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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참으로 잔인했다.

운연궁의 은밀한 밤 — novel.naver.com · All chapters

5. 참으로 잔인했다.

참으로 잔인했다.

이제야 그가 얼마나 그녀를 싫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멈추지 않는 눈물과는 달리 오히려 머리는 차분해졌다.

그에게 맞설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몰라도 이 순간만큼은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밤이 지나면 찾지 않을 계집 아니었습니까? 대군께 전 부인이 아니라…….”

“지금 그 말은 부인 대접을 해 달라? 그래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 소문 들어서 알 텐데요. 제가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면, 부인은 제 아래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얼굴이 천천히 내려왔다.

“선택하세요. 오늘 저와 밤을 보낼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내를 마음에 품고 영원히 외롭게 살 것인지 말입니다.”

다른 사내라니, 그러고 보니 전부터 계속 그녀에게 다른 사내가 있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다.

그 사내가 혹시 부제학 김희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이대로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내라고 하면 혹시, 부제학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까. 그분은 제 스승님이십니다. 대감께서 생각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 이리 발끈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군께서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아서…….”

“오해? 지금 오해라고 하셨습니까. 제가 본 것만 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데, 오해?”

차갑게 그녀의 말을 자른 그가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뭘 봤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희겸과 오해 살 만한 행동은 한 적이 없었다.

그에게 따져 묻고 싶었지만, 서슬 퍼런 그의 눈빛에 주눅이 들어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부제학이 그대를 보는 눈빛은 스승이 제자를 보는 눈빛이 아니라 누가 봐도 정인을 보는 눈빛이었습니다. 혹, 부인도 같은 마음 아닙니까?”

“…….”

“말을 못 하는 걸 보니 정곡을 찔렀나 봅니다.”

이미 생각을 정해 놓은 사람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변명이라도 하길 바라는 건지, 아니면 인정하고 물러나길 바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망설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 분명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부제학은 제 스승님이고 전 그 분을 사내로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이러시는 건 알겠지만 저도 제 주제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깊게 심호흡을 내뱉었다.

그리고, 아프고 시린 감정을 억누르고 조용히 말했다.

“저를 봐 달라고 하지도 않을 것이며 마음을 욕심내지도 않겠습니다. 대감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여인을 만나면 사라져 드리겠습니다. 그전까지만 이곳에 머물게 해 주세요.”

그녀의 말을 다 들은 그가 갑자기 소리 내 웃었다.

분명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얼음처럼 차갑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좀 솔직해져 보세요. 부인이야말로 제 소문을 이용하려는 거 아닙니까.”

“그게 무슨…….”

“호색한 진헌 대군이 계집에 미쳐 조강지처를 버렸다더라. 부인이 바라는 게 이런 거 아닙니까. 그래야 저를 벗어나는 길이 수월해질 테니까요. 근데 어찌합니까. 전 그 장단에 놀아나 줄 의향이 전혀 없는데 말입니다.”

그녀를 붙잡고 있던 손길을 거두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선 그가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명심하세요. 혼인한 이상 그대는 제 것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전 남이 제 물건에 손대는 건 참지 못합니다. 그리고, 제게서 벗어날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뒤돌아 방을 빠져나갔다.

은설은 거칠게 닫히는 방문을 바라보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가 내뱉고 간 차가운 말들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심장을 아프게 했다.

* * *

의자 깊숙이 기대앉은 운은 생각에 잠겼다.

생각이 깊어 질수록 마음은 더 불편해졌다.

손끝으로 팔걸이를 툭툭 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며 눈빛은 더욱더 사나워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서서히 날이 밝아 오자 밖에서 서염이 그를 불렀다.

방 안으로 들어선 서염은 그를 보자마자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쉬었다.

“마님께 가신 거 아닙니까. 혹시 쫓겨나신 겁니까?”

“누가, 내가?”

“그게 아니면 왜 이 시각에 이곳에 계신 겁니까?”

“시답지 않은 소리 그만하고 알아보란 일은 어찌 되었어.”

면박을 받은 서염은 머쓱하게 웃어 보이며 한 발짝 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침착하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대감께서 주신 술병을 조사해 보니 사특한 성분이 들어간 것이 맞았습니다. 짐작하신 대로 정부인께서 시킨 것이 맞았고요.”

듣고도 믿기지 않아 헛웃음만 나왔다.

딸 혼롓날에 사위에게 여종을 안겨 주는 장모라.

어이없고 기가 막혔다.

“대감, 대감께서 아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머뭇거리는 서염을 보며 운은 말하라 눈짓했다.

“그 집 하인이 이상한 말을 하길래 민아라는 여종에 대해 조사를 좀 해 봤습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야?”

“사실은 병판이 이미 그 여종을 겁탈했다 합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여종이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손을 댄 듯합니다. 사실 병판 대감이 그전에도 여종을 건드려서 정부인이 다른 곳으로 팔아 버린 전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부인께서 작정하고 대감의 처소로 보낸 것 같습니다.”

“하! 미친, 그것들이 사람 X끼야!”

그는 의자 팔걸이를 세게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나며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화를 주체하지 못한 그가 창문을 활짝 열며 긴 한숨을 토하는 사이 서염이 의자를 바로 세우고 조용히 그에게 다가왔다.

“민아라는 아이 말입니다. 그냥 다른 곳으로 보내면 될 일을 왜 대감의 첩실로 보내려 했을까요.”

“불안했겠지.”

“무엇이 말입니까?”

“내가 여종을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겠지. 계집이면 환장하는 진헌 대군이니까. 해서, 호색한이라는 내 소문만 믿고 여종을 던져 줬을 것이다. 여종의 유혹에 끌려 첫째딸을 소박맞힌 것을 내게 따지지 않았다는 빚을 지우면서, 그 여종을 치워 버릴 셈이었을 거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무슨 말이냐는 서염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기가 막혔다.

생각하면 할수록 분노가 차올랐다.

이건 자신을 업신여기다 못해 왕족을 능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혼롓날 그 여종과는 아무 일 없었던 건 확실합니까?”

“무슨 뜻으로 묻는 거야. 아무렴, 네 눈엔 내가 아무 계집이나 안을 위인으로 보여?”

“그러면 왜 마님께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십니까. 오해하고 계실 텐데요.”

말을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녀의 마음에 이미 다른 이가 가득한데 말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짜증이 나고 화가 났다.

저만 보면 금세 얼굴이 굳어지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도망가기 바쁜 은설이 유일하게 웃는 순간은 김희겸과 함께 있을 때였다.

스승과 제자 사이, 웃기지도 않는다.

두 사람이 다정하게 함께 있는 모습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그녀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김희겸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연심이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김희겸의 마음이 어떻든 은설은 이미 그와 혼례를 올렸다.

문제는 은설의 마음이 그가 아닌 부제학 김희겸에게 있다는 것이다.

결혼이 결정된 뒤에도, 그녀가 그와 부제학에게 보이는 태도 차이는 극명했다.

-제게 유일한 빛이 되어 주신 분이 스승님이십니다.

애석하게도 부제학을 연모하는 마음이 몹시 깊어 보였다.

그 사실이 그를 미치고 환장하게 만들었다.

운은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다.

“염아, 알아봐 줄 일이 하나 더 있다.”

“네, 말씀하세요.”

“병판의 전 부인, 그러니까 저 사람의 생모에 대해서 좀 알아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 있었다.

운은 지금까지 은설도 제 연심을 이루기 위해 병판 내외의 계획에 동의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어 보니, 뭔가 이상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병판 내외는 첫째딸이 상처 입는 걸 감수하고 계획을 추진했다는 말인데, 자식에게 수치를 주면서까지 얻을 이득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건 나중에, 저 사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도 알아봐. 분명 아는 사람 한 명쯤은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물어도 그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을 걸 알기에 서염은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창문 너머로 어두웠던 새벽이 걷히고 점점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사냥 갈 준비를 해라. 날이 밝는 대로 떠날 것이다.”

그의 말에 서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웬만해선 사냥을 가지 않는 그가 사냥하러 가겠다고 하니 놀라는 건 당연했다.

* * *

대군이 그렇게 가 버리고 난 후부터 은설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남기고 간 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그녀를 찾지 않겠다는 그의 말대로 며칠이 지나도록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밤새 뜬눈으로 보낸 그녀는 겨우 일어나 간단히 씻고 엄 상궁이 들고 온 조반을 먹었다.

평소엔 금옥이가 들고 오는 조반을 엄 상궁이 들고 왔다는 건 뭔가 이야기할 것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냥 가셨습니까?”

“음?”

“그날 대감께서 이곳에서 주무시지 않고 그냥 가셨는지 여쭙는 겁니다.”

“아…… 그게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 급하게 가셨네.”

“그랬군요. 사흘 전 사냥을 하러 떠나신 건 알고 계십니까?”

제대로 된 대화조차 못 해 봤는데 사냥을 떠난 걸 어찌 알겠는가.

그녀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밥상 위에 놓으며 물었다.

“사냥하러 자주 가시는가?”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머리도 식힐 겸 가십니다. 가까운 곳으로 가신다고 하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사냥 가실 때 여인들도…… 아니네.”

그녀가 말해 놓고도 민망해서 고개를 숙였다.

엄 상궁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사냥하러 가실 때는 궁가 식구 몇 명만 데리고 가십니다. 여인들을 데리고 가신 적은…… 글쎄요. 소문이 그리 났습니까? 사냥 가실 때마다 여인을 끼고 가신다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을 붉히자 엄 상궁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며 혼잣말처럼 조용히 내뱉었다.

“우리 대군께서 소문이 좀 난잡하지요? 그 속내를 제가 어찌 알겠냐만은 소문이 전부가 아닐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아닙니다. 제가 아침부터 쓸데없이 말이 많았네요. 다 드시고 금옥이를 부르세요.”

일어서 나가려던 엄 상궁이 그녀의 옆에 있는 보자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전에 부탁하신 종이와 그림 도구들입니다. 말씀하신 서책도 몇 권 준비했는데 더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이 정도면 충분하네. 고맙네.”

“오늘 보니 날씨가 아주 좋습니다. 식사하시고 도원정이나 후원이라도 나가 보세요. 아직 가 보지 않은 곳이 많을 텐데 산책하신다 생각하고 걸어 보세요.”

엄 상궁의 말대로 아침상을 물리고 산책할 생각으로 밖에 나왔다.

그녀가 나오자마자 금옥이 총총걸음으로 달려왔다.

“마님, 날씨도 좋은데 산책하러 가시겠습니까? 도원정에 매화꽃이 눈꽃처럼 피었어요. 마님께서도 가 보시면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사랑채 위쪽에 자리 잡은 도원정은 활짝 핀 매화꽃으로 그 화려함을 더욱 뽐내고 있었다.

매화 꽃잎이 바람결에 눈꽃처럼 날렸고, 정자 아래 연못에는 하늘을 담아 쪽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바람결에 날리는 매화 꽃잎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처음 알았다.

“정말 아름답구나. 마치 딴 세상 같아.”

“제가 뭐라 했습니까, 마음에 들 거라 했지요. 이곳 운연궁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볼 것도 많아서 꼭 궁궐을 옮겨 놓은 것 같습니다.”

즐거운 듯 눈동자를 반짝이는 금옥을 보며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엄 상궁과 함께 궁에서 지내던 금옥은 대비의 허락하에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볼거리가 많고 사람도 많은 궁궐이 좋았을 텐데 왜 운연궁으로 왔는지 궁금했다.

“넌 궁궐이 좋았을 텐데 왜 여길 왔어?”

“전 궁궐보다 이곳이 좋아요. 마님도 좋고 엄 상궁 마마님도 좋습니다. 대비 마마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면 제가 엄 상궁 마마님 따라가겠다고 부탁했을 겁니다.”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구나.”

“마님, 다음에는 저쪽 연무장 쪽으로 한번 가 보도록 해요.”

“연무장?”

“네, 그곳에 가면 정말 예쁜 꽃이 있다고 하던데 이름이……?”

“목련이다.”

불쑥 끼어든 사내의 목소리에 그녀와 금옥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