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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남의 부인이 행복한지가 왜 궁금하지?

운연궁의 은밀한 밤 — novel.naver.com · All chapters

4. 남의 부인이 행복한지가 왜 궁금하지?

가마에 올라탄 그녀는 궁궐이 가까워질수록 초조해지며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별채에 갇혀 순영의 학대 속에서 산 그녀는 사람을 대하는 데 서툴렀다.

특히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되면 무섭고 불안한 마음이 공포에 가까웠다.

그런 그녀가 다른 사람도 아닌 대비를 만나러 궁에 들어간다.

벌써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엄 상궁에게는 걱정하지 말라 했지만, 사실은 걱정되고 두려웠다.

대비전에 도착했을 땐 얼마나 긴장했던지 얼굴이 창백해졌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조차 어려워했던 그녀가 궁에서 가장 큰 어른인 대비와 마주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난밤 엄 상궁이 일러 준 말들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머릿속은 하얘졌고 당의 안에 숨긴 두 손은 파르르 떨려 왔다.

그 모습이 안쓰러운지 그녀를 부르는 대비의 목소리가 걱정을 가득 담고 있었다.

“아가, 그리 긴장할 것 없다. 어려워 말고 마음 편하게 앉아 있다 가거라.”

“……네. 대비 마마.”

“어마마마라 불러 주겠느냐. 우리 대군도 이 어미를 늘 대비 마마라 부르는데 여간 서운한 게 아니야.”

대비는 무심하게 앉아 있는 아들을 한번 흘겨보고는 곧바로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 운연궁에서는 지낼 만하더냐?”

“네, 어마마마.”

“다행이구나. 이리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걸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그렇게 혼례를 올리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더니 대군이 널 만나려고 그런 모양이다.”

그녀를 바라보는 대비의 눈빛이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했다.

대군의 마음이 누구에게 있는지, 그녀가 대군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아도 이렇듯 다정할 수 있을까.

그녀는 옆에 앉은 대군의 눈치를 보며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해하는 그녀와는 달리 대군의 표정은 아무 변화가 없었다.

무심한 얼굴로 앞에 놓인 찻잔만 바라볼 뿐이었다.

“아가. 재미난 이야기 하나 해 줄까?”

차를 한 모금 마신 대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슬쩍 대군의 안색을 살폈다.

대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대군이 23년을 살면서 단 한 번 이 어미에게 뭔가 부탁한 적도 없거니와 욕심낸 적도 없었다. 그런 아이가 내게 찾아와 무릎까지 꿇고 부탁하더구나. 그것이 뭔 줄 아느냐?”

“어마마마!”

지금까지 아무 말이 없던 대군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깜짝 놀란 은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보았다.

화가 난 건지 대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무심한 녀석 같으니라고, 꼭 이럴 때만 어마마마라 부르지.”

“자꾸 그러시면 저 일어날 것입니다.”

“이제 그런 협박도 무섭지 않다. 가고 싶으면 혼자 가. 이 어미는 새아기와 놀면 되니까.”

어이없어하는 대군을 무시한 채 대비가 그녀를 불렀다.

“아가, 살면서 대군이 마음 아프게 하면 언제든지 이 어미에게 오너라. 혼자 속 끓이지 말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말을 해야 사내들은 안다. 그래도 안 되면 이 어미에게 오너라. 내가 네 편이 되어 주마.”

진심이 담긴 대비의 눈이 은설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대비의 다정한 말은 위축되어 있던 그녀의 마음에 적지 않은 위로가 되어 주었다.

세상에 제 편이 생겼다는 기쁨과 뿌듯함이 이런 것일까, 왠지 마음이 벅찼다.

“아가, 잠깐만……. 주 상궁, 준비한 물건을 새아가에게 내어 주게.”

저만치 서 있던 주 상궁이 보자기에 싸인 상자를 가져와 그녀에게 건넸다.

“새아기에게 주려고 준비한 것인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우리 대군에게 와 준 것이 고마워서 주는 선물이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마.”

“어마마마……. 고, 고맙습니다.”

“어찌 이리 고울까. 어떤 아인지 내내 궁금했는데 이렇게 보니 대군이 마음에 품을 만하구나.”

그녀는 대비의 과분한 친절에 눈물이 날 만큼 행복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 보는 따뜻함이 그동안 받았던 상처를 잠시나마 잊게 해 주었다.

그래서 대군의 마음이 다른 이에게 있음을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잠시 후, 조용히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부인께서는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세요. 대비 마마와 이야기 좀 나누고 나가겠습니다.”

대비 앞이라 그런지 대군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웠다.

.

.

.

대비에게 인사를 하고 먼저 나온 은설은 대비전 근처에 있는 후원에서 기다렸다.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을 때쯤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희겸이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관복 차림의 그는 평소 보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스승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저야 이곳이 일하는 곳이니까요. 대비전에 오신 모양입니다.”

“……네”

“근데 왜 혼자 계십니까. 대군께선 어디 가시고요?”

“대비 마마와 잠시 담소 중이십니다. 그나저나 스승님 오늘은 다른 분 같습니다.”

“칭찬이라고 믿겠습니다.”

기분 좋게 웃는 그를 보며 그녀도 따라 웃었다.

“이제는 부부인 마님이라 불러야겠군요. 행복……하십니까?”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항상 곁에서 누구보다 그녀를 걱정하고 행복하길 바라는 그에게 웃어 주고 싶었다.

“남의 부인이 행복한지가 왜 궁금하지?”

그녀가 대답하려는 순간,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만치서 대군이 걸어오고 있었다.

대군의 차가운 시선이 희겸에게 날아들며 싸늘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그대가 내 부인의 행복이 왜 궁금한지 묻지 않는가.”

“그저 안부를 여쭸을 뿐입니다.”

“안부? 그대는 안부를 그런 식으로 묻는가 보군.”

“송구합니다. 제가 주제넘었다면 용서하십시오.”

희겸은 창백해져 가는 은설의 얼굴을 보며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부부인 마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스승에게 제대로 안부도 묻지 못하고 보냈다.

은설은 멀어져 가는 희겸의 뒷모습을 보며 괜히 미안해졌다.

“누가 보면 떠나가는 정인을 보는 줄 알겠습니다. 애틋해서 보는 제가 다 민망합니다.”

“송구합니다. 저는…….”

“염아! 출발할 테니 준비해라.”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멀리 있던 서염을 불러 말과 가마를 준비하라 일렀다.

그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 * *

궁가에 도착하고 곧바로 사랑채로 가 버린 대군을 보며 마음이 내내 불편했다.

엄 상궁과 금옥에게 궁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며 저녁을 보내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겨우 혼자가 되었다.

고단한 하루였다. 잠자리에 들기 위해 촛불을 끄려는 순간, 밖에서 대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물러가라.”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침의를 입은 대군이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대군을 보며 이유 없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의 집요하고 차가운 시선에 온몸이 떨렸다.

“넌 항상 날 미치게 만들어. 내가 뭘 했다고 이리 떨고 있는 거지?”

그는 손끝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검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김희겸, 그자에게 마음과 함께 몸도 허락했습니까?”

“……!”

노골적인 빈정거림에 은설은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손끝이 천천히 목선을 타고 내려와 저고리 고름 위에 멈췄다.

“몸을 허락한다는 게 꼭 남녀 간의 정사를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가령 품에 안긴다거나 아니면…… 입을 맞추는 거 또한 몸을 준거나 마찬가지겠지요.”

목덜미를 잡아채는 거친 손길에 놀라 눈을 크게 뜨는 순간, 그녀의 입술 위에 그의 입술이 살며시 닿았다.

은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틀어 그의 입술을 피했다.

“저를 욕보이고자 하는 거면 여기서 그만두세요.”

“설마요. 제가 왜 부인을 욕보이겠습니까. 전 그저 제 물건에 누가 손대는 게 싫은 거뿐입니다.”

지독하리만큼 차갑고 시린 목소리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그저 물건에 불과했다.

가지고 놀다가 지겨우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물건, 그런데도 남이 가지는 건 싫어서 제 손으로 망가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존재였다.

“대감께서 지금 가진 마음이 저를 욕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저를 안으려 하십니까.”

“사내들은 말입니다…….”

그가 말끝을 흐리며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뭔가 말을 하려다 잠시 망설이는 게 눈에 보였다.

아주 짧은 순간 그녀는 못 볼 걸 본 기분이 되었다. 눈이 커졌고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열린 잇새로 흘러나오는 숨결은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뜨거웠다.

하지만, 그의 손길은 다정하지 못했고 목소리는 더없이 차가웠다.

왜일까.

뜨겁게 다가오는 그에게서 소름 돋는 한기를 느꼈다.

그의 뜨겁고 집요한 시선만큼 그녀를 만지는 손길 또한 집요한데 왜 이렇게 가슴 한곳이 서늘할까.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속적삼 고름을 풀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음에도 없는 계집도 품을 수 있는 게 사내들입니다. 저 또한 사내지요. 하물며 그대는 제 부인 아닙니까. 의심인지 아닌지는 지금부터 알아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낮았다.

은설은 처음으로 눈앞의 사내가 미웠다.

그동안 그를 둘러싼 온갖 소문에도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이미 커질 대로 커져 버린 그에 대한 마음이 그녀조차 어찌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런 그가 이 순간만큼은 못 견디게 미웠다.

그녀는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순간, 얼굴을 손끝으로 붙잡은 그의 입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경고하는데 지금부터 딴생각하지 말고 제게만 집중하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두 사람의 몸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대, 대감! 잠시만…….”

“다른 생각 말고 내게 집중하라고 했을 텐데.”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머금었다.

뜨거운 그의 숨결이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와 녹여 버릴 듯이 휘젓기 시작했다.

가빠지는 숨을 내쉬기 위해 그를 밀쳐 보았지만 작은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렇게, 이런 식으로 그에게 안기고 싶진 않다.

사랑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상처로 기억되는 밤은 보내고 싶지 않았다.

사랑해서 마음에 품었지만 그가 주는 상처가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눈가가 붉어지며 눈물이 고여 그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참았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서러움이 목을 타고 올라와 내뱉는 목소리가 떨렸다.

“싫습니다. 놓아주세요.”

“하, 지금 싫다고 했습니까?”

“네. 싫습니다. 전 대감께서 아무렇게나 품는 그런 계집이 아닙니다. 밤새 잠자리 시중들 계집이 필요하시면 기방으로 가시든지 아니면…… 민아를 찾아가세요.”

“지금 그 말,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나가면 다시는 부인을 찾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