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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너무 아파

숨겨진 여자 — novel.naver.com · All chapters

5. 너무 아파

딸랑-!

“어서 오세요.”

넓은 카페 안 친절하게 응대하는 루미의 목소리가 울렸다. 바하는 그런 루미를 보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루밍! 나 왔어!”

강루미.

그녀는 바하가 태산가에 들어가기 전부터 알고 지냈던 오랜 친구이자 바하의 몇 없는 친구 중 유일하게 태산과 바하와의 관계, 이한과 바하의 사정까지 전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세상을 살면서 기댈 수 있는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건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바하에겐 그녀가 그런 친구였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옆에 있어 주는 사람.

“……너!”

루미는 바하를 발견하자마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바하는 역시나 오늘도 제 걱정을 하고 있었던 루미에게 미안해 일부러 더 애교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딱 기다려.”

바하의 등장에 루미는 때마침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재빠르게 매장 입구로 뛰어갔다. 그러고는 문을 걸어 잠갔다.

온전히 바하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기 위해.

“이리 와! 이 미친 계집애. 이리 안 와?”

퍽! 퍽!

매장 문을 걸어 잠그자마자 몸을 돌려 바하를 향해 돌진했다. 뭐가 그리 좋은지. 헤실헤실 웃고 있는 바하의 등을 사정없이 때렸다.

바하는 등짝을 맞는 도중에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악! 미안해! 아파! 응?”

바하가 루미를 향해 손바닥을 비볐다. 루미를 걱정하게 만든 건 너무 미안했지만, 제 걱정해 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너 전화는 왜 안 받는 건데? 메시지는 왜 안 읽고? 핸드폰은 폼이야? 내가 그 기사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기나 해?”

아프다는 말에 그녀를 내리치던 손이 멈추었다. 그러고는 화가 난 듯했지만, 슬픔이 서려 있는 목소리가 바하의 귓가에 흘렀다.

“미, 안해.”

걱정이 가득한 루미의 얼굴을 보자 울컥함이 바하의 목구멍을 쳤다.

“그래서 넌 얼마나 울었는데? 안 괜찮은 거지? 괜찮다는 쓰잘데기 없는 소리 하지 마. 안 믿을 거니까.”

루미가 밉지 않게 바하를 흘겨보며 말했다. 저 말이 듣고 싶었다. 괜찮다고 하고 싶지 않았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안 괜찮았다.

너무 아팠고, 그저 지금은 그냥 누군가의 품에 안겨 펑펑 울고만 싶었다. 심장이 찢기는 것같이 아픈 그녀의 물음에 바하는 마음이 금세 울렁거렸다.

“루미야…….”

바하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갔다. 그러자 가득 차오른 눈물은 결국 왈칵 쏟아져 버렸다. 바하는 옆에 있는 루미의 품으로 파고들어 하염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안 괜찮아. 나쁜 놈. 흡. 그 새끼 진짜 나쁜 놈이야.”

“그래. 울어. 어디 가서 혼자 울지 말고, 그냥 여기서 울어.”

루미는 자신에게 안겨 오는 바하를 안아 주며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루미야. 나 아파……. 너무 아파. 죽을 것같이 아파.”

“응. 그래. 근데 오늘만 아프자.”

바하가 그냥 이렇게 자신의 품 안에서 한번 울고 끝냈으면 했다. 이제 더는 바하의 눈에서 눈물이 그만 흘렀으면 했다. 살면서 상처를 너무 많이 받은 여자였으니까.

루미는 바하의 생각만 하면 안쓰러워 가슴이 조여 왔다.

“전화도 안 받아. 오빠가 전화도 안 받는다고.”

“…….”

“진짜 끝인가 봐. 그, 런가 봐. 흡.”

바하는 하소연하듯 중얼중얼 소리 내며 울고 또 울었다.

받지 않는 전화 너머 계속되는 통화연결음은 바하에게 또다시 확인 사살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부정하고 부정했던 그와의 헤어짐은 이제 그만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심장이 지끈거렸다.

어떻게 단번에 끝낼 수 있을까. 우리가 지내온 시간은 오빠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바하는 자신의 세상이었던 이한이 너무 미웠다.

“싫어. 난 싫어. 루미야. 나 헤어지기 싫어. 오빠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그렇잖아!”

계속해서 울부짖는 바하를 바라보는 루미의 입에서는 한숨만 새어 나왔다.

“다시 돌아올까?”

바하가 루미의 옷깃을 움켜쥐며 말했다.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아니 받아들이지 못한 거겠지. 그것도 아니면 받아들이기 싫었던 거겠지.

갑작스러운 그와의 헤어짐과 갑작스러운 그의 스캔들 인정까지.

모두 다.

그와의 헤어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나면 그땐 정말 그와 지냈던 모든 시간이 없어질 것만 같았다. 정말로 자신의 세상이 없어질 것만 같아 바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다 울었어?”

한참 루미의 손을 타고 전해져 오던 바하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자, 루미가 물었다.

“으…… 응. 다 울었어.”

바하가 품에서 벗어나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한바하, 이제 말해 줄 수 있겠어? 못 하겠으면 안 해 줘도 돼. 대충 짐작은 가니까.”

모든 감정을 다 쏟아부으며 울었다는 걸 보여 주듯 눈두덩이와 코끝이 새빨개진 바하에게 조심스레 루미가 물었다.

“사실, 나도 들은 게 없어. 그냥 헤어지자. 기사 뜰 거다…….”

바하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 때문에 물기가 가득한 눈으로 싱긋 웃었지만, 그 웃음은 루미에게 통하지 않았다.

“이게 다야.”

씁쓸함을 감추려 했지만, 루미의 눈에 그게 통할 리 없었다. 루미는 예의 없는 이한의 행동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뭐라고? X발. 나쁜 새끼. 완전 미쳤네. 너 웃지 마. 안 웃긴데 왜 웃어.”

이별에도 예의가 있어야 했다.

두 사람이 사랑이라는 걸 하면서 매번 같은 마음일 수 없기에 사랑하던 두 사람이, 평생 약속했던 두 사람이 헤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바하에게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뻔히 알고 있음에도, 어떻게 설명 한마디 없이 ‘헤어지자’는 고작 그 말 한마디로 그들이 쌓아 왔던 시간을 끝낼 수 있었던 건지.

평소의 이한이었으면, 루미가 알고 있던 이한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기에 정말 그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생각, 그의 사정은 알고 싶지 않았다.

루미에게 가장 소중한 건 바하였으니까.

“괜찮아. 이제 후련해. 정말이야.”

바하가 루미에게 말했다. 루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저를 보며 조심스레 말을 건네는 그녀를 보니 또 한 번 울화가 치밀었다.

“생각할수록 열받네.”

“나 괜찮아. 네가 옆에 있잖아. 루밍.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난 안 사랑하는 거 알지? 코나 풀어. 이것아.”

그 작은 말이 너무도 고마웠다. 제 일인 것처럼 화를 내 주는 루미에게 바하는 코맹맹이 소리를 하며 엉겨 붙었다.

“기다려.”

루미는 피식 웃으며 무심한 듯 테이블 위의 휴지를 뽑아서 건네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바하가 바라만 보았다.

“자, 이거 마셔.”

루미가 따뜻한 루이보스티를 가져와 바하에게 건넸다.

“헤헤. 고마워.”

한참을 울던 바하는 민망함에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휴지에서 손을 떼고 그녀가 건네준 찻잔을 받아 손으로 감쌌다.

“따뜻하네.”

바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손으로 전해지는 따뜻함에 울어 흥분되었던 감정도 서서히 진정되는 듯했다.

“미안해. 나 때문에 매장 문까지 닫고.”

“뭘 이런 걸 가지고. 누가 뭐라고 할 거야? 내가 사장인데!”

“오오~ 강루미 멋진데~!”

바하가 루미의 장난스러운 말을 받아치며 활짝 웃었다. 그러자 루미도 하? 라며 헛웃음을 치더니 이내 웃기 시작했다.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도 왠지 알 것 같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지이잉-!

바하가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을 때였다. 옆에 있던 핸드폰이 울려 대기 시작했다. 화면에 뜬 이름에 그녀의 얼굴이 굳어져 갔다.

또다시 마음이 답답해져 왔다.

“왜? 누군데?”

“회, 장님.”

계속 울어 대는 진동에도 전화를 받지 않고 무시했다. 바하가 받지 않은 전화는 곧 수명을 다한 듯 끊겼지만, 오만이었다.

끊기자마자 다시 울어 댔으니까. 바하가 결국 핸드폰에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받기 싫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 받으면 받을 때까지 할 사람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 무슨 전화를 그렇게 늦게 받니.

“안 받았으면 그만하셨어야죠. 왜 안 받는 건지 뻔히 아시잖아요.”

꾸중하는 듯한 영호의 말에 바하가 신경질적인 말투로 맞받아쳤다. 그 말에 쯧. 이라며 영호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 오늘 들어오거라.

“오늘은 안 됩니다.”

- 들어오라면 들어와.

“아니, 안 된…….”

싫었다.

무슨 날이라도 잡은 듯 모든 게 바하를 들들 볶았다. 바하는 싫다는데도 들어오라는 영호의 말에 한숨만 나왔다.

“알겠습니다.”

끊어졌으면 하는 것들은 너무나도 끈질기게 들러붙어 바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고, 영원했으면 했던 것들은 모두 바하를 떠나갔다.

“루미야 솔직하게 말해 봐.”

“뭘?”

“나 요즘 뭐 잘못했어? 잘못한 게 있으면 말 좀 해 줄래? 정신 좀 차리게.”

루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비장하게 물었다. 장난 반 진심 반이었지만, 알고 싶었다.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하늘은 이렇게도 자신에게 무심한 건지. 이 정도면 잘해 줄 때도 됐을 텐데 왜 이렇게 못 살게만 구는 것인지.

“왜? 뭐라는데?”

“잠깐 들어오래. 싫다. 진짜. 그 거지 같은 집구석에 또 발을 들인다는 게.”

잊을 만하면 바하가 태산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영호였다. 매번 그의 부름으로 그 집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그 집에서 괴로웠던 기억들이 또다시 그녀를 집어삼켰다.

안 그래도 가기 싫은 집이었다.

“그리고 왜 하필 오늘인데.”

이한과 헤어져 제정신이 아니고 힘든 날에 불러 대는 영호가 죽을 만큼 싫었다.

안 그래도 싫은 사람 오늘은 더 싫었다.

“또 같이 가 줄까? 데려다줄게.”

“아니야. 갔다가 전화할게. 매장 다시 열어야지. 다녀올게!”

바하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떨어지지 않는 엉덩이를 억지로 의자에 떼어 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데려다준다니까.”

“아니야. 진짜 괜찮아.”

루미는 자신의 말에 고개를 절레 저으며 바라보는 바하를 보고는 똑같이 고개를 저었다.

저 고집불통을 누가 꺾으리.

루미가 밉지 않게 바하를 흘겨보며 말했다.

“알겠어. 꼭 전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