 들어. 급한 거 없으니까 반차 쓰고 아픈 거면 병원을 가든지! 내일 주말이니까 푹 쉬고 다음 주도 이러면 그땐 진짜 각오해.”

“죄송해요.”

“나가. 그만 보고 싶다. 나가. 빨리.”

박 과장은 나가라는 말과 함께 손을 휙휙 저었다. 그런 박 과장의 모습에 바하는 저절로 고개라 밑으로 떨어졌다. 그 상태로 그녀가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바보 같아. 정말.”

바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한참을 문 앞에 서 있었다. 지쳐 갔다. 박 과장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시도 때도 없이 자꾸 울컥하는 이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선배 괜찮아요?”

어느새 바하의 옆에 두나가 와 있었다.

아침부터 눈이 퉁퉁 부어 있던 바하가, 밥을 먹다 말고 사라져 또다시 눈이 새빨개진 상태로 나타난 바하가 박 과장에게 불려 가 공개적으로 깨지기까지 하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괜찮아. 과장님이 반차 쓰라고 하시네.”

바하는 자신을 걱정해 주는 두나에게 민망하고 부끄러워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그게 좋겠어요. 선배 오늘 상태 너무 안 좋아 보여요. 빨리 가서 쉬어요.”

바하는 자리로 돌아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그대로 회사를 나왔다.

회사 밖은 햇살이 쨍쨍하게 비췄지만, 차가운 바람이 불어 추웠다.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때렸지만, 답답한 이 마음은 여전히 답답하기만 했다.

그녀는 입고 있던 코트를 여미며 지금,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을 보러 발걸음을 옮겼다.

분명 뭐라고 할 텐데. 무섭다. 무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