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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첫날밤을 무사히 보내시길.

운연궁의 은밀한 밤 — novel.naver.com · All chapters

2. 첫날밤을 무사히 보내시길.

허리를 감고 있던 그의 팔이 풀리자 그녀의 몸이 잠시 휘청거렸다.

“김희겸에게 마음을 주었다면 다 정리하고 와. 다른 사내에게 마음이 있는 계집은 안고 싶지 않으니까.”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심하게 내뱉었다.

“그러는 대군께서는…… 아닙니다.”

마음을 다 정리할 수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를 못했다.

수많은 여자를 정리하고 무엇보다 은주에 대한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말을 하다가 마는 버릇은 여전하네”

“…….”

그와의 대화는 첫 만남 이후 오늘이 처음이다.

한데 그녀의 버릇을 어떻게 알았을까.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의 머리 위로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날 싫어하는 건 알겠는데 말이야.”

그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섰다.

“사람 앞에 두고 딴생각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그리고, 잡아먹지 않으니까 눈만 마주치면 도망가는 것 좀 그만하지.”

집요한 눈빛과 경고하듯 말하는 목소리에 온몸이 떨려 왔다.

은설은 그가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섰다.

“이렇게 온몸으로 날 거부하는 여인은 또 처음이네. 아무리 호색한이라고 해도 싫다는 사람 억지로 품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려는 순간, 별채 입구에서 은주가 대군을 불렀다.

은주는 그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왔다.

“여기 계신 줄도 모르고 한참 찾았습니다. 안채로 가시지요. 술상을 마련했습니다.”

“……그러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둔 대군은 은주와 함께 나란히 안채를 향해 걸어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하게 지나쳐가는 그를 보며 가슴이 아렸다.

별채를 벗어나기 전 고개를 돌린 은주의 입가에 차디찬 조소가 흘렸다.

마치 대군은 내 사내라 말하는 듯했다.

혼자 남은 은설은 힘없이 대청마루에 주저앉았다.

무심코 고개를 떨군 그녀는 저고리 고름 위에 얹혀 있는 매화 꽃잎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손바닥 위에 올렸다.

진헌 대군이 입바람으로 날린 꽃잎을 바라보며 그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그대는 내 여인임을 잊지 마라.

* * *

은설은 늦은 밤, 촛불이 밝혀진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서탁 위 영견을 조심스레 펼쳐 보았다.

영견 위에 놓인 새하얀 매화 꽃잎을 보자 낮에 있었던 대군과의 일이 떠올라 또다시 얼굴에 열이 올랐다.

“괜찮아, 대군에 대한 소문은 이미 알고 있었잖아. 대군께 마음을 바랄 생각도 아니었고. 이곳을 벗어날 수만 있으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

그녀는 허공에 대고 혼잣말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늙은 홀아비에게 팔려 가지 않는 것만 해도 천운이었다.

지옥 같은 이곳에서 벗어나게만 해 주는 것만 해도 은설에게는 감사할 결혼이었다.

대군께서 저를 은애해 줄 리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정말 소문과 같은 사내더라도, 제가 싫은 마음에 모멸감을 준대도 이런 치욕쯤 참아 내는 게 맞았다.

“나야, 들어갈게.”

잠시 생각에 빠진 그녀를 깨운 건 밖에서 저를 부르는 은주의 목소리였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불쑥 들어온 은주는 방 안을 한 번 둘러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은설은 영견에 있던 꽃잎을 책갈피에 끼우고 서랍 속에 넣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궁상맞게 꽃잎을 주워서 책 속에 넣고 말리니?”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잖아. 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이야?”

아무 이유 없이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소 은설을 언니 취급도 하지 않던 은주였다. 은주가 이 방에 오는 날은 은설이 어머니께 죽도록 맞고 만신창이가 되는 날 뿐이었다.

그때마다 웃으며 내뱉는 말들이 뱀처럼 사악했다.

오늘은 또 무슨 말로 상처를 줄지 벌써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같이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위로 겸 주제 파악 좀 시켜 주려고 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몰라도 듣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까불지 말고 들어. 나라고 여기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대군은 네가 아니고 날 원했어.”

대군이 원한 사람이 그녀가 아닌 은주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행동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넌 영원히 대군의 정인이 되지 못한다는 거지.”

“그게 무슨…….”

“네가 평범한 부부인이 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제발 주제 파악 좀 해. 넌 평생 대군의 마음은 가질 수 없어. 왠지 알아?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처음부터 네가 대군과 혼인하고 싶다고 했으면 되었잖아. 대군이 원하는 사람도…… 너잖아.”

입 밖으로 절대 내뱉고 싶지 않던 말을 바보처럼 꺼내 놓았다.

대군의 마음이 은주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이처럼 마음 아프지 않았다.

은주 앞에서 그 사실을 제 입으로 인정해 버리고 나니 비참했다.

“내가 미쳤어? 계집이라면 환장하는 그런 놈과 혼인하게. 막말로 다음 왕이 될 사람이면 그까짓 것 참을 수 있어. 근데 그것도 아니잖아. 난 그냥 대군이 내게 안달하는 모습을 즐기고 싶은 것뿐이야.”

“…….”

“어떡하니, 넌 평생 가질 수 없는 마음을 난 이미 가져 버렸네.”

은설은 속으로 되새겼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게만 해 준다면 대군이 평생 저를 봐 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가 호색한이든 방탕하든 아무 상관 없어야 한다.

하지만 은주의 말이 비수가 되어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대군 말이야, 간택 단자에 나를 올리지 않고 널 올렸다고 화가 많이 났나 보더라. 너 초야부터 소박맞으면 어떡하니.”

은주의 시선이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내렸다.

“잘해 봐. 누가 알아? 잠자리 시중이라도 잘 들면 네 몸은 좋아해 줄지.”

“뭐?”

“하긴 워낙 계집을 좋아해서 너 같은 게 성에 찰지 모르겠다.”

“말 함부로 하지 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만 나가 줘.”

“혼례를 올리고도 대군이 날 찾아오면…… 그땐 나도 어떻게 변할지 몰라. 평생 사내 사랑 한번 못 받아 보고 죽은 네 어머니 꼴 나기 싫으면, 사내 홀리는 방중술이라도 배워서 가.”

은주의 노골적인 비웃음에 은설은 이를 악물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경멸 어린 눈빛으로 저를 보던 은주는 꽤 흡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풍성한 치맛자락을 정리했다.

“중요한 말을 안 했네. 부부인 마님, 혼례를 감축드립니다. 첫날밤을 무사히 보내시길…… 후후.”

한껏 빈정거린 은주는 조소를 흘리며 밖으로 나갔다.

은주의 웃음소리가 멀어지고 조용해진 방 안엔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참을 것이다.

이런 모욕쯤이야 그동안 받아 온 폭언과 매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참고 견뎌 낼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쉽게 주저앉지 않을 거란 생각은 사흘 후 혼롓날에 처참하게 무너졌다.

* * *

정신없이 혼례를 치르고 방 안에 홀로 앉은 은설은 긴장되고 초조한 마음으로 대군을 기다렸다.

하지만, 저녁이 되고 늦은 밤이 되도록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또 얼마나 지났을까,

뻣뻣하게 굳은 몸을 뒤척이는 순간 첫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혼례복을 입은 채로 방문만 몇 시간째 바라보던 그녀는 그제야 스스로 족두리와 혼례복을 벗었다.

가지런하게 옷을 정리하고 댕기를 풀어 놓는 순간 조용히 방문이 열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린 그녀 앞에 신랑이 아닌 새어머니인 순영이 서 있었다.

순영은 고개 숙인 그녀를 힐끔 보고는 혀를 차며 자리에 앉았다.

“사내가 오죽하면 초야에 신부를 거부할까.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어. 그 어미에 그 딸X이라더니 첫날밤 소박맞는 것까지 제 어미를 닮았으니, 원.”

“…….”

“대군은 간밤에 민아가 모셨다.”

“네? 그게 무슨…….”

“그리 놀랄 것 없다. 대군이 원하면 안겨 줘야지 별수 있어? 네가 아니라 민아를 안고 싶다는데 어쩌겠어.”

아무리 그래도 초야에 소박 놓는 건 둘째치고 보란 듯이 여종을 품는 대군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

“그래도 이곳으로 오시게 했어야지요.”

“시끄럽게 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 대군인들 좋아서 너와 혼례를 올린 줄 알아? 부부인 자리에 앉게 해 줬으면 군소리하지 말고 쥐 죽은 듯이 살아. 알았어!”

말이 안 되는 혼사라는 것도 알고 대군의 옆에 서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도 어찌 다른 사람도 아닌 여종을 품을 수 있을까.

그제야 은주가 제게 했던 말이 기억이 났다.

-첫날 밤을 무사히 보내시길.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작정하고 이런 상황을 만든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에서 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대군께서 원한 건 은주였어요. 은주를 부부인 자리에…… 악!”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그녀의 고개가 사정없이 옆으로 돌아갔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바로 앉는 그녀를 향해 다시 한번 손이 날아왔다.

매번 당하는 손찌검이었지만 오늘은 더 아팠다. 눈가가 붉어지며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우리 은주가 너 같은 줄 알아! 그런 개망나니 같은 놈에게 누굴 갖다 붙이는 거야.”

“정말 대군께서 민아를 원한 것입니까?”

“열 계집 마다하지 않는 자가 대군이다. 몰랐더냐?”

정말이란 말인가.

계집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고 했던가.

기생집에서 살다시피 하며 날마다 계집을 바꿔 가며 품는다던 진헌 대군.

그게 오늘 그녀와 혼례를 올린 신랑이라는 게, 지금까지 중 가장 확실히 와 닿았다.

소문처럼 나쁜 사람일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은 제 허황된 기대일 뿐이었다.

“그럼, 민아는 이제 어찌 되는 것입니까?”

“대군이 달라고 하면 줘야지.”

“어머니!”

“명심해. 대군에게 넌 기녀보다 못한 계집이야. 대군의 노리개가 되는 한이 있어도 그곳에서 살다가 죽어.”

순영은 온갖 욕을 내뱉으며 경멸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첫날밤에 신랑을 여종에게 뺏긴 X이 대군저에서 얼마나 버텨 낼지, 쯧.”

끝까지 좋은 말 한마디 않던 순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놓인 혼례복을 보며 조소했다.

“어쩜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정이 안 갈까, 대군에게 내쳐지기 싫으면, 네 어미처럼 하룻밤 구걸이라도 해서 애를 가져. 하긴 제 어미를 닮았으면 애를 가져도 버림받긴 매한가지겠지.”

혼잣말처럼 내뱉은 순영은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어머니의 악담이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아프고 시렸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던 그녀는 옷매무시를 바로 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와 그녀가 처음 본 건 섬돌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남녀의 신발이었다.

그녀는 건넌방으로 시선을 두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떨리는 손으로 잠깐 문고리를 잡았다가 이내 다시 내렸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몇 발짝 뒤로 물러섰다.

무엇을 확인하고 싶어 발걸음을 이리 속절없이 옮기고 있었던 걸까.

뒤돌아서려는 그때 건넌방 방문을 열고 나오는 민아와 눈이 마주쳤다.

당황하는 그녀와는 달리 민아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자리를 떠났다.

멍하게 있는 그녀를 깨운 건 뒤이어 나온 대군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그녀를 보더니 누군가를 불렀다.

“염이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