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NCrawler

3. 왜 아무것도 묻지 않지?

운연궁의 은밀한 밤 — novel.naver.com · All chapters

3. 왜 아무것도 묻지 않지?

새벽의 어둠 속에서 무복 차림의 사내가 다가와 대군에게 읍하였다.

그녀도 아는 얼굴이었다. 이름이 서염이라고 했던가.

대군이 집에 올 때마다 곁에서 호위하던 사내였다.

말을 섞은 적은 없지만, 그녀를 대하는 서염의 태도는 항상 제 상전을 대하듯 정중했었다.

“가서 소세물 좀 가져다 달라 해라.”

“네, 대감.”

사내가 가고 마루에 걸터앉은 그는 시선을 멀리 둔 채 무심하게 말했다.

“제게 할 말이 있습니까?”

“아……아닙니다.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씻고 입을 의복 좀 준비해 주세요.”

“……네.”

그의 목소리는 저를 보는 눈빛만큼이나 차가웠다.

방으로 들어와 준비해 둔 옷을 서탁 위에 올려 두었다.

잠시 후, 그가 들어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자리에 앉았다.

방 안에 흐르는 침묵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침묵하고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부은 얼굴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의 손이 먼저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

착각이었을까,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던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잠시 뭔가 생각하던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거두었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지?”

“…….”

“관심도 없는 사내라 궁금한 것도 없는 건가. 아니면, 소문처럼 개망나니라 처음부터 아무 기대를 하지 않았나.”

아무래도 초야에 그녀가 아닌 민아을 품은 것에 관해 묻는 모양이었다.

무엇을 물어야 할까.

왜 초야에 소박을 놓았는지, 어떻게 저를 두고 다른 여인도 아닌 집안의 여종을 품을 수 있는지 따져 물어야 하는 걸까.

그녀가 뭐라고.

대군의 부인이 되었다고 제가 따져 물을 처지가 되는 건 아니었다.

은주와 혼인하기를 원했던 그에게 그녀는 눈엣가시일 텐데 어찌 그런 걸 따져 물을 수 있을까.

그래도 은설에게는 대군과 혼례를 올리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대군과의 혼례는 순영의 학대와 은주의 멸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처음부터 대군의 마음이 선뜻 제게 향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녀가 가질 수 없는 마음인 걸 알기에 욕심내지도 않았다.

습관적으로 되뇌던 은설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아팠다.

그의 서늘한 눈빛에 심장이 내려앉았고 차갑게 돌아서는 뒷모습을 볼 때마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보는 그의 시선은 더 무심하고 건조해졌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느꼈던 작은 설렘조차도 그녀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이유 모를 그의 차가운 눈빛에 그녀가 먼저 피하고 도망 다녔었다.

차갑게 닿는 그의 시선과 말투에 남몰래 상처받았지만, 그에 대한 마음은 미련할 만큼 부피를 더해 갔다.

이성적으로 움직여지는 감정이 아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마음에 담지 않았다면 이런 상처는 받지 않았을 텐데.

닿지도 못할 마음을 붙잡고 있는 저 자신이 바보 같고 한심했다.

그녀가 뭐라고, 따져 물을까. 가당치도 않다.

지옥 같은 이 집에서 벗어 날수만 있다면 대군이 개망나니라도 상관 않겠다고, 평생 그녀를 찾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그녀가 해야 할 대답도 알고 있다.

“저는 괜찮습니다.”

“뭐가, 뭐가 괜찮다는 거지?”

“……그러니까.”

“무엇이 괜찮냐고 물었습니다. 초야에 신부가 아닌 다른 계집, 그것도 여종과 잠자리를 한 신랑을 보고도 괜찮다?”

그가 감정을 억누르듯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차갑게 노려보는 그의 시선이 무서워 입술이 바짝 마르고 온몸이 떨려 왔다.

떨고 있는 그녀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보던 그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부인은 참으로 너그럽지 않습니까. 첩실을 몇십 명을 두어도 투기란 걸 모를 분 같습니다. 아…… 이미 다른 이를 마음에 품었으니 투기하는 마음이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는 알 수 없는 말들을 내뱉고는 거칠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잠시 후, 묵직한 그의 목소리가 별채에 울렸다.

“염아. 운연궁으로 갈 것이다. 준비해.”

* * *

진헌 대군의 사저인 운연궁은 궁궐 전각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웅장했다.

처음 가마에서 내린 그녀는 높은 담과 커다란 대문에 놀랐고 궁가 안으로 들어와서는 건물의 규모에 또 한 번 놀랐다.

안채를 비롯해 별채와 사랑채의 규모가 일반 사대부가의 건물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커서 위화감마저 들게 했다.

대군의 처소이자 집무실인 연화당은 사랑채에 있는 집무실과는 다르게 대군 외에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운연궁의 안주인이 된 은설은 안채에 머물렀다.

본가에서 부리는 여종 한 명 데려오지 못해 걱정했는데 다행히 살갑게 대해 주는 여종 금옥이와 엄 상궁이 있어서 적응해 나가는 데 크게 힘들진 않았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운연궁에 들어온 지 열흘이 지나도록 대군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대군이 그녀를 찾지 않는 건 예상 한 일이라 상관없었지만, 아랫사람 보기에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열흘 동안 신랑이 신부를 찾지 않는데도 누구 하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불편하게 눈치 주는 사람 한 명 없었다.

이 모든 게 엄 상궁이 그녀를 위해 입단속을 시킨 결과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다들 참으로 고마웠다.

그녀는 오지 않는 대군을 기다리며 어렴풋이 짐작했다.

어쩌면 그녀를 낳아 준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아주 오랫동안 그의 차가운 시선 속에 살다가 내쳐질지도 모른다고,

그래서인지 봄날의 따스함이 그녀에겐 아직도 차가웠다.

꼼짝하지 않고 방 안에만 있는 그녀가 걱정스러운지 엄 상궁이 다과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대비전에서 나온 엄 상궁은 이곳 생활에 적응할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내일 대비 마마를 뵈러 궐에 가야 하는 건 아시지요?”

“대감께서도 알고 계시는가?”

“안 그래도 조금 전에 기별이 왔습니다. 내일 오시쯤 출발하신다고 합니다.”

“알겠네.”

벌써 긴장이 되었다.

처음 가 보는 궁궐도 그렇지만 대비를 봐야 한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대비 마마께서는 마님을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엄 상궁의 다정한 목소리가 위안은 되었지만 떨리는 마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잘해 낼 수 있을까 걱정이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않습니까. 너무 염려 마세요. 부족하지만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의 상처로 밑바닥까지 내려가 있던 자신감을 조금씩 올려 주는 이가 엄 상궁이었다.

매일 같이 그녀가 불편한 게 없는지 살폈고 마음을 헤아려 주었다.

“이곳에서 지내다 보면 무료해질 때가 있을 겁니다. 혹, 좋아하시거나 즐겨 하시는 일이 있으십니까?”

“좋아하는 일이라면…….”

“이곳 생활이 궁궐 같지 않겠지만 별반 차이 없을 겁니다. 저는 마님의 인생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대감만 바라보며 사는 걸 바라지 않아요. 궁에서 왕의 승은을 입은 여인들이 자기 삶을 살지 못하고 오로지 전하만 바라보며 사는 걸 볼 때마다 참 안타까웠습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건 알지만, 평생을 그리 산다면 조금은 억울할 거 같아서 말입니다.”

엄 상궁의 진중한 말속에 그녀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뭉클해졌다.

단 한 번도 그녀의 인생을 살아 보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조용해진 그녀가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했는지 엄 상궁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제가 주제넘었다면 용서하세요.”

“아, 아니네. 엄 상궁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혼자 힘들어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네. 힘들겠지만 노력해 보겠네.”

“마님께서는 잘하실 겁니다. 그리고…… 우리 대감에 대한 소문은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지금은 제가 뭐라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기다리면 모든 게 다 나아질 겁니다.”

그런 날이 과연 올까 싶었다.

며칠간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생각은 운연궁에 머물지 않은 대군의 행보였다.

엄 상궁 말로는 급하게 어딜 다녀온다고 했지만, 그가 지금 어디서 누구와 있는지 짐작이 갔다.

그녀는 생각을 떨쳐 버리려 고개를 저었다.

기대하지 않으면 덜 상처받고 덜 아프지 않을까.

“엄 상궁,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종이와 먹 좀 준비해 주고 그 밖에 그림 도구들을 가져와 주게.”

“알겠습니다. 다른 건 필요하지 않습니까?”

“서책도 좀 구해 주게. 집에서 올 때 가져온다는 게 깜박했네.”

“네, 준비해 오겠습니다. 다른 것도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고맙네. 지금은 그걸로 충분할 것 같네.”

엄 상궁의 웃는 얼굴을 보며 앞으로는 이곳 생활이 조금은 즐거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 * *

은설은 아침부터 궁에 들어갈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시중을 들던 금옥이 머리에 비녀를 꽂아 주며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투덜거렸다.

옆에 있던 엄 상궁이 금옥을 보며 한마디 했다.

“아침부터 왜 저리 입이 나왔을꼬?”

“그냥 속상해서 그래요. 다른 곳도 아니고 궐에 가시는데 그 흔한 장신구 하나 없지 않습니까.”

“난 또 뭐라고, 그런 거 없어도 고운 분이신데 뭘 그리 속상해하느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부부인 마님이신데 마마님은 속상하지 않으세요?”

그러고 보니 정말 그녀에겐 장신구 하나 없었다. 집에서 올 때 하고 왔던 비녀가 전부였다.

엄 상궁이 그녀의 옥색 당의를 바로잡아 주며 고름을 다시 매어 주었다.

“장신구 하나 없어도 참으로 고우십니다.”

“빈말이라도 고맙네.”

“빈말 아닙니다. 우리 대군께서 괜히 눈이 높다는 말을 듣겠습니까. 대군께서 원한 여인이 어떤 분인지 궁금했는데 마음에 품을 만합니다.”

“음? 그게 무슨 말인가?”

“아……아닙니다. 늦겠습니다. 이제 나가시지요.”

엄 상궁은 말끝을 흐리며 그녀의 시선을 피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뒤를 따르던 금옥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툴툴거리자 앞서 가던 엄 상궁이 좋은 날에 그러는 거 아니라며 엄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은설은 금옥의 등을 토닥거려 주며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마음 써 줘서 고마워. 난 정말 괜찮으니 너무 속상해하지 말거라.”

“다음에 제가 고운 거로 하나 사 드리겠습니다.”

“말만 들어도 기분 좋구나. 고맙다.”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게 이런 거구나. 은설은 괜히 웃음이 나왔다.

.

.

.

운연궁 밖으로 나온 그녀는 먼저 나와 있던 대군을 보며 인사를 했다.

운연궁에 함께 온 후, 처음 마주한 것이었다.

나무에 기댄 채 서염과 이야기 중이던 대군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오랜만에 보는 그는 조금은 수척해 보였다.

그런데도 육 척이 넘는 키에 살짝 그을린 수려한 얼굴은 여인들이 마음을 뺏길 만큼 기품 있고 사내다웠다.

그의 집요한 시선을 느끼며 계단을 내려가자 묵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출발해!”

그 말을 끝으로 그의 시선도 멀어졌다.

각오하고 나왔음에도 막상 마주하고 보니 서운하고 서러운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