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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대는 내 여인임을 잊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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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대는 내 여인임을 잊지 마라.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다운 사내다.

매화나무 아래 선 사내는 눈처럼 휘날리는 꽃잎을 보며 입가에 한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날리는 꽃잎을 한 손으로 잡은 사내는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돌렸다.

진헌 대군, 그와 눈이 마주쳤다.

별채 쪽문 뒤에서 대군을 몰래 훔쳐보던 은설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그대로 몸을 돌려 뛰었다.

대청마루까지 뛰어온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루에 주저앉아 버렸다.

제멋대로 뛰는 심장 소리가 사내 때문인지 아니면 급하게 뛰어와서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귀신이라도 보았느냐?”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또 한 번 놀란 그녀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제 뒤에 앉은 김희겸에게 시선을 두었다.

“뭘 봤길래 이리 급하게 뛰어왔느냐. 얼굴은 또 왜 이렇게 붉어진 거야?”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은 은설은 그제야 마루에 앉아 저를 기다린 제 스승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오늘이 그림 공부하는 날인 걸 깜박하고 있었다.

“스승님, 언제 오셨습니까?”

“얼마 되지 않았다. 한 번도 지각하는 법이 없던 녀석이 어쩐 일로 지각했을까.”

“죄송합니다. 수업 있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습니다.”

“이거 왠지 서운하구나. 그리고, 낼모레면 혼인할 규수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면 되겠느냐.”

그녀의 이마 위로 내려온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던 희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서렸다.

제 스승의 다정한 미소에 긴장했던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풀렸다.

김희겸은 그녀에게 늘 그런 존재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비로부터 버림받은 그녀는 새어머니의 천대와 멸시 속에서 지옥과 같은 삶을 살았다.

그러던 중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부제학 김희겸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처지를 눈치챈 그는 글과 그림을 가르쳐 준다는 명목으로 새어머니를 멀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새어머니인 순영의 반대에도 그녀가 글과 그림을 배울 수 있었던 건 김희겸의 끈질긴 설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림을 배우는 시간만큼은 그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고통의 시간을 멈추게 해 준 희겸은 은설에게 존경하는 스승이었고 든든한 가족이었다.

김희겸은 감옥과도 같은 별채에 갇혀 살던 그녀에게 세상의 빛을 선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게 제 스승은 10년간 그녀를 아프지 않게 지켜 주었다.

“오늘이 마지막 시간이 되겠구나.”

“스승님께 배울 게 많은데 아쉽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네가 진헌 대군과 혼인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래, 기분은 어떠하냐?”

희겸의 물음에 은설은 대답 없이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갑작스러운 진헌 대군과의 혼례는 그녀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분명 구색을 갖추기 위해 간택 단자에 제 이름을 올렸다고 들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마지막 후보로 그녀가 뽑히게 되었다.

하여, 꼼짝없이 대군과 혼례를 올리게 되었다.

그녀의 깊은 한숨이 마루 위에 내려앉았다. 좋으면서도 심란한, 묘한 혼례였다.

“네가 부부인이 된다는 것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대군께서는 요즘도 이곳에 자주 들르시느냐?”

“네, 가끔 오셔서 은주 아니, 아버님과 술 한잔하시고 가십니다.”

“지금 와서 다 무슨 소용이겠냐만은 난 네가 좀 더 평범한 이를 만나 혼례를 올리길 바랐다.”

“그리 마음에 걸렸으면 스승님께서 먼저 청혼하시지, 왜 안 하셨어요?”

“뭐? 너한테?”

은설은 가볍게 던진 장난에 정색하며 얼굴까지 굳어지는 희겸을 보며 눈을 흘겼다.

“농입니다. 그렇게 정색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하, 내가 청혼하면 시집올 생각은 있고?”

“그건.”

은설이 막상 대답을 주저하자 희겸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그녀도 덩달아 웃고 말았다.

아버지가 간택 단자에 은주가 아닌 그녀의 이름을 올렸을 때 저 못지않게 화를 낸 사람이 김희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군의 소문을 들은 사람이라면 제 여식을 대군에게 절대로 보내지 않을 것이었다.

진헌 대군.

그녀가 들은 그의 소문은 그다지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방탕하고 호색한인 그는 매일 기방에서 살다시피 한다고 들었다.

그런 대군이 얼마 전부터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아버지와 대군은 항상 안채 대청마루에 앉아 술을 마셨고 그녀는 그 모습을 별채 담 너머에서 몰래 훔쳐보곤 했다.

은설도 그즈음 소문에 대해서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속절없이 자꾸 바라보게 되었다. 왠지 소문처럼 나쁜 사람일 것 같지 않았다.

그를 마음에 품은 계기는 특별하지 않았다.

대군이 처음 집에 온 날, 그녀를 바라보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별채 대청마루에 앉아 그림을 그리던 그녀는 낯선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바람에 날리는 매화 꽃잎과 함께 낮선 사내가 제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사내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에게 멈춰 있었다.

가벼운 듯 진중한 눈빛이었다.

어디서 본적이 있던가.

분명 처음인데 제 심장이 아플 만큼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온 사내의 집요한 시선에 그만 들고 있던 붓을 손에서 놓쳐 버렸다.

하얀 종이 위에 까만 먹물이 번졌다.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사내는 붓을 들어 먹물이 번진 자리에 그림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그의 유려한 손놀림에 금세 멋진 그림이 완성되었다.

-이름이…… 윤은설?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다.

어딘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별채에서만 살았던 그녀가 사내를 알 리가 없었다.

그녀가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아버지가 사내를 불렀다.

말없이 사라진 그의 이름이 진헌 대군이라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그리고, 그가 집을 찾아오는 이유가 은주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버지와 술을 마시는 중에도 대군의 시선은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살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은주가 나타났다. 대군은 아버지가 아니라 은주를 보기 위해 술을 핑계 삼아 집에 온 것 같았다.

마음을 접어야 했다.

그래서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피해 다녔고 숨었다.

제 마음을 들킬까 봐 무서웠다.

피해 다니는 그녀가 못마땅했던지 그날 이후로 그녀를 대하는 대군의 시선이 서늘해졌다.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는 그녀의 작은 세상이 되어 버린 듯했다.

그녀도 어쩔 수 없을 만큼 그에 대한 사랑은 몸집을 키워 갔다.

결국 그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를 둘러싼 소문보다는 그의 마음이 은주에게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이 더 서글펐다.

“대군에 대한 소문 말이다.”

희겸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를 상념에서 깨웠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도 들었겠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야. 너무 신경 쓸 거 없어. 만약 사실이라 해도 혼인하게 되면 달라질 것이야.”

“전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래전 내가 용기 내서 말했더라면 달라졌을까?”

“네? 무엇을 말입니까?”

자책하듯 말하는 희겸의 입가에 쓴 미소가 번졌다.

“아무것도 아니다. 운연궁에 가서는 아픈 기억들은 다 잊고 행복해야 한다.”

“그리하겠습니다. 스승님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별소리를 다 한다. 내가 뭘 했다고.”

“스승님 아니었다면 전 아마 어둠 속에서 시들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게 유일한 빛이 되어 주신 분이 스승님이십니다.”

진심이었다.

제 앞의 스승인 김희겸은 그녀에게 살아가는 힘이 되어 주었고 아픈 상처를 아물게 하는 치료제가 되어 주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시간도, 스승 김희겸과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스승님께서도 이제 좋은 분 만나서 혼인하셔야지요.”

“왜, 스승을 두고 혼자 혼인하려니까 미안해지느냐?”

“그게 아니라, 스승님 같은 분이 왜 혼인하지 않는지 궁금해서 그러지요.”

“이 나이에 무슨…… 되었다.”

“스승님 이제 겨우 스물여덟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혼인하겠다는 규수가 줄을 선다고요.”

“이 스승이 그리 걱정되면 가끔 네 그림과 함께 안부 서찰이라도 보내거라.”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희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겁 많고 눈물 많은 아이가 언제 이렇게 컸을까…… 마냥 열 살짜리 꼬마로 있을 줄 알았는데 벌써 혼인할 나이가 되었네.”

괜히 쑥스러운 마음에 얼굴이 붉어졌다.

희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귀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올려 주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낮게 깔린 스승의 목소리에 대답하려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희겸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올려 주던 손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그녀는 그대로 얼어 버렸다.

별채 앞마당을 막 들어선 진헌 대군이 화가 난 얼굴을 하고 그녀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첫 만남 이후, 한 번도 별채에 발을 들이지 않던 대군이 지금 그녀가 있는 이곳으로 들어왔다.

태어나면서 이곳에 버려지다시피 한 그녀는 순영의 허락 없인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별채가 그녀의 세상이었고 감옥이었다.

집안 사람들조차 순영의 눈치를 보느라 그녀를 찾지 않던 곳이었기에 대군 역시 발을 들이지 않았었다.

어째서일까, 옥색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뒷짐을 지고 걸어오는 그의 얼굴은 분명 화가 나 보이는데 그녀의 심장은 속절없이 뛰고 있었다.

희겸이 대청을 내려와 대군에게 인사를 했다.

그제야 은설는 정신을 차리고 제 앞까지 다가온 대군에게 고개를 숙였다.

대군의 시선이 대청마루에 놓인 종이 위를 거쳐 희겸의 얼굴에 닿았다.

“내가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한 건가. 부제학이 이 사람에게 그림 그리는 걸 가르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오늘 보니 종이 위에 그림이 아니라 사심을 채우는 것 같군.”

“무슨 뜻입니까?”

진헌 대군의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에 희겸의 날이 선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방금 내가 본 장면이 스승과 제자의 훈훈한 모습은 아닌 듯해서 말이야. 누가 보면 부제학이 이 사람의 정혼자라고 해도 믿겠어.”

“아무도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군께서 그렇게 사셨으니 그리 생각하시겠지요.”

“뭐?”

“이 아이를 10년간 가르치면서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니 이런 일로 괜한 트집 잡지 마십시오.”

“트집, 지금 트집이라 했어? 그대의 눈빛이 스승이 제자를 보는 눈빛이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인데, 장담할 수 있어?”

“대군!”

희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인상을 지으며 언성을 높였다.

은설은 이대로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희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그만하라 말했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떨고 있는 그녀를 본 희겸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더는 이런 일로 대군께 심려 끼칠 일은 없을 겁니다.”

희겸은 대군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한 발짝 물러나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빛에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은설아, 여기서 그만 인사해야겠다. 그림은 꾸준히 그리도록 하고, 잘살아야 한다.”

“네, 스승님 살펴 가세요.”

다시 한번 인사를 한 희겸은 뒤를 돌아 별채를 빠져나갔다.

희겸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진헌 대군의 시선이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떨리는 눈동자를 숨겼다.

“그, 그럼, 저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돌아서려는 그녀의 몸이 당겨진 건 한순간이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는 바람에 힘없이 그의 품에 갇혀 버렸다.

상체를 뒤로 젖히며 빠져나오려 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깊이 안기는 꼴이 되었다.

“대, 대군!”

“동생 말로는 그대가 부제학 김희겸에게 마음이 있다던데 사실이야?”

“…….”

“말을 못 하는 걸 보니 사실인가 보네. 스승과 제자? 하, 웃기지도 않네.”

“대군, 그건…… 오해십니다.”

그의 눈빛이 사나워지며 입꼬리가 뒤틀렸다.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며 다른 손을 그녀의 눈앞에 가져왔다.

주먹을 쥔 손이 눈앞에 오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움츠렸다.

다른 사람이 손만 뻗어 와도 겁을 먹는 건 순영에게 맞으면서 생긴 습관이었다.

그걸 알 리가 없는 대군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눈앞에 주먹을 펼쳐 보였다.

손바닥 위에는 아까 그가 잡았던 매화 꽃잎이 놓여 있었다.

그는 입으로 가볍게 바람을 불어 손바닥 위에 있던 매화 꽃잎을 날렸다.

꽃잎은 그녀의 볼을 스치며 아래로 떨어졌다.

“그대는 내 여인임을 잊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